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페란스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답했다.
“……. ……네가 다른 오메가와 시시덕거릴 생각을 하니 열이 받아서.”
몇 가지 대답 중 골라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진실과 가장 가까운 게 되어 버렸다.
“제 존재가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손해가 되리라는 생각도 변한 겁니까?”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어.”
그건 거짓말이었다.
혼자 남은 삼십 분 동안 페란스는 좌절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더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더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겠노라고.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위스타드의 적통 계승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한다면 자신 또한 기꺼이 그를 체스 말로 삼겠다고.
진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니 명예가 얽힐 필요도 없었다.
청혼을 하면 마르스티엘을 고립시킬 수 있었다. 아만다리스는 그를 적이자 배신자로 낙인찍을 것이다. 마르스티엘이 자신을 제 편이라 믿게 만들고 각인을 풀게 만들 것이다.
그러고 난 뒤라면 파혼은 언제라도 할 수 있었다.
마르스티엘이 영리하게 저울질을 하긴 했지만 그는 신분과 거기에서 태생적으로 따라오는 권력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
왕실의 약혼자가 됨으로써 마르스티엘은 이국의 손님에서 정치판의 말이 되었다. 더는 유유자적한 방관자로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마르스티엘의 명줄을 쥔 건 이제 왕실이었다.
작위가 있건 없건 그는 충분히 유용했다. 그러니 쓸모가 다할 때까지 제 손아귀에서 굴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묻는 약간의 때는 감수할 수 있었다.
왕이 되면 지워 낼 수 있는 얼룩이었다. 그쯤은 감당해야 했다.
“네가 남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페란스는 태연하게 얼룩을 만들었다.
“열정적인 말씀이로군요. ……언제부터 저를 그렇게 여기신 겁니까?”
“나도 몰라.”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마르스티엘의 눈을 마주하며 가슴이 파도처럼 술렁였던 그 순간을 페란스는 정확히 기억했다.
-저도 그 고통을 압니다.
처음으로 저 무심한 푸른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너 같은 존재가 처음이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몸이 닿지는 않았지만 둘 다 서로에게 기댄 것처럼 몸을 굳혔다.
“내 비밀을 아는 것도, 그래서 나를 보살펴 준 것도. 네가 처음이야.”
“……. 그렇다면 각인 상대는. 그자는 전하께 무얼 해 드립니까.”
“나를 능욕하지. 착취하고, 모욕한다. 내 피를,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이 빠르게 튀어 나갔다.
페란스는 창백해진 손끝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여러 개의 거짓 중에 지금 하는 말은 진실이었다.
이런 말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마르스티엘이 유일했다.
“섭정입니까?”
“……!”
그리고 이토록 빠르게 제 바닥을 찔러 오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페란스를 향해 마르스티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말이 되니까요. 위스타드의 지금 상황이. 전하께서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것도.”
“나는……. ……그건 아무도, 아직…….”
“섭정에게 진심이셨던 겁니까?”
“무슨 그런 개소리를!”
욕설이 튀어 나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페란스는 각인 반응이 왔을 때보다 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랏빛이 된 입술을 떨었다.
“아닌 걸로 알겠습니다. 잘됐군요.”
정작 마르스티엘은 동요가 없었다. 느닷없는 칼이 턱 밑에 들어왔을 때에도, 그게 청혼으로 이어졌을 때도 마르스티엘은 지금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페란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뭔가를 드러낸 유일한 순간은 발정기가 온 제 모습을 마주했던 단 한 번뿐이었다.
“……뭐가 잘됐다는 건데.”
“마음이 있으면 더 힘들어집니다.”
“어떤 게?”
“각인을 푸는 일이.”
마르스티엘이 살짝 몸을 숙여 거리를 좁혔다. 줄어든 거리만큼 목소리가 낮아졌다.
“전하께서 준비가 되시면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전하께서는 각인이 온전히 풀려야만 혼인하겠다고 조건을 거실 것 같으니.”
그가 옳았다.
페란스는 그를 수단으로만 대할 생각이었다.
결코 마음을 주지 않을 것이다. 쓸모가 다하는 날 이국에서 온 이방인은 제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마음이 없으니 무슨 짓도 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믿고 각인을 푸는 법을 온전히 제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미소 정도는 팔 수 있었다.
각인 상대가 아만다리스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 이상 그는 절대적으로 제 사람이어야 했다.
페란스는 손을 뻗어 마르스티엘의 손끝을 툭 건드렸다. 시들어 가는 풀반지가 긴 손가락에 매달려 흔들렸다.
“그거 꽤 잘 어울렸던 거 알아?”
농담이라 여겼던지 마르스티엘이 피식 웃었다.
“……놀랐습니다. 반지까지 준비해 오셨을 줄은 몰라서.”
“바꿔 줄게. 내일 궁으로 와. 치수를 재야 하니까. 반지는 함께 고르자고.”
“뜻대로.”
마음은 주지 않을 것이다.
페란스는 각인 반응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술렁대는 심장을 느끼며 이를 꾹 물었다.
마음을 줘서는 안 돼.
페란스는 각인 반응을 참을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마르스티엘의 손가락을 잠깐 쓸었다.
“어서 풀렸으면 좋겠어.”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릴 겁니다. 하지만 저 역시 같은 바람입니다.”
“그래서 네게 마음껏 키스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
“…….”
마르스티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끝에 와 닿는 살갗에 작은 경련이 일어났던 것을, 페란스는 놓치지 않았다.
* * *
“저, 전하…….”
키슬크가 방금 전부터 울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부르는 중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페란스는 평소와는 달리 제법 성실하게 포크를 움직이며 대꾸했다.
