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0)화 (10/122)

10.

초대를 거절했던 게 의외의 득이 되었다.

그 탓에 아만다리스는 페란스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페란스를 경계하는 성의 정도는 보였을 것이다.

야유회라고 해도 야외에서 하는 사교 모임과 다르지 않았다. 치렁치렁한 연회복 대신 승마복을 입는다는 점이 다르다면 달랐다.

저마다 마차로 공작가에 도착한 손님들은 말을 타고 공작가의 숲에 있는 호숫가로 이동했다. 머리가 굵어진 뒤부터는 참석할 일이 없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몇 번 아만다리스가의 야유회를 겪어 본 적이 있는 페란스는 길을 알고 있었다.

페란스가 타고 온 왕실 마차는 공작저에 들르는 게 아니라 곧장 숲 입구로 향했다. 거기서 말을 갈아탄 페란스는 미리 호숫가로 향하는 길목에 서 있었다.

아만다리스는 손님들보다 먼저 호숫가에 가서 점잔을 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페란스가 할 일은 방해 없이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가로채는 것이었다.

“……저건가.”

페란스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점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다 같은 점이었지만 그중 한 점만 유독 튀었다. 키가 커서 그럴 테지만 왠지 그 하나만 그림체가 다른 것 같았다. 더 선명하고 더 극적이었다. 더 자극적이고 더 현란했다.

“페란스 전하……? 이런, 전하가 맞는지요?”

빠르게 달릴 필요가 전혀 없는 길이었지만 야유회에 초대받은 귀족들이 말을 타는 속도는 꽤 빠른 편이었다. 이런 데서도 경쟁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성격들이 그야말로 귀족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 한쪽 옆에 서 있는 페란스를 못 보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페란스의 금발은 너무 눈에 띄었다.

“오늘은 못 오신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습니까?”

선두에 선 누군가가 페란스를 발견하자 말을 멈췄다. 뒤에 오는 자들도 그를 따라 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나를 빼고 공들만 재미있게 놀 생각을 하니 배가 좀 아프던걸.”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전하의 빈자리는 야유회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제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오늘 야유회를 주관하는 아만다리스 공께서도 같은 마음이셨을 겁니다.”

“오늘을 함께 하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전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입에 발린 소리들을 페란스는 대충 반대쪽 귀로 흘려 넘겼다.

어차피 이자들은 전부 개새끼의 꼬리를 붙들고 있었다. 개새끼가 사라지는 날 같이 손목을 날려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페란스는 익숙한 가짜 웃음을 띠며 자연스럽게 무리에 합류했다.

“아만다리스 공이 참석자 자리를 너무 빡빡하게 만들어 놓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만일 그렇다면 제 자리를 쓰십시오. 저는 전하의 등을 지키며 서 있겠습니다.”

“그것 참 충성스러운 말이로군. 그럼 출발하지. 나 때문에 길이 지체되면 미안할 테니.”

페란스가 말 머리를 가볍게 두들겨 달리게 만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귀족들도 출발했다.

잠시 선두에 있던 페란스는 기회를 봐서 조금씩 속도를 늦추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눈치가 빨랐다.

원래도 후미에 있던 그는 페란스가 다가올 때까지 맨 뒷자리를 유지했다.

“인내심이 너무 없는 거 아냐?”

“……섭정의 초대는 그 전에 받아들였습니다.”

툭 던진 말에도 반응이 빨랐다.

아만다리스의 야유회에 끼어들어야 하는 지금 상황이 짜증나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대화하는 방식은 마음에 들었다.

“기다렸어야지. 내가 답을 주기로 한 날짜가 오늘이었다면.”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데다…….”

마르스티엘은 잠깐 뜸을 들였다.

“……외람되지만 블루와렌에서는 거래를 사흘씩 끄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사흘 뒤로 미루자고 한 그 순간 거래는 이미 한 번 어긋난 겁니다, 전하.”

“……하, 그래서? 그걸 지금 네가 내 성이 아닌 아만다리스의 야유회에 있는 이유랍시고 지껄이고 있나?”

“변명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거래가 어긋날 때마다 값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길 바랄 뿐입니다.”

……탁!

그 순간 페란스가 팔을 뻗어 마르스티엘의 말고삐 한쪽을 잡아챘다.

히잉!

말이 낮게 울었다. 마르스티엘은 재빨리 고삐를 당겨 말을 진정시킨 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려다보는 자세에 열이 받았다. 아니, 그가 무슨 자세로 있든 열이 받았을 것이다. 이곳이 아만다리스의 사유지인 이상.

“이러시면 누군가가 듣습니다, 전하.”

“그건 내가 걱정할 테니 넌 묻는 말에나 답해. 그때는 잘만 알겠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거짓말할 생각은 마라. 나를 대하는 네 태도가 달라져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럼 지금 전하를 끌어안고 키스하란 말씀입니까?”

