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왕실 보석상은 약혼반지라는 말에 입꼬리를 귀밑까지 말아 올렸다.
“그렇다면 역시 루비지요. 카벨리카의 역사이자 상징이옵니다, 전하.”
왕실 보석상의 눈짓에 그가 데려온 젊은 도제가 묵직한 가죽 가방을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꺼내 왔다.
하얀 벨벳 방석 위에 반지에 쓸 만한 보석이 주르륵 늘어섰다.
“루비라.”
페란스는 큼지막한 붉은 보석을 집어 그걸 외알 안경처럼 한쪽 눈에 대고 마르스티엘을 바라보았다.
붉은 보석은 마르스티엘을 보여 주진 않았다. 그래서 페란스는 보석을 보는 척하며 마르스티엘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흠 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다.
아니, 더 근사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의상이나 장신구도 더 신경을 쓴 듯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말이야.
페란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괜히 정이라도 붙으면 어쩌려고.
“무엇을 그렇게 보십니까.”
마르스티엘은 갓 연인이 된 알파처럼 다정하게도 물었다.
“네 눈 색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는 중이야. 붉은 보석이라면 너무 현란할 것 같은데.”
“다른 보석도 괜찮습니다, 전하.”
“그럼 다른 것도 대어 보지. 푸른빛이 도는 보석은 없나?”
보석상은 더 벌릴 수도 없을 것 같은 입을 한껏 늘이며 양손을 비볐다.
“물론 있습니다, 전하. 사파이어도 있고 에메랄드도…… 하오나 약혼자분의 눈 색깔과 맞는 걸 찾으신다면 마땅히 이게 되어야 할 듯하옵니다.”
보석상이 도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왔다. 도제는 이중으로 되어 있던 가방 바닥을 열고 보석이라 하기엔 큼지막한 돌을 꺼내 왔다.
“원래 세공 전의 원석은 보여 드리지 않습니다만…… 엣헴, 무려 전하의 약혼반지 아니옵니까.”
“이건 무슨 색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블루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옵니다, 전하.”
“아하.”
원석을 쥔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원석은 그저 까만색이었다. 이게 어떻게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는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손에 느껴지는 묵직하고 단단한 감촉은 마음에 들었다. 그저 검은색이 아니라 빛을 섞어서 엮은 듯한 은은한 광채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비슷하네.
머리색과.
어쩌면 이 단단함도 조금 닮지 않았을까. 그 역시 이 단단한 원석처럼 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니까.
“그런데 이 정도면 반지가 아니라 왕관에 박아야 될 것 같은데. 너무 크지 않나?”
보석상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쪼개서 두 분의 반지를 모두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가치가 떨어지잖아.”
“그러나 의미를 더할 것이옵니다. 원래부터 하나였던 보석을 나눠 가지시는 것이니까요.”
페란스가 쓰게 웃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의미가 사라질 반지였다. 보란 듯 저 손가락에 끼워 놓았다가 위자료로 건네게 될 것이다.
그럼 그냥 주는 게 낫지. 쪼개서 값을 떨어트리는 게 아니라.
“다른,”
“이걸로 하겠다.”
다른 보석을 가져오라 이르는 말이 마르스티엘의 말과 엉켰다.
“……이게 마음에 드나?”
“네, 전하. 이자가 한 말대로 원래 하나였기에 의미가 깊을 것 같습니다.”
모르겠다.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그대는 계산에 능할 줄 알았는데. 다이아몬드가 마음에 든다면 이건 다른 데 쓰도록 하지. 목걸이나 브로치를 만들어 주겠어. 반지는 다른 걸로 하는 게 어때?”
“이게 좋습니다, 전하.”
마르스티엘은 다이아몬드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페란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체 누가 장사꾼인지 모르겠군.
고작 의미 하나에 저 비싼 다이아몬드를 십분의 일 가격으로 만들겠다니.
“……뭐, 내 약혼자가 그렇다면.”
그쯤에서 페란스는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사랑에 눈이 먼 바보 노릇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이것으로 하겠다.”
“제 손과 발 전부를 걸고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쌍의 반지를 만들어 오겠나이다, 전하.”
“기대되는군.”
보석상은 아예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외람되오나 전하, 대금의 일부를 미리 받을 수 있는지요. 이만한 보석을 제대로 세공하려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온데 송구하게도 그게 모두 돈인지라…….”
유감스럽게도 약혼반지는 혼인반지와 달리 중간에 주문이 회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왕실 보석상은 하나만 팔아도 몇 년을 먹고살 엄청나게 비싼 다이아몬드를 팔아 몹시 행복한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꿈에 부풀어 있지만은 않았다.
페란스 왕자가 지적한 대로 다이아몬드는 쪼개는 순간 값이 훅훅 떨어졌다. 의뢰대로 이걸 쪼갰는데 만일 약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리 쐐기를 박아야 했다.
“그래? 얼마나?”
“대금의 절반 정도가 필요하옵니다, 전하.”
“절반이나?”
그 정도면 왕실에서 매년 사 가는 보석 대금의 반 정도 될 것이다.
