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4)화 (4/122)

4.

“기대보다 빠르군요.”

마르스티엘은 옷을 전부 갖춰 입고 있었다.

왠지 그것도 좀 짜증이 났다. 아직 새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이런 시간에 들이닥치면 헝클어진 머리 정도는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페란스는 마르스티엘이 권하는 대로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그런 것치곤 옷이 너무 멀끔한데. 기대를 하지 않은 게 맞나?”

“조찬 약속이 있습니다. 옷은 그걸 위해 입은 겁니다.”

……왠지 또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좀 가볍게, 왼쪽 귀 정도를.

“실례. 위스타드의 왕족과는 비교도 안 되게 바쁜 몸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 못 했군.”

“상단은 워낙 일이 많은 곳입니다, 전하.”

신기한 일이었다. 저렇게 정중한 말이 왜 이렇게 무례하게 들리는 걸까.

어쩌면 저 시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알파임을 감추지 않는 시선은 장사꾼의 습성이 더해져서인지 매 순간 탐욕적으로 보였다.

지금도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그 눈으로 제 무게를 재고 있을 것이다. 위스타드의 왕자는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얼마만큼의 투자를 통해 얼마만큼의 이득을 벌어 줄 수 있는지 하는 것들을.

“받고 싶은 가격을 말해 봐.”

그리고 왕족으로 태어난 페란스는 장사에는 재주가 없었다. 쥐고 있는 것은 제 핏줄과 왕관, 그로 인해 주어지는 권력이었다.

“입을 열기 전에 나는 흥정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 두고.”

“저 역시 흥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지금 전하께서 사시려는 물건은 흥정이 필요할 겁니다.”

페란스가 질리도록 근사한 알파의 콧등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바로 그게 싫다는 건데.”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지? 그래서 원하는 가격을 말하라는 거잖아.”

마르스티엘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

작긴 해도 미소였다. 작아서 숨은 의도까진 알아보기 힘들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상품은 가격 측정이 어렵습니다. 제가 얼마를 원하는지보다는 전하께서 얼마나 치르실 각오가 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게 빠를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데?”

저벅.

대답 대신 마르스티엘이 걸어왔다.

“이런 뜻입니다.”

한 박자 늦게 들려온 대답이 머리를 잠시 혼란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알파가 손을 뻗어 제 턱을 쥐는 것을 가만 놔둘 리가 없었을 테니까.

턱이 쥐이고, 눈이 터무니없이 가까워진다 싶어졌을 때 불쑥 입술이 겹쳤다.

“무슨……. ……욱!”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다른 알파와의 접촉을 몸이 거부했다. 노골적으로 풀었다고 해야 할 만큼 농도 짙은 페로몬이 코를 역하게 뚫었고, 익숙하지 않은 체온이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환통을 남겼다.

“저리 비켜! ……욱!”

페란스가 참지 못하고 울컥 신물을 게워 냈다.

그나마 시간이 일러 공복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신물이 아니라 걸쭉한 음식물 찌꺼기라도 나왔으면 제 체면은 더 처참하게 구겨졌을 것이다.

“…….”

페란스가 소파 아래로 고개를 숙인 채 손등으로 입술을 닦고 있자 마르스티엘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쓰십시오.”

“……빌어먹을.”

고상을 떨 여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의 손을 쳐 냈다.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껄일 기회를 한 번 주지. 무슨 짓을 한 건지 말해.”

키스를 했다.

제 입으로 말하기도 전에 각인을 한 상태라는 것을 눈치챘으니 거부 반응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상품을 조금 보여 드렸습니다.”

“뭐라고?”

“페로몬 조절이나 약물 같은 게 필요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방법은 이겁니다.”

“그게…… 그러니까……?”

“예.”

마르스티엘이 무릎을 굽혔다. 방금 전 불시에 키스를 할 때처럼 몸이 가까워졌다. 페란스가 흠칫 어깨를 떠는 동안 마르스티엘의 오른손이 그의 가슴을 눌렀다.

“지금 무슨,”

“섹스입니다.”

가슴을 누른 손이 옷 안쪽의 유두를 스쳐 지나갔다. 거부 반응으로 몸이 떨리는 동시에 머릿속이 뒤엉켰다.

섹스라는 직접적인 단어가 귀를 파고든 탓인지 지금 마르스티엘이 하는 동작은 전부 다 섹스를 위한 전희 같았다.

“그렇다고 지금……,”

하지만 마르스티엘이 한 짓은 전희가 아니라 손수건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제 손수건 대신, 페란스의 조끼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손수건을 꺼내 든 그가 매끄러운 비단 천으로 더러워진 입가를 닦아 주었다.

덜덜,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이 떨렸다.

이상 반응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신분도 없는 자가 멋대로 왕족의 몸에 손을 대는 무례를 지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전하의 몸은 각인이 풀릴 때까지 계속 거부 반응으로 인한 고통을 겪게 될 겁니다. 전하께서 어디까지 견디실 수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

입가를 다 닦았던지 마르스티엘이 몸을 일으켰다.

