15.
“놔……. 놔…….”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흐느낌에 가까워졌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놓으라는 명령은 가냘픈 애원밖에 되지 않았다. 팔다리는 덜덜 떨리고 온몸은 페로몬에 절었다. 숨 쉴 때마다 단내가 나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바지가 흠뻑 젖어 몸이 떨릴 때마다 질척대는 소리가 났다.
“옷을 전부 벗고 바닥에 엎드려. 엉덩이를 치켜들고 네 손으로 구멍을 벌리는 게다. 말을 잘 들으면 상을 주마. 아무 데도 찢어지는 일 없이 살살 다뤄 주지. 안에다 듬뿍 싸 줄 테니 흐르지 않게 구멍을 잘 닫고 있거라. 그리고 다시 놈을 불러. 약혼은 아예 있지도 않았던 일이라고 말하는 게다. 할 일을 잘 마치면 용서해 주마.”
“흐, 흐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멱살을 쥔 손을 떼어 놓는 것도, 머리칼을 돌려받는 것도, 개소리를 내뱉는 입을 다물라고 하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페로몬을 쏟아부으며 제 귀에 대고 지껄이는 말은 주문과 다를 바 없었다.
제 몸을 옭아매는 것도 모자라 머릿속을 파고들어 영혼을 잠재웠다. 껍데기만 남은 육신을 오로지 성욕만 느낄 수 있는 짐승으로 만들었다.
“알아들었느냐?”
“흐, 하읏…….”
“알아들었겠지. 귀엽고 작긴 해도 머리라는 게 있으니.”
아만다리스가 손을 풀었다.
그는 이제 페란스가 페로몬에 취해 흐느끼며 알아서 옷을 벗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퍽!
그러나 페란스는 찻주전자를 집어 들어 아만다리스에게 던졌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주전자가 깨졌다. 식은 찻물을 뒤집어쓴 아만다리스가 울컥 소리를 질렀다.
“페란스 로사델 카벨리카!”
페란스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문을 향해 달려갔다. 아만다리스는 단숨에 뒤를 쫓아와 머리칼을 낚아챘다.
“읏!”
페란스는 발버둥 쳤다. 아니, 발버둥 치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아만다리스가 단단히 붙들었다.
“멍청한 것 같으니. 네가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흐으……, 흑,”
“그딴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간 내가 너를 너무 귀하게 다뤘던 게야. 이번 발정기만 해도 네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일부러……. ……빌어먹을.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는지.”
빠르게 내뱉는 울분을 따라 페로몬도 널을 뛰었다. 페란스는 머릿속이 안개처럼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안 돼.
한 번 머리가 헝클어지기 시작하면 저는 곧 알몸으로 엎드려 개새끼의 자지를 빨고 있을 것이다.
싫어. 더 이상은.
어리석었다.
정신이 나간 개새끼가 이런 짓까지 하리라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근위대와 시종장이 아무리 개새끼의 개라고 해도 그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페로몬을 풀어 댄 적은 없었기에 마르스티엘만 내보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개새끼는 자신이 지켜야 할 선 따위 더는 없다는 식으로 나왔다.
너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러나 그건 제 마지막 선이었다. 개새끼의 페로몬에 취해 바지를 흥건히 적시는 모습만큼은 절대 보일 수 없었다.
“그만 저항해! 어서 벗어!”
아만다리스가 고함을 지르던 그때였다.
끼이익, 쾅!
잠갔던 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열로 흐려지는 시야에 언뜻 들어온 것은 마르스티엘이었다. 마르스티엘의 등 뒤로 근위대 둘이 우당탕 뛰어들었다. 아마도 마르스티엘을 말리기 위해 뒤쫓아 온 듯한 모양새였으나 그들은 방 안의 광경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왕실 근위대는 전부 베타였다. 개새끼가 작정하고 뿌려 대던 페로몬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섭정에게 강제로 붙들려 있는 듯한 왕자와, 깨진 찻주전자 파편이 흩어져 있는 바닥, 그리고 열이 오른 듯 붉고 몽롱해진 얼굴을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중인지 짐작은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섭정은 왕자의 뒷머리를 틀어쥐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불경이었다.
“놔.”
마르스티엘이 아만다리스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꺾어 버렸다.
우드득!
“으아악!”
아만다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뒷머리를 움켜쥔 힘이 사라졌다. 늘 빌어먹게도 크고 건장하다고 생각했던 알파의 몸이 거칠게 나가떨어졌다.
그 모든 일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걸린 그림 같았다. 너무 급작스러웠고, 사실 같지 않았다.
페란스는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아만다리스가 바닥에 등짝을 처박는 모습과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는 근위대를 희미한 웃음과 함께 쳐다보았다.
“전하.”
마르스티엘이 제 몸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한순간 잊고 있었던 현실감이 몰려들었다.
