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페란스는 숨을 참았다. 저 페로몬 앞에서는 무엇도 소용이 없었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너는 내 것이니까. 다른 알파에게는 오메가도 뭣도 아니지. 그런 꼴을 드러내 봤자 예쁘게 봐줄 알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보자…… 그럼 돈이나 쓰려고 했겠구나. 놈에게 뭔가를 사려고 했겠지. 놈이 각인을 푸는 방법을 안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
페란스는 일부러 대꾸하지 않았다.
아만다리스는 억제제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자신에게 발정기가 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발정기가 왔는데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있을 리 없다고 믿을 테니까.
좋군.
처음으로 페란스는 아만다리스를 상대로 그가 모르는 패 하나를 더 손에 쥐게 되었다.
아만다리스는 페란스의 묵언을 패배로 해석했다.
“이틀이나 곁에 붙어서 아양을 떨었는데도 놈이 입을 열지 않더냐? 가엾게도…… 그걸 사기라고 한다. 놈은 사기꾼이야. 각인을 풀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
탁!
페란스는 자꾸만 붙어 오는 아만다리스의 뺨을 손등으로 쳐 냈다.
“쓸데없이 들러붙지 마라. 불쾌하니까.”
“저런저런. 단단히 뿔이 났구나. 쉿, 괜찮아. 내가 달래 주마.”
아만다리스가 보란 듯 저를 애 취급 하는 것은 그가 변태라는 뜻이었다. 아닌 척하고 있어도 힘없는 어린애를 괴롭히는 더러운 취향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그가 저렇게 굴며 페로몬을 풀어 댈 때마다, 정말로 자신이 발현한 그 시절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어린애로 남아 있는 것 같아서.
페란스가 이를 질근 물었다.
“불쾌, 하다고…… 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아래가 젖어서 어쩔 줄 모르는 게 아니냐. 그럴 땐 내가 몸을 달래 줘야지.”
아만다리스가 귓가에 입술을 붙여 오며 다리 사이에 제 허벅지를 밀어 넣었다.
각인한 페로몬은 끔찍하게 달았다. 달고 부드러웠다. 몸을 푸딩처럼 녹여 왔다.
페로몬이 살갗을 적셔 오자 그간 몸이 메말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페로몬을 흘리는 자를 붙들고 전부 다 빨아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충동이 제 안에서 생겨난다는 게 역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우드득.
페란스는 책상 모서리에 가져다 댄 손목을 비틀었다. 뾰족한 모서리가 살갗을 찢을 때까지 힘을 주었다.
“건드리지…… 마. 여긴 서재…… 너와 내가 한 협상에 어긋,”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 페란스의 뺨을 길게 핥으며 아만다리스가 노골적으로 목덜미를 만져 댔다.
“그 협상 말인데, 신년을 맞이했으니 바꿔 줘야겠어.”
“개, 소리 말,”
“침실이 아니라 어디서든 내가 원할 때면 다리를 벌려라. 그래야 나도 계속 예뻐해 줄 마음이 들 것 같구나.”
“닥, 쳐. 절대……,”
“너는 내 것이야. 그 사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아.”
찌익!
아만다리스가 목을 두른 스카프를 뜯어냈다. 왕족의 옷이 이유도 없이 찢어질 리 없었다. 수습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했다. 누구도 자신에게 페란스 왕자의 옷을 찢은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페란스가 피 흐르는 손을 들어 스카프를 움켜잡았다.
“하지 마!”
“……?”
그러자 아만다리스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가 놀란 듯 보여 오히려 페란스가 놀랐다.
툭, 투둑.
손목을 타고 흐르는 피가 양탄자에 얼룩을 남겼다.
아만다리스와 있을 때 피를 본 게 처음도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왜 유난일까 싶었다.
“그 목은…….”
“목……?”
페란스가 찢긴 스카프 사이로 드러난 목을 매만졌다.
“…….”
아만다리스는 입을 다물고 페란스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짓이겨진 살이 피로 젖어 실제 상처보다 더 심각해 보이긴 했다.
“일단…… 치료라도 하는 게 좋겠다.”
“…….”
왜 저러는데.
내 피를 보는 게 처음도 아니면서.
“사람을 들여보내마.”
아만다리스가 휙 등을 돌려 사라졌다.
혼자 남은 페란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갑자기 자상한 삼촌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병상의 선왕을 향해 아만다리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맹세를 했던 순간이 있었다.
선왕은 그를 신뢰했고, 기꺼이 섭정에 봉했다. 서임장에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하던 모습이 아직 페란스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선왕이 이끄는 대로 페란스는 왕의 인장을 집어 아만다리스에게 건넸다.
그때 목구멍이 찢어지더라도 그걸 집어삼켰어야 했다.
문득 스쳐 가는 기억의 잔상에 페란스가 조소했다.
아만다리스가 선왕의 제일가는 충신이자 친우 노릇을 하던 시절은 진작 끝났다. 어쩌면 그때부터 가면이었을 것이다. 선왕에 대한 일말의 충성심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발현하는 그날 제 바지를 벗길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어느 순간 누군가가 서재로 들어섰다.
부르지 않았는데 불렀다고 우겨 대는 꼴이 똑같은 걸 보니 개새끼의 개 중 하나였다.
페란스는 등을 돌린 채 피에 젖은 소맷자락을 끌어 내리며 말했다.
“상처는 됐어. 피나 닦고 사라져라.”
“상처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너 같은 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 아만다리스 합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치료가 같잖아졌다.
쾅!
페란스는 의자 발판을 걷어찬 뒤 서재를 떠났다.
망가진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 * *
“미친…….”
