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5)화 (5/122)

5.

사흘이 지났다.

블루와렌의 수호자에게서는 상품이 마련됐다는 소식이 없었고 대신 그를 둘러싼 엉뚱한 소문만 무성했다.

아만다리스가와의 혼담, 노예 출신, 무법지대 블루와렌의 야만성…… 그중에서 가장 페란스를 열받게 한 것은 이국의 방문자가 곧 제 나라로 돌아가기 위한 출항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개새끼 같으니.”

더 참아야 하는데, 참지 못했다.

결국 페란스는 제 손으로 호텔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첫 방문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 혼자였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보아 온 시종들은 물론이고 근위대도 전부 개새끼가 먹여 주는 뒷돈을 받아먹고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왕족들 누구도 의지할 수 없었다. 이제껏 혼인하지 못한 오메가 왕자가 잘못되면 제 아들들을 그 자리에 밀어 넣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인간들뿐이었다.

콰르릉, 쿵!

후드득!

미친 듯이 비가 오는 밤이었다.

별궁에 딸린 사냥터에서 하룻밤 보내겠다는 언질을 남겼을 때만 해도 비 냄새는 없었다. 별궁에서 한참 시간을 죽인 뒤 몰래 빠져나와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비가 쏟아졌다.

온몸이 다 젖었다. 부츠 속 양말과 속옷까지 젖었을 것이다. 비에 젖은 망토가 관처럼 제 몸을 숨 쉴 틈 없이 에워쌌다.

……쿵, 쿵.

페란스는 주먹으로 불 꺼진 호텔의 현관문을 두들겼다.

“문 열어, 개새끼야…….”

쿵, 쿵.

“문…… 열라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미친 듯이 화가 나는 이유가.

제 시종들조차 믿지 않는 성격으로 이제 단 두 번 얼굴을 마주한 이국의 알파를 신뢰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 없었다.

대신 이제껏 힘겹게 주워 삼키고 살았던 회의와 절망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각인을 깨는 방법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구체적인 희망이 날아든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그게 마침 이제껏 있는 줄도 몰랐던 제 취향의 알파 형태였다는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고, 바로 그 알파가 희망을 약속했던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삼 일 내내 잠을 못 잔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때마침 비가 쏟아진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며칠 뒤 주기가 시작되는 게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희망이 사라진다면 또다시 각인 상대에게 굴욕적인 화친을 제안해야 했다. 아만다리스는 그를 애태우듯 일부러 느려 터지게 걸음할 것이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페로몬을 갈구하며 애원하는 꼴을 지켜봐야 할 테니까.

“열어……. 열어 줘…….”

쿵, ……쿵.

차라리 몰랐다면. 각인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몰랐다면.

그랬다면 다가오는 주기가 지금처럼 지옥으로 향하는 가시밭같이 느껴지진 않았을까. 수면제를 몇 번 털어 넣으면 잊을 만한 정도의 일이었을까.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저울질을 했던 걸까.

나는 새보다 빠르다는 상단의 정보력으로 위스타드의 오메가 왕자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며 실세는 개새끼 아만다리스라는 걸 알아챘을까. 그래서 그와 손을 잡은 걸까. 키스라도 한 번 하려면 온갖 더러운 꼴을 겪어야 하는 자신 대신 올해 열여섯이라는 솜털 같은 오메가와 혼인하는 편이 더 남는 장사라고 판단한 걸까.

“개새……,”

욕을 내뱉으려는데 입에서는 하얀 김이 한 움큼 먼저 흘렀다. 문을 두드리는 손이 무거웠다. 빗소리가 아무리 커도 주먹으로 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정도면 둘 중 하나였다.

벌써 떠났거나, 아니면 못 들은 척하거나.

불이 꺼진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건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었다.

……없던 일이 될 모양이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심장이 저 바닥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사흘 전에 그냥 샀어야 하나.

체면이나 자존심이라는 말 같은 건 모르는 사람처럼 애처롭게 굴었어야 했을까.

네가 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제발 나를 구해 달라고.

나는 네 눈에 키스하고 싶다고. 그 눈으로 나를 보면 내 가슴 어딘가가 홀로 움직이고 있다고.

“…….”

페란스는 대답이 없는 문에서 손을 뗐다. 한숨을 다시 입 안에 욱여넣고 시린 발목을 돌렸다.

개새끼. 내가 혼인을 허락해 주나 봐라.

섭정이 아무리 짖어 대도 왕실은 아만다리스 가문이 이국의 수호자와 혼인 맺는 일을 반대할 것이다. 그 어떤 핑계라도 만들어 훼방을 놓을 것이다.

그 대가로 이번 주기에 몸 어딘가가 찢겨 나간다 해도 감수할 작정이었다.

페란스는 말을 세워 둔 곳을 향해 걸었다.