지금은 아침 식사 시간이었고, 늘 조금만 더 드시라 애원하는 입장이었던 키슬크는 지금 콧노래를 부르며 접시를 들고 재주넘기를 해도 모자랐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
식사가 끝날 시간에 맞춰 왕실 보석상을 들이라는 명령을 받기 전부터 그랬다.
“보석상을 부르시는 건…… 그게 정말인지요.”
“부르라고 했잖아. 왜?”
“그러니까 보석상을 왜 부르라 하시는지…… 그 이유가…….”
“약혼반지를 맞춰야 해서.”
“헙, 저, 전하……!”
키슬크가 숨을 훅 들이삼켰다.
“약혼은 와, 왕실의 대사입니다. 그런 걸 그렇게 쉽게 결정하실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섭정께 자문을 구하시는 게……,”
탕!
페란스는 포크를 소리 나게 떨어트렸다.
키슬크는 어깨를 움찔했다.
“입맛이 사라졌잖아.”
“전, 전하…….”
“내가 올해 몇 살이지?”
뜬금없는 질문에 키슬크는 눈을 끔벅거렸다.
“스물아홉이 되셨습니다, 전하.”
“선왕께서 성혼한 나이는?”
“열아홉이셨습니다, 전하.”
“십 년이나 늦은 걸 보면 내 눈이 까다롭긴 한 모양이야. 그렇지 않나, 경?”
“……. 왕실의 대사는 취향만으로 논할 게 아니옵니다, 전하.”
키슬크는 소맷자락으로 이마를 한 번 훑었다.
제 잔소리를 페란스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입을 닫을 수는 없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늦어지면 그마저도 소용없는 일이지.”
“전하. 그리 말씀하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는,”
“왕실에 걸맞은 배우자감이 없다고 이제껏 말해 온 건 공과 섭정이었다. 내가 미혼으로 더 늙어 간들 이제껏 없던 인물이 어디서 뚝 떨어질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드는 인간이 나타났을 때 대사든 소사든 해치우겠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아니꼽나?”
“전하! 아니꼽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면 입 닫아. 내 약혼을 반대할 참이면 블루와렌의 수호자보다 더 훤칠한 인물을 데려와 놓고 말하든가.”
“섭정이 승인하지 않을 겁니다, 전하.”
키슬크가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난 다음 말했다.
“이국에서 온 자는, 전하께서도 아시는 대로 아만다리스가와 먼저 혼담이 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자를 어찌 전하께서,”
“나도 몰랐는데,”
툭!
페란스는 탁자 위의 물잔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엎어진 잔에서 물이 줄줄 흘러 탁자 위를 어지럽혔다.
“전하…….”
키슬크가 앓는 소리를 삼켰다. 그 얼굴에 대고 페란스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나는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머는 성정이었나 봐.”
“…….”
“한 번 갖고 싶다고 생각하니 다른 건 알 게 뭐야 싶어졌어.”
“끄응…….”
키슬크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왕자에게 그래도 저쪽과 혼담이 먼저였다는 말을 고집하는 것은 의미도 없거니와 의도를 의심할 만큼 무례한 일이었다.
혼담이 약혼이나 혼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만다리스가 먼저였어도 약혼을 공표한 건 페란스였다. 하물며 이유가 눈이 멀어서라는데 거기에 대고 끝까지 양보하셔야 한다고 우기면 시종장이 갈릴 일이었다.
“그게, 섭정께서는……,”
“아, 그래서 말인데.”
물이 흥건해진 식탁을 앞에 두고 페란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섭정이 앞으로 나를 찾아오거든 당분간은 만날 수 없다고 해 둬. 싸우기 싫거든.”
키슬크는 한바탕 진땀을 흘렸다.
“전하. 이 미욱한 몸이 섭정 아만다리스 공의 걸음을 말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나이다.”
“말리는 그대를 강제로 넘어서서 나를 보려 한다면 그건 왕실 근위대가 나서야 할 일이지.”
“…….”
이제껏 아만다리스가 밤이고 낮이고 아무 때나 궁에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궁에 제 편이 많기도 했지만 결국 페란스의 묵인이 있었던 탓이었다.
페란스는 그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한 번의 거절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단 한 번, 발정기에 아만다리스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제 몸이 어떻게 되든 견뎌 낼 생각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페란스는 발목이 부러진 채 발정기를 치러야 했다. 그 다리로 자신이 아만다리스를 공작저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이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다.
“근위대를 좀 늘려 놔야겠군. 섭정은 그래 봬도 성깔이 꽤 있는 편이니까.”
아무 말 없이 목덜미만 벌겋게 달구고 있던 키슬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만다리스 공을 멀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전하.”
“딱히 그런 마음인 건 아니야.”
아직은 발톱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키슬크를 단속한 건 조만간 약혼 사실을 확인하고 제 앞에서 날뛸 아만다리스를 한 번은 피해 보자는 계산에서였다.
“그냥 신경이 쓰여서. 섭정이 제 셋째 아들을 유달리 아낀다는 얘기는 들어 뒀으니까. 그렇다고 내 사랑을 포기할 정도는 아니고. 당분간 서로 보면서 얼굴 붉힐 일을 만들지 말자는 정도야.”
“그런 말씀이시라면…… 저 역시 그렇게 듣겠습니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대답을 들었으니 됐다. 적어도 키슬크는 개새끼에게 그가 하지 않은 말까지 전하지는 않았다.
“그만 먹겠다. 상을 치워.”
“예, 전하.”
키슬크는 젖은 식탁을 내려다보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