“흐, 안…… 놓으,”
그 와중에도 제 몸이 페로몬에 절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르스티엘이 떠받친 엉덩이가 젖어 있을 것이다.
각인한 오메가의 페로몬은 다른 알파에게 비리고 역했다. 지금 제 존재가 그에게 역할 것이다.
“페, 페로몬이……,”
“원하시면 지금 말씀하셨던 여행을 떠나도 됩니다. 준비가 어렵진 않습니다.”
“…….”
궁은 안전하지 않았다.
개새끼가 심어 놓은 사람은 끝도 없었고 근위대조차 개새끼의 편이었다. 페란스는 제 몸이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마르스티엘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금 페란스가 잡을 수 있는 손은 제 것이 유일하다고.
“그……,”
어느 순간 버둥대던 몸이 멈췄다.
페란스는 이런 말을 하는 마르스티엘의 그 어디에도 자신을 역겨워하는 태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수는…… 없어.”
어째서.
어째서 너는 다른가.
어째서 너만.
“준비를 해야…… 이렇게는 안 돼. 이건 도망치는 것 같잖아.”
툭.
저도 모르는 새 이마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각인 반응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리게 했지만 페란스는 그를 놓고 싶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곳에서 단 하나 안전한 장소가 그인 듯싶었다.
“일단은 침실로 가.”
“뜻대로.”
마르스티엘은 페란스를 안고 사실을 나섰다.
허둥대던 근위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길을 비켜 주었다.
* * *
아까는 어떻게 된 건데.
입 속에서 내뱉지 못한 질문이 맴돌다 사라졌다.
근위대를 시켜 강제로 궁을 떠나게 만들었던 마르스티엘이 어떻게, 무슨 이유로 다시 돌아왔는지 궁금했지만 끝내 물을 수가 없었다.
……알고 있었던 건가. 개새끼가 저렇게 선을 넘으리라는 걸.
자신도 몰랐던 일을 마르스티엘이 알고 있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맞는 듯했다.
저를 침실로 데려오고 나서도 마르스티엘은 전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빠르게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 자신을 욕실로 옮겼다. 따듯한 물에 잠기게 한 다음 주위에 촛불을 켜 놓았다.
초가 냄새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듯 제 온몸을 뒤덮은 것 같았던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이 조금씩 옅어져 갔다.
스륵, 툭.
겉옷을 벗은 마르스티엘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욕조를 향해 다가왔다.
“머리칼도 씻어 내야 합니다.”
따듯한 물에는 향유를 잔뜩 풀었다. 그 탓에 물이 탁해져 알몸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제정신이 돌아오자 신경이 쓰였다.
“괜찮아. 내가 하겠다. 너는 그만 나가도 좋아.”
“곁에 있겠습니다.”
머리맡으로 다가온 마르스티엘의 손이 제 이마를 눌렀다. 손짓을 따라 고개를 젖히자 머리에 따듯한 물이 쏟아졌다.
“내가 한다니까.”
“제가 보기만 하는 게 더 불편하실 텐데요.”
“……나가도 된다고 했다. 내 말이 우스운가 보군.”
투덜대면서도 눈이 감겼다.
페란스가 보지 못하는 동안 마르스티엘이 뜻 모를 웃음을 잠깐 지었다.
“이런 건 시종을 불러도 돼.”
“지금 내키는 시종이 없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페란스가 눈을 감은 채 짜증을 부렸다.
“그렇게 뭐든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왠지 네가 그런 식으로 내가 하는 말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다 믿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오늘.”
“…….”
그 말에 억지로 내는 짜증도 사라졌다.
마음이란 게 우스웠다. 절대 정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할수록 그 반대가 되었다.
온몸을 쑤석이던 페로몬이 잠잠해지자 감정도 고요해졌다. 그에게 제 모습을 들키는 게 죽기보다 싫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는 나를, 역겨워하지 않아.
그가 신분이나 권력 같은 것을 얻기 위해 제 약점을 이용하는 중이라는 것은 알았다. 친절은 거래의 일부였고 다정함은 후한 덤이었다. 그는 위스타드의 오메가 왕자가 일방 각인을 감행할 만큼 머저리라 제게 이득이 되었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역겨워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들끓던 감정들이 전부 씻겨 나갔다.
그가 제 바닥을 알고 있어 다행이었고 지금 곁에 있어서 좋았다.
“……싫지는 않나?”
“어떤 게 말입니까?”
비누로 거품을 내어 제 머리칼을 부드럽게 적시며 마르스티엘이 되물었다.
“페로몬. 듣기로는 상당히 역하다던데.”
“각오한 만큼은 아닙니다.”
왠지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 같았다.
“역하긴 역하다는 소리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 그럼 어떻다는 소린데?”
답은 조금 느리게 들려왔다.
“제가 기억하는 페로몬이 있습니다. 그 페로몬의 변주 같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