이상하게 말이 계속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급한 마음에 손을 내밀려던 페란스는 빗물에 젖은 땅이 갑자기 물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정신이 드십니까?”

“……. 그런……, ……아?”

눈을 뜬 곳은 침대였다.

푹신하고 매끄러운 이불의 감촉이 피부를 간질였다. 아니, 간질이다 못해 긁어 댔다.

“여기가 어디야?”

페란스가 이불을 걷으려 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손목을 지그시 눌렀다.

“하지 마십시오.”

“……왜?”

마르스티엘이었다.

“옷을 벗겼습니다. 다 젖었기에.”

“아……,”

자신은 피부가 가렵고 따갑다는 것은 알았어도 그게 알몸이라는 자각은 하지 못했다.

감각의 둔화는 주기의 시작이었다.

“미친,”

페란스가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만다리스에게 가서 애걸을 하거나 말거나 결정하는 건 나중 문제였다. 일단 이곳을 떠나야 했다. 주기에 접어들었을 때 누군지도 잘 모르는 알파 곁에 있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를 거들어. 궁으로 돌아가야……,”

“각인 상대가 궁 안에 있습니까?”

마르스티엘은 여전히 그의 손목을 누른 채 물었다.

“시끄러워.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나는 네가 가졌다는 물건을 사려고 했을 뿐이다.”

“일방 각인이잖습니까.”

마르스티엘은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입을 열자 단내가 울컥 새어 나갔다.

주기가 무서운 속도로 시작되고 있었다.

“귀가 먹었나? 비켜.”

“상대가 누군지 제가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전하를 일방 각인 상태로 방치한 각인 상대에게 선한 의도가 있다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전하의 신분을 고려한다면 저 같은 이국인이 알지 못할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있겠지요.”

“네가 알지도 못할 얘기를 내가 듣고 있어야 하나? 다시 말하는데, 비켜. 이곳은 위스타드의 땅이다.”

단내가 심해졌다.

이 단내가 마르스티엘에게는 전혀 다른 악취로 느껴질 것이다. 페란스는 알몸을 들킨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마르스티엘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 시선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하신다면.”

“무슨,”

“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는 못하겠지만 통증은 덜 느낄 수 있도록.”

“그게……. ……잠깐, 그게……,”

입을 열 때마다 페로몬이 머릿속을 헝클여 댔다.

제 입에서 나는 단내가 심해질수록 맥이 뛰는 소리도 거칠어졌다. 이제 슬슬 피부가 달아오르고 열이 나기 시작할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뒷구멍으로 오메가 애액을 줄줄 흘려 대며 울부짖게 될 것이다.

“네가……. ……왜?”

선의가 아니었다.

선의일 리 없었다.

그는 이국의 장사꾼이었고, 아만다리스가와 혼담이 오가는 알파였으니까.

“무슨 이유로?”

착각일까.

“저도 아니까요.”

“뭐…… 뭘?”

“각인 상대가 없을 때 맞이하는 주기를.”

정중함을 잘도 덮어쓴 차갑고 무감한 푸른빛이 지금 이 순간 자신만큼이나 술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괴로운지 알고 있습니다. 돕고 싶습니다.”

마르스티엘이 제 손을 끌어당겼다. 주기를 맞이하는 몸은 헝겊 인형처럼 쉽게도 끌려갔다.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손목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돕게 해 주십시오, 전하.”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도 없었다. 페란스는 애써 억누르고 있던 페로몬을 그대로 쏟아 냈다.

페로몬이 쏟아지자 몸도 열리기 시작했다. 열은 오르고 다리 사이가 빠르게 젖어들어 갔다.

이제 알파도 눈치챘을 것이다. 제 눈이 발정기 열로 혼탁하게 흐려지고 있다는 걸.

“허락하겠다.”

나를 구해 줘.

내가 그 눈가에 키스하도록 해 줘.

페란스가 꽃잎처럼 붉어진 입술을 움직였다.

“내 고통을 덜어가 봐. 재주껏.”

* * *

사지가 묶였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그가 한 말대로 각인 상대가 부재한 발정기가 어떤지 이해하고 있었다.

팔을 묶지 않았다면 지금쯤 껍질이 다 까지도록 피부를 긁어 대고 있을 것이다. 다리를 묶지 않았다면 벌써 창문을 넘어 각인 상대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흐으, 흑,”

알몸으로 침대에 묶여 헉헉대는 그를 마르스티엘이 바라보았다.

발정기 열이 저를 미치게 만든 게 아니라면 알파의 눈은 지금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이쪽을 보는 시선은 파도처럼 넘실대며 흔들리는 중이었다.

어째서…….

페란스는 난데없는 갈증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저것은 혹시 주기가 온 오메가를 향한 욕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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