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6)화 (6/122)

6.

욕정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각인으로 인한 페로몬 종속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마르스티엘이 제 페로몬을 맡는다고 한들 그게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처럼 달고 유혹적으로 느껴질 일은 없었다. 타 알파에게 종속된 페로몬은 원래의 향을 잃고 비리고 쓰게 느껴진다고 했다. 다른 알파의 향이 자신에게 그저 역한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그럼 뭐지. 대체.

먼저 키스를 할 때는 차갑기만 하던 시선이 이제 와서 동요하는 이유는 뭘까.

각인을 푸는 법을 안다는 건 각인을 한 자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럼 나와 같은 고통에 익숙하다는 말일까.

그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불쌍해 보인다면 돕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일 테니.

“……빌어, 먹을.”

아니, 다행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동정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지금 서로의 입장이 어떻든 간에 노예 출신으로 무법지대에서 살아남은 자가 카벨리카의 피를 동정할 수는 없었다.

그사이 마르스티엘은 진땀을 흘리는 그를 향해 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잠시만 참으십시오. 지금 억제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곧 나아지실 겁니다.”

마르스티엘이 가슴팍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려 들었다.

페란스가 기를 쓰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 사겠다.”

손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마르스티엘의 멱살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네가 내게 팔기로 약속했던 것. 지금 사겠어. 값을 불러.”

동정은 받을 수 없었다.

차라리 돈을 주고 몸을 사는 게 나았다. 저 알파의 몸이라면 아무리 비싼 값을 부른들 돈이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무얼 원하나?”

“…….”

탁.

마르스티엘은 대답에 앞서 땀을 닦던 젖은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때 보여 드렸던 상품은 거절하신 거라고 받아들였습니다만.”

그게 과연 거절이었을까.

입으로만 부렸던 허세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마르스티엘이 멍청한 작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마음도 달라졌다.”

“그렇군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페란스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마에 고였던 식은땀이 가랑비처럼 흩날렸다.

“제기랄……. 제대로 답을 해. 얼마냐고 묻잖아.”

“그건 가격이 달라졌습니다, 전하.”

마르스티엘이 땀으로 젖은 머리를 매만져 주며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흥정을 거는 주제에 손길은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다정했다.

“거래가 한 번 어긋난 상품은 같은 가격일 수 없습니다.”

거래가 어긋난 이후로 아쉬운 걸 넘어 절박해진 쪽은 페란스였다. 이제 주도권은 마르스티엘이 쥐고 있었고 페란스는 그가 물건을 팔아 주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얼마냐고!”

“혼인.”

“……뭐?”

그 말에 얼마나 놀랐는지 몸을 잠식하던 고통을 일순 잊을 정도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

“아만다리스 공작가에서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전하께 그 상품을 팔기 위해선 공작가의 혼담을 거절해야 하니 그 손해를 만회할 만큼의 값을 치러 주셔야 합니다.”

“이 개……,”

참지 못하고 욕설이 튀어 나갔다.

마르스티엘은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아만다리스와 자신을. 공작가와 카벨리카의 왕실을.

그게 장사꾼의 본성이라고 해도, 뒤돌아서서 저울질을 하는 것과 제 앞에서 당당히 저울 눈금을 들이대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지금 네가 나를, 윽!”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의 뺨을 후려칠 것처럼 묶여 있는 팔을 버둥거렸다.

마르스티엘은 당황하는 대신 내려놓았던 수건을 들어 올렸다. 페란스가 지금은 아무 짓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계산한 듯한 태도였다.

“어차피 지금은 거래가 불가능합니다. 발정기에는 소용이 없는 방법이라. 시간을 드릴 테니 그만한 값어치를 지닌 게 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제가 원하는 가격입니다.”

“…….”

페란스는 입을 멈추었다.

어쩌면 머릿속이 멈춘 것인지도 몰랐다.

아만다리스 공작가의 혼담을 거절해도 손해 보지 않을 만큼의 가격. 그게 과연 얼마일까.

지금 위스타드에 그런 게 있기나 한가.

섭정의 이름으로 아만다리스는 모든 걸 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카벨리카의 서명이 필요한 일이라도 간단했다. 제 손에 펜을 쥐어 주고 페로몬을 풀면 어떻게 저항하든 결국 서명을 해 주게 되어 있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위스타드에서 본격적으로 상단을 굴릴 작정이라면 아만다리스 공작가와의 혼인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반석일지도 몰랐다.

그걸 걷어차고 이쪽과 거래를 해야 하는 이유. 그만한 것을 내어달라는 소리는 어쩌면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거절일지도 몰랐다.

“그, 런 건…… 아흑!”

페란스가 돌연 거센 신음을 내뱉었다.

온몸의 신경줄을 가닥가닥 잡아당기는 것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다.

“흐윽! 누, 누가 좀! 아악!”