“그……,”

순간 저 잘난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어졌다.

“그딴 말장난으로 넘어갈 생각은 마라. 나는 네게 거래를 하자고 했다. 너는 응했고. 이제 와 값을 올리려는 수작이라면 그래, 좋아. 한 번은 귀엽게 봐주지. 그러나 거래 자체를 무를 생각이라면 용납할 수 없다.”

“그럼 전하가 생각한 값을 말씀해 주십시오.”

마르스티엘은 곧장 본론을 끌고 들어왔다.

“……여기서?”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처음일 뿐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제 운명을 바꿀 중대사를 해치운다는 게.

그것도 개새끼의 소굴 한복판에서.

“네가 위스타드에서 바라는 것. 그게 내 값이다.”

페란스는 사흘 내내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던 답을 내놓았다.

“작위든 토지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원하는 걸 말해 봐. 내가 대관식을 치르고 난 이후 들어줄 수 있는 것을 불러도 좋다.”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는 말 같군요. 전하나 아니면 아만다리스 공 둘 중의 하나를.”

아닐 수가 없었다.

지금 위스타드의 권력은 칼로 자른 것처럼 둘로 갈라져 있었다. 개중 페란스의 몫이 훨씬 더 작은 것도 사실이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둘로 나눠진 권력의 양을 계산했을 것이다.

“너와의 거래를 무사히 마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 답은 뜬구름 같은 변명으로 들렸다.

“오래 기다려야겠군요.”

“……약속하지. 네 생각보다 빠를 것이다.”

“적게 잡아도 십 년은 걸릴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페란스는 한 호흡이 지나간 뒤 숨을 고르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각인 상대가 아만다리스라는 것을 모르는 마르스티엘의 입장에서는 각인을 푸는 게 왜 아만다리스의 실권과 곧장 연결되는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 비밀을 공유할 수 없었다.

마르스티엘이 완벽히 제게 판돈을 모두 걸었다는 확신이 있어야 했다.

“내 몸이 되돌아오면 나는 최대한 빨리 혼인할 생각이다. 왕권에 도움이 되는 가문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어. 아만다리스는 일 년 안에 실각할 것이다. 카벨리카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

그건 페란스가 지금 이 순간 제 모든 것을 걸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르스티엘이 블루와렌의 수호자라면 그 점을 알아야 했다.

“……제가 생각한 값과는 많이 다르군요.”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말은 거절과 비슷했다.

“뭐라고?”

기대가 깨어지는 감각이 너무 예리해 페란스는 표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너는 그럼…… 대체 무얼 기대하고 있었나.”

“위스타드에서 아만다리스 공작가의 청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을 줄 압니다. 아닙니까?”

그런 게 있는 줄은 몰랐다.

사흘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고민했어도 찾지 못했던 답이었다.

“그럼 말을 해. 그게 뭔지.”

페란스야말로 알고 싶었다. 그런 게 있는지. 있기나 한지.

“카벨리카의 청혼입니다.”

“……뭐?”

누군가 지금 제 표정을 그려서 보여 주면 재미있을 거라는, 웃기지도 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네가…… 위스타드의 공동 통치자가 되겠다는…… 그런 뜻인가?”

당황한 나머지 혀가 꼬였다. 폭소가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큰 욕심은 아직 없습니다. 왕의 배우자로서 왕실의 일원이 된다면 만족하겠습니다.”

“아만다리스의 셋째 사위를 왕실의 일원과 비교할 수는 없을 텐데?”

그렇게 턱도 없는 바가지라는 뜻이었다.

공작가의 아들이라고 해도 셋째라면 첫째와 몸값의 단위가 달랐다. 게다가 이제 고작 열여섯이었다. 그가 가문에서 제 몫을 해내려면 적어도 오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씀드렸듯이, 거래가 어긋나면 값이 오릅니다. 그건 섭정께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마터면 말을 탔다는 것도 잊고 마르스티엘의 멱살을 쥘 뻔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국의 노예 출신 상인을 내 배우자로 삼으라고? 나는 왕실을 되찾겠다는 것이지 아예 뜯어먹기 좋도록 양념을 발라서 던져 준다는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 입으로 태도를 바꾼 적이 없다던 마르스티엘은 지금 태도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거래는 불가하겠군요. 즐거운 흥정이었습니다. 폭풍의 가호를.”

블루와렌식의 인사를 남긴 마르스티엘은 그대로 속도를 높여 가 버렸다.

“…….”

페란스는 이유도 없이 뺨을 후려 맞은 얼얼한 환통 속에 혼자 남았다.

장사를 하러 온 줄 알았던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위험천만한 야심가였고, 자신은 아직도 순진해 빠진 망상가였다.

자신을 각인이라는 무덤에서 끄집어 낼 기적이 아직도 지상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어리석은 기대를 품었다.

그런 건 없는데도.

페란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살갗이 아니라 제 어리석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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