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몰라서 물어?”
페란스는 살짝 인상을 썼다.
“일부러 붙어서 날 만지고 있잖아. 각인 반응이 온다는 걸 뻔히 알면서.”
“제가 전하를 만지고 있습니까?”
푸른 시선이 밀려들었다.
“붙어 있다고 하기엔 옷자락이 스치지도 않을 거리고 만진다고 하기엔 겨우 닿아만 있는 수준인데…… 만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뭐라는 건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럼 하지 마.”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만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각인 반응을 인내할 이유가 없었다.
가치가 없어. 그냥 애만 타잖아.
페란스는 말라 가는 입 속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그 바람에 입술이 움직이고, 마르스티엘의 손끝이 작게 흔들렸다.
“……. 만지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하지만 각인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전하의 힐난을 감당하고 싶진 않습니다. 충분히 신경 쓰는 중이라.”
비로소 입술에서 손가락이 떨어졌다. 방금 전 흔들렸던 손끝처럼 입술이 작게 떨렸다.
그의 말대로 옷자락도 스치지 않을 거리였다.
각인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마르스티엘은 시선으로, 절제된 동작으로, 만지고 싶지만 만지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푸른색 시선을 쫓아가려는 듯이.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해지는데.”
혀가 입술을 핥았다. 목이 말랐지만 차를 더 마셔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각인 반응이 어디서부터 나타나는지. 내가 그걸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저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이제 열이 받는 게 아니라 다른 감정을 불러왔다.
페란스는 저 시선이 좋았다. 시선이 무게를 띠고 저를 누르는 것 같았다. 저 알파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껴 보고 싶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앞으로 질리도록 겪으실 겁니다.”
“그래서 대체 언제?”
페란스는 손을 뻗어 마르스티엘이 목에 두른 스카프를 움켜쥐었다.
매끄러운 실크에 주름이 남았다. 제 손자국 모양의 얼룩일지도 몰랐다.
의상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페란스는 스카프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어쩌면 마르스티엘이 한 말을 지금 이해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살갗은 닿지 않았고, 만진다고 할 수 없는 동작이었지만 뭐든 하고 싶었다. 닿고 싶고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태연하게 목을 내어준 마르스티엘이 답했다.
“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약보다 다른 게 더 필요합니다.”
“그게 뭔데?”
궁금했다.
닿고 싶을 때 언제든지 닿을 수 있다는 건 어떤 걸까.
이렇게 제 몸 상태를 살피며 견딜 수 있는 거리를 재지 않아도 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지금처럼 입 안이 마를 때 침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입술을 빨 수 있다면 대체 어떤 감각이 느껴질까.
“장소.”
“장소? 어떤?”
마르스티엘이 몸을 숙였다.
이번에도 절대 닿지 않는 거리에서 멈춰 선 그가 귓가로 이런 말을 흘려 넣었다.
“전하와 제가 매일 한 침대에 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건…….”
단순히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정식 약혼자를 정부처럼 궁 안에 데려다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궁을 비우고 호텔로 갈 수도 없었다.
마르스티엘이 말하는 건 둘이 매일 한 침대를 써도 될 만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먼저 감각이 치솟았다.
매일 한 침대를 써야 한다는 말이 머리 한구석을 짜릿하게 달구었다. 그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무엇이 된 느낌이었다. 언제라도 곁을 지키는 무엇, 한없이 단단하고 안락한 무언가가.
……이런 기분이 들어도 되는 건가.
더는 믿지 않기로 했다. 마르스티엘과 한 것은 거래였다.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기 위해 이용하고 버리기로 했다.
이 기분은 잊어야 했다.
알면서도 스카프를 당기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각인 반응을 무시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안달하는 쪽은 그였다.
“……여행이라도 갈까?”
“그게 좋겠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어쩐지 공기가 데워지는 것 같았다. 아주 조금 더 좁혀진 거리가 살갗에서 느껴지는 온도차를 만들었다.
시선은 입술에 매여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
잠깐만 고개를 숙이면 저 입술을 삼킬 수 있었다. 충동이 너무 강렬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
그때였다.
“전하, 전……!”
쾅!
묘하게 키슬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사실의 문이 왈칵 열렸다.
달아오른 공기 속에 닿지는 않아도 가까이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전하. 뭘 하신다고요?”
가시가 돋아난 것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이는 아만다리스였다.
* * *
“…….”
공기가 돌변했다.
