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전하. 어찌하여 별궁에 계시지 않으셨는지요.”
키슬크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이렇게만 물었다.
“그렇게 됐어.”
개새끼의 개를 상대해 줄 생각이 없었던 페란스는 빠르게 걸음을 놀려 제 방으로 향했다. 왕실 근위대는 어렵지 않게 페란스의 걸음을 따라왔지만 키슬크는 얘기가 달랐다.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 페란스를 따라오는 키슬크의 얼굴이 더 벌게졌다. 굽이 높은 구두 밑창에서 딱딱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레시토 호텔의 마차를 타고 오셨다 들었습니다. 혹시 호텔에서 주무셨는지요. 그렇다면 제가 호텔에……,”
“하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전하. 저는 전하와 왕실의 안녕을 돌보는 몸입니다. 무려 이틀씩이나 궁을 비우셨는데 제가 전하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면 그게 어찌,”
“무사히 돌아왔잖아. 그럼 됐지.”
“처음 보는 옷을 입으셨습니다. 전하의 몸에 제가 모르는 옷이 닿다니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말만 들으면 키슬크가 제 젖먹이 유모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발정기가 와서 벗어던진 옷은 그 호텔 어딘가에 있었다. 거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옷을 벗긴 것도 마르스티엘이었나……. 왜 그건 기억이 안 나지.
지금 입은 옷은 위스타드식으로 지은 마르스티엘의 새 옷이었다. 기분 나쁘게 소매와 발목 부분이 좀 더 길었다. 어깨와 품도 더 넉넉했다.
“아, 옷 하니까 생각이 났는데.”
“네, 전하.”
그사이 침실에 도달했다. 근위대가 재빨리 양옆으로 열어 주는 문을 넘어선 페란스가 겉옷을 벗어 키슬크에게 건넸다.
“내 옷을 가져와. 갈아입어야겠어.”
“알겠나이다.”
“그리고 이 옷은 왕실 재단사에게 보내.”
“……네, 전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시종장에게 페란스가 말했다.
“이 치수대로 새 옷을 한 벌 주문해. 하사할 물건이니 신경 쓰라고도 해 주고. 내가 작년 탄신 연회에서 입었던 옷과 비슷하게 만들면 되겠군.”
“하사…… 하사, 하신다면 전하께서 지금 입고 오신 옷이……,”
키슬크는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에 차마 말끝을 맺지 못했다.
왕족이 이틀간 성을 비운 것으로도 모자라 호텔에서 잠을 잤고, 치수가 다른 타인의 옷을 입고 돌아왔다.
스캔들이었다.
이제 왕궁 안팎이 한동안 떠들썩할 것이다.
스물아홉이 되도록 미혼인 오메가 왕자의 사생활과 왕실의 품위 문제가 사람들의 입에 미친 속도로 오르내릴 것이다.
“전하. 그렇다면 부디 옷을 하사하심은 재고하시는 게 어떨,”
“외국에서 온 사람이니 위스타드의 복식에 불편한 점을 느낄지도 몰라. 잘 배려해서 만들라고 이르도록.”
“전하.”
자꾸 말이 가로막히자 키슬크가 도무지 안 되겠다는 듯 비장한 얼굴을 했다.
“부디 재고하십시오. 아량을 베풀고 싶어 하시는 전하의 관대함은 알겠사오나 의복을 선물하는 것은…… 그건 자칫 세속적인 이들의 삿된 눈에 다른 의도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옵니다.”
왕족이나 평민이나 상대에게 의복을 선물하는 것은 주로 연인 사이에 하는 일이었다.
“그대 말대로 오해하는 것들은 삿된 것들이지. 나더러 그런 인간들 비위까지 일일이 맞추고 살라는 말은 아닐 테고. 옷을 빌려줬으니 사례는 해야 하잖아.”
키슬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외람되오나 전하, 게다가 외국에서 온 이라면 섭정 아만다리스 공작가와 혼담이 오갈지도 모른다는 그자뿐이지 않습니까. 섭정께서도 과히 기뻐하진 않으실 겁니다.”
“결국 그 말이로군.”
페란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개새끼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겠지.
그런데 어쩌나. 내가 하려는 게 바로 그거야.
“섭정이 왕실의 유일한 적통자인 나를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하는 파렴치한으로 만들 게 아니라면 삿되게 입을 놀리진 않겠지. 시키는 대로 해.”
“전하.”
“아니면,”
페란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대가 나를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싶나?”
“어찌 감히……! ……아닙니다, 전하.”
벌게졌던 얼굴이 이번에는 새파래졌다.
개새끼의 개치고 키슬크는 선을 지키는 편이었다. 적어도 제 눈치를 보는 척은 했다. 그게 키슬크를 아직도 같은 자리에 붙여 두고 있는 이유였다.
“가서 할 일을 하도록.”
“……예, 전하.”
키슬크는 유달리 허리를 깊이 숙인 다음 뒷걸음질로 침실을 나섰다.
이어서 페란스가 옷을 갈아입은 뒤, 마르스티엘의 옷이 왕실 재단사에게 보내졌다.
새 옷의 주인이 누군지 소문이 나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 * *
당연한 말이었지만 개새끼가 달려왔다.
쾅!
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근위대가 열어 주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 손으로 밀어낸 모양이었다.
페란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얼마나 지랄을 할지 궁금하군그래.
“전하!”
