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하……? 정말로 오신 겁니까?”
페란스가 호숫가에 도착한 것은 모든 참석자가 도착하고 나서도 삼십 분가량 지나서였다.
마르스티엘이 먼저 자리를 뜨고 난 뒤 혼자 뒤에 처진 페란스가 무엇을 했는지는 비밀이었다.
페란스는 그 삼십 분을 무덤에 들어가는 날까지 머릿속에서 지울 생각이었다.
페란스는 승마 장갑을 벗어 자신을 맞이하는 아만다리스가의 집사에게 넘겼다.
“섭정은?”
엉겁결에 장갑을 받아 든 집사가 페란스의 등 뒤에서 눈살을 한번 찌푸렸다.
“……예정에 없는 주기가 시작되어 현재 공작저를 비우셨습니다. 초대객들께는 양해를 구한다 이르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주기라. 손님을 불러 놓고 자리를 비울 땐 그만한 핑계가 없지. 뭐, 잘됐군. 주인 없는 집에서 놀다 가라니 마음은 편하겠어.”
“핑계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전하.”
사실이든 아니든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아만다리스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은 나쁠 게 없었다. 특히나 지금 하려는 짓을 고려한다면.
“이국의 손님은 어디 있나?”
“이국이라면…… 블루와렌의 마르스티엘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제 등 뒤에 있지만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만다리스가의 집사는 개새끼가 이 집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와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발정기를 맞은 페란스를 개새끼의 침실로 안내하는 것도 아만다리스가의 집사였다.
각인이 풀리면 아만다리스의 목을 치기 전에 집사의 손발을 먼저 자르는 게 페란스의 소원 중 하나였다.
“마르스티엘 님은 옌스 도련님과 동석 중이십니다.”
말하는 꼴을 보니 아만다리스는 마르스티엘을 벌써부터 제 사위처럼 대하는 모양이었다.
그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게 삼십 분간 페란스가 내린 결론이었다.
“안내해.”
“전하. 외람되오나 두 분께서는 지금,”
“안내해. ……아, 저기 보이는군. 내가 알아서 가겠다.”
페란스는 앞길을 막아서는 집사를 퍽 소리 나게 밀친 뒤 성큼성큼 걸어 마르스티엘이 개새끼의 셋째 아들과 사이좋게 누워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푸루에산 천막을 여기저기 펼쳐 놓은 호숫가는 이국적이면서도 음탕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 눈들이 있으니 대놓고 아랫도리를 까지는 못하겠지만 그 직전까지 은밀하게 몸을 달구는 짓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마침 마르스티엘은 천막 안이 아니라 그 밖에 펼쳐 놓은 양탄자에 있었다. 개새끼의 셋째 아들 옌스 포르본 아만다리스는 두 볼을 발갛게 달구고 마르스티엘의 머리칼을 만지작대는 중이었다. 자꾸만 다리를 꼼질대는 게 오늘밤이라도 이국의 알파를 제 침대로 끌어들일 준비가 된 듯 보였다.
……어림없지.
페란스는 이제야 아픔이 느껴지는 입술을 거칠게 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거래 파기라는 말을 먼저 읊고 사라졌을 때, 자신은 무얼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론은 하나였다.
가지고 싶은 건 가질 것이다.
위스타드의 대지에서 카벨리카의 피가 가질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이국의 알파는 그 명제를 혹독하게 배워야 할 것이다.
벌써 다정한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에게 다가간 페란스가 발끝으로 양탄자를 툭 걷어찼다.
“누가 대체……. ……페, 페란스 전하?”
등 뒤를 돌아본 열여섯 살짜리 오메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갈색 눈이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커다랬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태초부터 이 땅에 이어진 영명을 카벨리카에게. 아버님께 여쭐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내가 말했을 텐데.”
페란스는 어린 오메가가 하는 말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마르스티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페란스를 마주했다.
“……영명을 카벨리카에게. 페란스 전하를 뵙습니다.”
모르는 사이인 척 인사말이나 읊는 게 같잖았다.
이렇게 선을 긋겠다고.
그렇다면 나도 그어 주지.
“헤픈 알파는 싫다고.”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히익!”
페란스가 허리에 찬 장식용 검을 뽑아 들자 눈치 없이 중얼대던 아만다리스의 셋째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찌익!
페란스는 검 끝으로 양탄자를 긁었다.
값비싼 양탄자에 선이 그어졌다. 선이 가르고 있는 것은 마르스티엘과 아만다리스였다.
마침 비명은 딱 적절히 이어져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등 뒤로 홍수처럼 쏟아지는 눈짓들을 느끼며 페란스가 장식용 검으로 마르스티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
제 뜻에 따라 순순히 움직이는 몸짓에는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다.
마르스티엘은 어디 마음대로 해 보라는 식으로 페란스를 응시했다.
“다른 오메가와 동석하지 마라. 눈길을 주지 말고 웃음을 주지 마. 알아듣겠나?”