페란스는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손발이 저릿대는 것을 느꼈다.
아만다리스의 눈가가 붉었다. 동공이 벌어진 데다 피부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단속이 안 되는 것처럼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만다리스의 페로몬뿐 아니라 다른 페로몬도 느껴졌다.
제 짐작이 맞다면 아만다리스는 적어도 둘이 넘는 오메가와 발정기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발정기는 아직 다 끝나지 않은 듯했다.
마르스티엘이 몸을 돌려 제 앞을 가로막고 섰다. 눈앞에 발정기가 끝나지 않은 알파가 나타났을 때 모든 알파가 할 법한 행동이었다.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만다리스 공. 가서 발정기를 마저 끝내십시오.”
“……천한 게 제 주제를 모르고.”
아만다리스가 마르스티엘을 향해 이를 갈았다.
“전하. 일단 이걸 치우는 게 어떻습니까. 저와 단둘이 하실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아만다리스는 거리낌 없이 페로몬을 풀었다.
“……흡!”
한꺼번에 쏟아 내는 페로몬은 순간 숨을 막히게 했다. 페란스는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사지가 떨려 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마르스티엘은 고개를 낮춰 페란스의 상태를 살폈다.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페란스는 제 얼굴이 그새 얼마나 창백해졌는지 알지 못했다.
“전하. 어서 이걸 치우십시오. 그래야 한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만다리스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필 발정기에 페란스의 약혼 소식을 전해 들었다. 거의 끝나 가는 무렵이긴 했지만 분노로 인해 제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페로몬이 줄줄 흐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주워 입고 수도로 돌아왔다. 그간 아무것도 모른 채 착실한 문지기 노릇을 해 주었던 왕실 근위대장이 입궁하겠다는 그를 말리려 들 정도였다.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아만다리스는 근위대장의 견장을 잡아 뜯고 막무가내로 들어섰다.
“아니면 다른 인간 앞에서 그 꼴을 보이시겠습니까?”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의 양을 늘렸다.
“……흣,”
페란스가 몸을 구부리며 숨을 헐떡였다.
차라리 숨이 막히는 거라면.
그럼 얼마든지 참고 버틸 것이다. 그러나 제 몸에서 단내가 배어 나오는 것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냄새를 마르스티엘이 고스란히 맡고 있으리라는 게 가장 끔찍했다.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을 향해 말했다.
“나, 나가……. 그만,”
“전하.”
“나가라고 했다. 명령, 이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가!”
페란스는 남은 힘을 그러모아 소리를 질렀다.
아랫도리가 들썩이는 걸 참느라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제 바지에는 오줌을 싼 것처럼 묽은 얼룩이 지고 있을 것이다.
“나가라고! 거기! 들어와서 내 약혼자를 배웅해! 당장!”
문밖을 지키던 근위대가 들어섰다.
마르스티엘의 입매가 굳었다.
“전하. 혼자 감당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었다. 혼자 있어야 했다.
마르스티엘이야말로 아만다리스의 페로몬에 발정하는 제 꼴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데려가! 어서!”
“명을 따릅니다.”
근위대가 마르스티엘을 에워쌌다.
“가시지요.”
“전하.”
마르스티엘이 저를 불렀다. 페란스는 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파묻고 그를 외면했다.
저벅저벅…… 쿵.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지금도 죽을 것 같았던 개새끼의 페로몬이 훅 번져 왔다.
“그만해!”
페란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용의주도하게 방문마저 걸어 잠근 아만다리스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서로의 발정기는 함께 보내기로 합의가 되지 않았습니까?”
“무슨 개소리를……. 네 몸에서 나는 페로몬 향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 보지도 않았나?”
“지껄이시는 걸 보니 오늘도 팔팔하시겠군요. 다행입니다.”
아만다리스가 페란스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옷을 벗어.”
창백해진 손가락이 아만다리스의 손을 떼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장…… 꺼져.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지 말……,”
“벗으라고. 그래야 박아 주지.”
“이 개……,”
“너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안타깝게도 머리가 너무 나빠. 네 몸은 결국 내 자지를 받아먹게 되어 있잖느냐. 십 년도 넘게 겪었으면 이제 그만 외울 때도 되었는데.”
“건, 건드리지…… 밖에 근위대가……,”
아만다리스는 페란스의 뒷머리칼을 왈칵 붙들어 고개를 젖히게 만들었다.
“잘 들어라. 이제부터 할 일을 알려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