서재로 들어선 아만다리스가 울컥 목소리를 높였다.
페란스는 책상에서 고개를 돌려 아만다리스를 마주했다.
“요란한 등장이로군. 배앓이라도 하는 중인가? 그럼 나중에 오도록. 화장실부터 가.”
서재 밖에는 근위대가, 안에는 왕실 비서관이 둘이나 있었다.
근위대야 지랄하는 아만다리스에게 익숙해졌을지 몰라도 왕실 비서관들은 아니었다. 페란스의 지시로 왕실 예산 항목을 검토하던 비서관들이 놀라 눈을 둥글게 뜨고 섭정을 쳐다보았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하.”
“배앓이가 아니라?”
아만다리스는 애써 이 가는 소리를 삼켰다.
“다들 나가. 전하와 단둘이 나눌 말이다.”
비서관들이 두말없이 엉덩이를 떼었다. 페란스는 손짓으로 그들을 말렸다.
“그냥 있어. 내가 알기로 그런 일은 없는데. 용무가 뭔가, 공?”
“긴한 일이라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하.”
“내가 비서관들을 불러 지시한 일은 급하지 않고? 그렇다면 차라리 공과 내가 나가지. 너희들은 일을 마저 하도록.”
“전하,”
아만다리스가 페란스의 팔을 홱 움켜잡았다. 이럴 줄 알고 비서관들은 오메가들로 불러다 놓았다. 아만다리스가 페로몬을 풀면 비서관들이 눈치를 챌 것이다. 아만다리스가 아무리 개새끼여도 그 상황에서 계속 페로몬을 쓸 수는 없었다.
페란스가 아만다리스의 손을 뿌리쳤다.
“어디 감히 허락도 없이 손을 올리는가, 공.”
아만다리스가 제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페란스의 팔을 붙들며 입을 열었다.
“나가라.”
“…….”
순간 정적이 흘렀다. 비서관들이 눈을 벌리며 엉거주춤 서로 눈치를 보았다.
“안 들리나! 당장 나가!”
비서관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란스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들은 누구의 명을 따르고 있나. 도로 앉아!”
그러자 아만다리스가 문밖을 향해 외쳤다.
“들어와서 이것들을 끌어내!”
철컥!
문을 지키고 있던 근위대가 들어섰다. 안에서 들리는 소란을 고작 문 하나 뒤에서 몰랐을 리 없었다. 그들은 페란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왕실 비서관들을 에워쌌다.
“…….”
“…….”
왕실 비서관들은 더는 저항 없이 근위대를 따라나섰다.
그들 또한 페란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묻지도 않았다.
왕실 안의 권력 구도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알아보기 쉬웠다. 미혼의 오메가 왕자는 왕실의 보기 좋은 껍데기일 뿐이었다. 실권을 가진 건 섭정 아만다리스 공작이었고, 그는 왕자가 어릴 때 빼앗아 온 권력을 얌전히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지금 왕자의 편에 서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탁, 쿵!
서재 안에는 아만다리스가 원하는 대로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페란스는 입술을 짓씹었다.
“몸이 달긴 달았군. 이젠 눈치도 안 보는 걸 보니.”
“무슨 짓을 했느냐.”
아만다리스가 페란스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짜증나게도 개새끼는 힘이 셌다. 단숨에 끌려가 몸이 가까워졌다.
“정신 좀 차려. 여기가 침실인 것 같나, 공?”
“닥치고 대답해. 왜 호텔 같은 데서 묵은 게야. 무슨 짓을 하려고!”
“아, 이 난리가 그래서였군.”
페란스는 피식 웃었다.
웃음은 여유를 지어내기 위한 가짜였다. 아만다리스는 둘만 남게 되자 거리낌 없이 페로몬을 풀어 대고 있었다. 감정의 동요에 따라 흘러나오는 페로몬이라 각인 반응은 느렸지만 충분히 불편했다. 본능적으로 각인된 알파의 감정에 반응해 자꾸만 감정적인 보상을 해야 할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페란스는 멍이 든 손목을 책상 모서리에 대고 누르며 이 말도 안 되는 충동을 참았다.
이제는 그럴 수 있었다.
발정기는 더 이상 위협거리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 알파가 제 곁에 있는 한.
“내가 호텔에서 이틀 밤을 보낸 게 문제가 되나?”
“그 호텔에 놈이 있었다는 게 문제겠지! 설마 그새 배라도 맞춘 게냐?”
“공은 정말이지 시집을 읽는 게 좋겠어. 그런 싸구려 표현은 대체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아만다리스가 고개를 바싹 들이대며 표정을 바꾸었다.
각인의 함정이었다.
아만다리스는 각인한 오메가가 절대 다른 알파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인 반응이 극심할 경우 심장이 멎는 일도 있었다.
페란스는 제 것이었다. 발현 직후부터 그렇게 길들여 왔다. 몸만이 아니라 저 깜찍하고 짜증나는 머릿속까지 제 인생에 다른 알파가 없다는 사실을 각인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각인한 오메가를 안으려 드는 알파도 없었다. 손가락만 대도 구역질을 하기 시작할 텐데 그 꼴을 보면 아랫도리를 세우고 있기도 힘들었다.
“네가 그럴 리 없어. 그렇지 않느냐, 페란스?”
알파의 페로몬이 성질을 바꾸었다. 더 짙고 무거워진 페로몬이 질척하게 살갗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