질투에 눈이 먼 애인이 할 법한 짓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 전부가 턱뼈가 빠지도록 입을 벌렸다.
페란스가 발현한 뒤로 이만한 스캔들은 처음이었다. 유일한 적통 계승권을 가진 오메가 왕자라면 누굴 만나든 왕국 전체가 들썩였겠지만, 그 누군가가 작위도 없는 이국의 상인이라면 스캔들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건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심지어 이국의 상인은 이런 말로 활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스캔들에 기름을 부어 버렸다.
“전하께서는 제게 어떤 약속도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저 또한 일방적인 관계는 원치 않는다고 답을 드렸습니다.”
“나 역시 말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게 아니라고.”
“…….”
맑고 시린 푸른 눈이 거울처럼 페란스의 모습을 비추었다.
아무도 죽일 수 없는 가짜 칼을 들고 설치는 꼴이 제 가짜 왕관처럼 우스꽝스러워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유쾌했다.
아만다리스의 셋째 아들과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뒤틀리던 위가 지금은 멀쩡했다.
사실은 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짓을. 이렇게 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생각이 바뀌었다. 이 자리에 개새끼가 있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개새끼가 당황해 허둥대는 꼴을 직접 볼 수 있었다면 몇 배는 더 즐거웠을 것이다.
챙그랑!
페란스가 검을 떨어트렸다. 옌스 포르본이 움찔거렸다.
마르스티엘이 앉아 있는 양탄자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은 페란스는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토끼풀 두 개를 얽어 만든 풀반지였다.
“손을 줘.”
“…….”
마르스티엘이 왼손을 내밀었다.
페란스가 씩 웃으며 그의 왼손 약지에 잘 맞지 않는 풀반지를 억지로 밀어 넣었다.
안 어울려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도 썩 괜찮아 보였다. 손이 너무 잘생겨서 그런 모양이었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의 손끝을 쥐고 반지 아래에 살짝 입을 맞췄다.
“정식으로 청혼하겠다. 나의 반려가 되어 다오.”
“히익!”
옌스 포르본이 또다시 숨넘어가는 비명 소리를 냈다. 여기저기서 뭐라고들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은 탄식이었고, 반은 불신이었다.
“답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을 채근했다.
마르스티엘은 손을 뻗어 페란스의 입가를 쓸었다. 입술 한쪽이 따끔했다. 방금 전 스스로 물어뜯었던 그 자리였다.
솟구치는 각인 반응을 씹어 삼키자 그가 눈 끝을 얇게 접어 웃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제 심장은 전하의 것입니다.”
판에 박힌 위스타드식 청혼 문구가 갑자기 귀에 들러붙었다. 마르스티엘의 심장이 제 심장을 대신해 들어앉을 것처럼 가슴 어딘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잊지 마라.”
페란스는 반쯤 충동적으로 마르스티엘의 머리를 끌어당겨 입술을 겹쳤다.
절반의 탄식과 절반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너는 내 것이라는 걸.”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주사위를 굴렸다.
그 주사위가 어디까지 굴러갈지는 신도 모를 터였다.
* * *
“괜한 짓이었습니다.”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맞아. 객기였…… 우욱!”
페란스는 위에 담긴 신물을 쏟아 냈다. 방금 전 했던 키스를 두고 하는 얘기였다.
마르스티엘이 눈치가 빠른 작자라는 사실은 몹시 유용했다. 입술을 떼자마자 창백해진 안색을 알아본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고 연인 간의 산책을 청했다.
그때는 진짜 웃음이 나왔다.
비밀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제 편이라는 건 썩 괜찮은 일이었다.
“……하아, 이제 됐어. 다 나온 모양이야.”
페란스가 됐다는 손짓을 보내자 마르스티엘이 등에서 손을 떼었다.
“쓰십시오.”
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의 손수건을 빌려 쓰는 게 벌써 두 번째였다.
“고마워.”
페란스는 손수건을 받아 입가를 닦았다. 더러워진 손수건을 마르스티엘이 도로 받아 갔다.
“의왼데. 손수건을 다 아끼고.”
페란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비꼬았다.
사실 일부러 한 짓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더러워진 손수건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 가는 모습을 다정함이라 착각할 것 같아서였다.
“이런 데서 버릴 수는 없습니다. 누가 발견하기라도 하면 곤란합니다.”
“아……. 그런가.”
역시나 다정함이 아니었다.
페란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방금 전 토한 자리를 피해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마르스티엘은 나란히 앉는 대신 제 등을 지키듯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왜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화창한 날씨였다.
바람은 선선했고 호숫가의 습기를 품은 풀내음은 청량했다.
구름 서너 개가 흘러가는 걸 지켜보던 마르스티엘이 불쑥 물었다.
“거래는 그대로 끝인 줄 알았습니다. 생각을 달리하신 이유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