혼자서 옷을 갈아입는 와중에야 페란스는 아만다리스가 갑자기 꼬리를 내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제 목에는 퍼렇다 못해 거무죽죽해진 자국이 올라와 있었다. 스카프를 전부 벗겨 보면 손자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얼핏 보면 목을 맨 흔적이라고 착각할 만했다.
“그래서 이를 드러내다 말았군. 물기 전에.”
아만다리스에게 새삼 양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만약 자신이 자살이라도 하면 일이 골치 아파지겠다 싶었을 것이다.
페란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뜻밖의 선물을 남겼다. 페란스는 이제껏 성질을 부리다 말고 꼬리를 내리는 아만다리스를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만큼 아만다리스를 다루는 법을 제대로 몰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상을 주고 싶을 정도인데.”
페란스는 목에 다시 스카프를 감으며 중얼댔다. 눈꼬리를 접어 가며 진심으로 웃는 얼굴은 눈이 부셨다.
목에 거뭇하게 남은 손자국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그 알파는 제게 행운이었다.
그러니 놓치지 말아야지.
페란스는 스카프 위로 손자국을 살짝 더듬었다. 손자국이 남게 된 과정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일부러 목을 조른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억제제를 먹이려고 했던 게 아닐까.
목을 쥐었으니 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손이 어떻게 생겼었지.
마르스티엘의 커다란 손이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생각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잠을 못 잔 얼굴이었는데…… 설마 이틀 내내 곁을 지킨 걸까.
페란스는 눈을 감고 그가 제 살갗에 남겼을 감촉을 상상했다. 어쩐지 입 안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를 사려면 대체 얼마를 지불해야 할까.
* * *
사흘은 생각보다 빨랐다.
마르스티엘의 몸값에 대한 계산을 마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페란스가 생각할 수 있던 것은 명예 작위와 영주권이 고작이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혹할 만한 대가는 아니었다. 결국 페란스가 줄 것은 약속이었다. 각인을 풀고, 배우자를 맞이하고, 마침내 왕관을 쓰게 되면 그가 치를 수 있는 금액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장기 투자를 각오해야 했다.
그게 과연 먹히려나.
페란스는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르스티엘의 값어치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대가였다.
변수가 하나 있다면 아만다리스였다.
그가 제 각인 상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어떤 결론을 내릴까.
어쩌면 아만다리스 공작가의 셋째 사위를 택할지 몰랐다. 각인이라면 지금 섭정의 치세가 왜 그토록 막강한지 설명해 줄 테니까. 페로몬이 종속된 이상 유일한 적통 계승자라는 건 그저 빛 좋은 개살구였다. 막연한 장기 투자에 비한다면 섭정의 셋째 사위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확고한 수익이었다.
“그러니까 개새끼와 내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테고…… 내 즉위가 섭정의 몰락이라는 계산을 하겠지.”
하지만 각인을 풀지 못하면 즉위도 의미가 없었다. 개새끼는 결코 제 손에 들어온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주사위를 굴려 봐도 장기 투자의 결과는 안개 속처럼 막막했다.
“금발 취향은 없나. 각인만 풀리면 정부 자리에 두는 건 어렵지 않은데.”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왕의 정부라는 얘기가 나쁘지 않겠지만 그게 마르스티엘이라면 다를 것이다.
좋다는 오메가들이야 줄을 섰겠지. 그만한 알파라면.
원하는 오메가는 전부 가질 수 있을 그가 제 정부 자리를 원하리라는 가정은 우스웠다.
오늘 밤이면 답을 줘야 했다. 그러나 자신은 아직도 답에서 한참은 먼 곳에 있었다.
“……차라리 직접 묻는 게 낫겠어.”
한동안 머리를 쥐어뜯던 페란스가 문득 손을 멈추고 중얼댔다.
자신이 가진 걸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상대가 필요한 걸 알아내는 방법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자도 사람인 이상 원하는 게 있겠지.”
결론을 내린 페란스는 책상 서랍을 열고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오늘 밤 입궁하라는 짧은 초대 문구를 적어 내린 그가 편지를 인장으로 봉한 뒤 키슬크를 불렀다.
“급한 일이다. 그대가 직접 전달했으면 해.”
“무슨 편진데 그러십니까?”
“초대장. 밤에 오라고 했으니 늦어도 여섯 시 안에는 전달이 되어야 해.”
키슬크가 공손하게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편지를 받을 자세를 취했다.
“누구에게 전하면 될는지요, 전하.”
“레시토 호텔로. 편지를 주고, 그 자리에서 답을 받아 와. 무슨 말인지 알겠나?”
“외람되오나 전하, 그러하면 당사자에게 직접 전하라는 말씀이옵니까? 그럼 호텔이 아니라 아만다리스 공작가로 가야겠군요.”
“뭐라고? 왜?”
“오늘 저녁에 아만다리스 공작가에서 야유회가 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진작 거절하셨습니다만. 신의 작은 귀로는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초대에 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답을 받아 오려면……, ……저, 전하?”
키슬크가 입놀림을 멈췄다.
이제 제 손바닥에 놓여야 할 편지가, 페란스의 손 안에서 구겨지고 있었다.
“전……하?”
“개자식.”
“네……? 저, 전…… 전하?”
갑자기 욕설을 내뱉는 페란스를 보며 키슬크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눈을 끔벅거렸다. 방금 들은 것을 머리가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오늘이라는 걸 알면서도.”
쾅!
페란스는 책상을 걷어차듯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옷을 준비해.”
“전하?”
“야유회에 가겠다.”
구겨진 편지를 던져 버린 페란스는 키슬크를 지나쳐 서재를 벗어났다.
뭐든 후려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개자식.
마르스티엘이 자신과 약속했던 사흘째 되는 날 아만다리스의 셋째 사위가 되길 택한 것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따귀를 갈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