“금액이 너무 크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왕실 비서관이 남은 예산을 가늠해야 해서.”
게다가 섭정이 시비를 걸지도 몰랐다. 아만다리스가 잘하는 짓이 왕실 예산을 쥐고 오메가 왕자를 사치나 일삼는 머저리로 모는 것이었다.
“일단 반지부터 만들도록. 반지가 늦으면 약혼도 그만큼 늦을 테니.”
“그렇다면……,”
보석상이 그럼 선금을 낮춰야 할지 갈등하는 사이 마르스티엘이 나섰다.
“청구서는 레시토 호텔로 보내라.”
“예? 키슬크 공이 아니라요?”
“그게 무슨 소리야.”
보석상과 페란스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어깨를 살짝 쓰다듬었다.
“약혼이 늦는 게 싫습니다.”
“왕실 약혼에 반지를 받았다는 말은 이제껏 없었어.”
“저는 예외로 해 주십시오. 그만큼 특별하다고.”
“……못 당하겠군.”
속으로야 어떻든 두 사람의 대화는 다정한 연인의 그것이었다.
보석상은 주문이 회수될 일은 없겠다며 연신 흐뭇한 웃음을 흘렸다.
결국 반지는 마르스티엘이 사는 게 되었다.
대신 페란스는 약혼반지가 완성되기 전까지 그에게 끼워 놓을 다른 반지를 하나 더 구매했다. 마침 보석상이 들고 온 다섯 개의 반지 중 하나가 마르스티엘의 약지에 꼭 맞았다. 큼지막한 루비에 에메랄드를 곁들인 반지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했지만,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손가락에 끼우자 어이가 없을 정도로 느낌이 괜찮았다.
왜 이런 반지도 어울리냐며 기막혀 하는 페란스의 등을 마르스티엘이 새 반지를 낀 손으로 토닥였다.
그렇게 사랑에 눈이 먼 왕자의 약혼반지 이야기는 보석상의 입을 통해 삽시간에 수도를 휩쓸었다.
* * *
보석상이 돌아갔다.
갓 약혼자가 된 마르스티엘과 단둘이 남은 사실로 키슬크가 다과를 보내왔다.
오도독!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바라보며 생각 없이 손에 닿는 과자를 씹었다.
오렌지와 레몬 껍질을 반죽에 섞어 튀긴 과자는 달고 새콤했다. 입 안에 신맛이 감돌아 그런지 차가 잘도 넘어갔다.
오도독!
평소라면 과자에는 손도 안 댔을 것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이상하게 식욕이 돌았다.
게다가 각자 원하는 바가 따로 있는 거래이긴 해도 약혼 사실이 정해지고 나니 마르스티엘에게 느껴지던 거리감이 훌쩍 좁아든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가 진짜 약혼자인 것처럼, 그래서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상처가 방해가 되진 않습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은 마르스티엘이 물었다.
“음? 무슨 상처?”
“입술 말입니다.”
“아……?”
그때서야 페란스는 입술을 물어뜯은 상처 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픈 줄도 몰랐다.
“그대가 말하기 전까진 괜찮았어.”
페란스는 쓰게 웃으며 입술을 냅킨으로 쓸었다. 모르고 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좀 아팠다.
“아직 묻어 있습니다.”
“아, 젠장.”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되는데……,”
마르스티엘의 손끝이 입술에 닿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상처를 스쳐 간 손가락이 상처가 난 틈에 숨어 있던 작은 과자 부스러기를 닦아 냈다.
각인 반응이 시작되었다. 배 속 전체가 울렁대는 메스꺼움을 페란스는 꿀꺽 삼켰다.
“다 됐습니다. 아팠습니까?”
“아니. 그렇진 않았는데……. ……그보다는 각인 반응이 문제라.”
“그렇군요.”
그런 말을 들어도 마르스티엘의 손은 입술을 떠나지 않았다.
이건 좀 이상한데. 괴롭히려는 건가.
그러자니 손끝은 너무 조심스러웠다. 오늘 끼워 준 반지가 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빛에 닿아 현란한 색을 뿜었다.
“어떻게 난 상처입니까?”
“……말해야 하나?”
“제가 했던 청혼을 거절하실 때만 해도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랬다. 입술을 물어뜯은 건 그다음이었으니까.
“너는 그걸 청혼이라 부르는군. 네 입으로 거래라 해 놓고는. 너무 양심 없는 짓 같은데.”
“제가 청혼이라 했으면 더 양심 없는 짓이 됐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제 신분이 성에 안 차시잖습니까.”
“이젠 신경 안 쓴다는 걸 알잖아. 그리고 너무 가까워.”
……가까워. 쓸데없이 정이 옮겨 붙으면 어쩌라고.
“잘 참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참고야 있지. 약혼자 앞에서 내내 토하는 꼴을 보일 수는 없잖아. 게다가 지금은 차를 마시는 중이라고.”
“익숙해지셔야 할 텐데요. 각인을 풀려면.”
“알고 있어. 그럼 지금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는 건가?”
“이런 짓?”
마르스티엘이 고개를 살짝 갸웃댔다.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