더러워진 손수건을 그가 정중히 접어 제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피치 못하게 전하의 손수건을 빌렸습니다.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뭐 하자는 건데.

전희와 다를 게 없던 그 노골적인 동작을 그저 손수건을 빌렸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페란스는 그새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돌려줄 필요 없어. 차라리 새 걸 사 와.”

“……뜻대로.”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어떤 손수건을 사 올지 궁금하긴 했다. 상단 전체의 돈을 상단주 개인 자산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블루와렌의 상단에서 굴리는 돈은 그 어떤 왕국의 조세보다 많다고 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 대륙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화폐는 블루와렌을 거쳐야만 제대로 유통된다는 말이 있었다.

심호흡을 했더니 다시 몸을 움직일 만했다.

페란스는 아직도 불씨가 타고 있는 것 같은 몸을 일으켰다. 멀어졌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페란스는 할 수 있는 한 가까이 고개를 들이댄 후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상품을 사겠다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물을 토해 낸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이번에는 페란스가 알파의 턱을 쥐었다. 반듯한 턱선은 짜증이 날 정도로 근사했다.

“상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이 되지? 품질은 어디까지 보증되고?”

코앞에서 보이는 입매가 느리게 움직였다.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그 또한 웃음이었다.

“원하시는 바가 있다면 맞춰 드리겠습니다.”

“자신은 있나?”

잘은 모르겠지만 페란스는 지금 자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훤칠한 작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마주 서니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위치가 되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 살이라는 미묘한 나이 차이처럼.

페란스는 방금 전부터 마르는 것 같은 입술을 혀로 적셨다.

“네가 제공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최상품으로.”

“마음을 정하신 겁니까?”

제 얼굴을 향해 좁혀진 시선이 피부를 핥는 것 같았다.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페란스는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문제를 마주했다. 아무래도 저 무례하기 짝이 없는 푸른 눈이 제 취향인 모양이었다.

“……아직. 상품을 보고 결정하겠어.”

“오늘 보여 드린 것으로는 부족합니까?”

“그게 최상품이라고 한다면 실망이야. 기대치에 턱없이 모자라.”

“……. 유감이로군요.”

마르스티엘이 스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손에 쥐었던 단단한 감촉도, 피부에 들러붙을 것 같은 체온도 함께 사라졌다.

“다른 상품을 준비할 때까지 시간을 좀 주십시오.”

“너무 길게는 끌지 말도록. 나는 인내에도 흥미가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겠다.”

페란스가 휙 몸을 돌렸다.

“아침의 평화가 함께하길.”

등 뒤에서 위스타드식의 고상한 인사가 들려왔지만 페란스는 듣지 않은 척 그대로 문을 열었다. 문고리를 돌리는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해 문을 닫을 때까지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페란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 떨림도 거부 반응인 걸까.

“…….”

그것까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건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어떤 상품을 준비해 올지 미치도록 궁금하다는 것뿐이었다.

* * *

“전하. 아침에 자리를 비우신다는 말을 저는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만…….”

궁으로 돌아갔더니 시종장이 안색을 까맣게 흐린 채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러 새벽을 틈타 몰래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보람이라고는 없었다. 굉장히 짧았다고 생각했던 새벽의 방문은 사실 그 반대였다. 자신은 블루와렌의 수호자와 한 시간도 넘게 한방 안에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몇 마디 나눈 게 다였는데 시간이 그렇게나 흘러갔다는 게.

어쨌거나 시종장이 알았다는 것은 개새끼도 곧 알게 된다는 뜻이었다.

“잠이 안 와서 잠깐 산책을 했어. 그게 다야.”

“네……? 산책이라면 궁 안에도 훌륭한 장소가 여럿 있는데 어찌하여……,”

“그래야 공이 당황할 거잖아.”

“네, 전하……?”

“그 얼굴이 재미없다고는 말 못 하지.”

페란스는 시종장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시종장은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 아만다리스 공께서 오늘 아침 방문을 오후로 늦추겠다고 기별을 해 왔습니다.”

페란스를 놓친 시종장이 뒤에서 부지런히 따라오며 말을 붙였다.

“잘됐네. 아침 먹을 때 체할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 그런데 왜?”

좀 수상하긴 했다.

근위대 중 누구라도 벌써 입을 나불댔을 텐데. 득달같이 달려와서 무슨 짓을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어도 모자랄 판에.

“조찬 약속이 있다 하였습니다.”

“조찬 약속……?”

불쑥 안 좋은 예감이 드는 건 정확히 같은 단어를 사용했던 블루와렌의 수호자 때문이었다.

“누구와?”

“섭정으로서 이국의 손님을 맞이하신다 하였습니다.”

페란스가 아는 한 시종장은 개새끼의 꼬리털 같은 작자였다. 궁 안에서 그가 보고 들은 모든 일은 개새끼의 귀와 눈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몹시 영광이라는 것처럼 어깨를 반듯하게 펴며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혼담이 오가는 모임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아만다리스가의 셋째 아들이 오메가니까요.”

“…….”

페란스의 조각상 같은 얼굴이 저도 모르게 일그러졌다.

개같네,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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