페란스가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마르스티엘이 손수건을 길게 말아 페란스의 입에 대고 묶었다.

“으읍! 읍!”

“혀를 씹지 않으려면 이편이 낫습니다.”

마르스티엘은 그새 다시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주며 말했다.

“구토가 나올 것 같으면 신호를 주십시오. 그때 풀어 드리겠습니다.”

“흐읍! 흐……,”

배 속이 요동을 쳤다.

몸이 뜨거워지는 동시에 머릿속이 갈증으로 타들어 갔다.

온몸의 세포가 각인한 알파를 찾았다. 동시에 알파를 찾는 자신을 저주했다.

* * *

“쿨럭쿨럭…… 큭!”

몇 번째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이 억제제라고 부르는 괴상한 맛의 약을 받아먹다 토하는 중이었다.

삼키자마자 울컥 역류한 약이 마르스티엘의 셔츠를 적셨다. 페란스가 내뱉은 시큼하고 역겨운 오물을 마르스티엘이 고스란히 덮어썼다.

“한 모금이면 됩니다.”

지치지도 않는지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마르스티엘이 다시 약을 들이댔다.

페란스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몇 시간이나 반복된 발정기 고통으로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그만! 그만!”

퍽! 쨍그랑!

마구 흔드는 머리가 마르스티엘의 턱을 들이받았다. 억제제를 담았던 그릇이 날아가 깨지고, 마르스티엘은 입술이 찢겼다.

“나를 놔줘! 보내 줘, 제발!”

페란스가 발버둥을 쳤다. 손발을 단단히 묶은 끈 덕에 침대가 들썩였다.

“페로몬……! 페로몬이 있어야……! 나를…… 허억! 우욱!”

비명과 구토가 동시에 나왔다. 얼굴은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성기는 빨갛게 부풀었고 다리 사이는 애액으로 번들거렸다. 고통으로 이성을 잃은 지금도 발정기를 맞은 몸은 알파를 갈구하며 입구를 벌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허리가 스스로 움직여 침대 시트에 입구를 비벼 댔다.

“우욱! 우웩!”

“……한 모금이면 됩니다.”

피 흐르는 입술을 닦은 마르스티엘이 토사물과 애액이 뒤엉킨 페란스의 몸 위에 앉았다.

갑자기 제 가슴팍을 누르는 알파의 무게에 페란스가 눈을 크게 벌렸다. 그러다 곧 질식할 것 같은 소리를 냈다.

“흐, 흐읍! 저, 저리 가! 저리 가! 너는 아냐!”

“압니다. 그러나 놓아드릴 수 없습니다.”

마르스티엘이 페란스를 누르며 침실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억제제를 더 가져와! 수면제도!”

대답은 없었지만 잠시 후 누군가가 약병과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그림자처럼 발자국 소리가 없는 그는 침대 옆, 마르스티엘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가지고 온 것들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전하.”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흰 목에 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잠시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무…… 크윽!”

그 손이 그대로 목을 졸랐다. 페란스는 까드득 눈을 뒤집으며 입을 벌렸다.

마르스티엘은 벌어진 입으로 억제제를 흘려 넣었다.

“그르으…… 크헉!”

입 밖으로 삼키지 못한 억제제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마르스티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던 짓을 계속했다.

마침내 목에서 그르륵, 약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약그릇을 팽개치고 그 손으로 페란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삼키십시오. 구토가 나와도 함께 삼키세요.”

“그으…… 끄윽! 끅!”

“억제제가 듣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천천히 나아집니다. 그럼 수면제를 드리겠습니다.”

“끄억! 커억!”

“자고 일어나면 악몽은 끝나 있을 겁니다.”

“커어억! 끄윽!”

더 이상 저항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마르스티엘은 페란스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발정기 본능은 끔찍할 정도로 강렬했다. 페란스를 누르고 있는 마르스티엘의 건장한 몸에서도 땀이 흘러내렸다.

그르륵, 그륵…….

입이 막힌 페란스는 결국 억제제와 함께 올라오는 신물을 도로 삼켰다. 그게 역겨워 다시 구토가 일면, 마르스티엘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또 한 번 삼켜야 했다.

그러길 몇 번이고 반복하자 진이 빠지는 순간이 왔다.

억제제를 삼키고 한 시간쯤 되자 페란스가 발작 같은 저항을 멈추고 손발을 늘어트렸다.

마르스티엘이 얌전해진 입에 수면제 병을 물려 주었다.

꿀꺽꿀꺽…….

썩은 술처럼 끔찍한 맛이 나는 수면제를 페란스가 물처럼 마셨다. 갈증으로 갈라져 있던 목이 수면제를 달게 삼켰다.

“주무십시오.”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마법을 거는 주문 같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거칠게 헐떡이던 숨소리가 조금씩 차분해졌다.

마침내 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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