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3)화 (3/122)

3.

시종장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전하께서 섭정을 멀리하실수록 정식 대관식 날짜 또한 멀어질 것입니다. 부디 제 아둔한 충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나마 한 조각 남아 있던 입맛도 사라져 버렸다.

캉!

페란스는 비어 버린 물잔을 음식이 놓인 접시 위에 엎었다.

“가지고 나가.”

“전하…….”

시종장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뒤 식사 자리를 정리했다.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 테니까 들어오지 마.”

몸에 난 자국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건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의 일부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에게 남은 자존심이 멀쩡한지는 의문이었다. 어젯밤 처음 보는 자가 산산이 부숴 버렸으니까.

“아, 그리고.”

습관처럼 소매 위로 손목의 멍을 눌러 대던 페란스가 불쑥 말을 덧붙였다.

“네, 전하?”

“블루와렌에서 온 자에 대해 좀 알아봐.”

“블루와렌이라면…… 어제 연회에 참석한 마르스티엘 경 말입니까?”

“그래, 그자.”

“외람되오나 어제 친분이라도 쌓으셨습니까?”

“친분……? 그걸 왜 묻는데?”

혹시라도 시종장이 무얼 봤을까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

시종장은 오히려 자신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이런 말을 전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전하께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연회 전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새로 보내온 것을 보면, 외교적인 관행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걸 왜 이제 말하는데?”

페란스가 울컥 목소리를 높이자 시종장이 눈을 둥글게 떴다.

“당장 가져와.”

“아니, 그게 아직 전하의 아침 일과가…… 송구합니다, 전하. 지금 대령하겠습니다.”

시종장이 허둥지둥 걸음을 물렸다.

잠시 후 금박을 멋들어지게 입힌 장미목 상자가 전해졌다.

* * *

치장은 빈틈이 없었다.

대규모의 공식 연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힘주어 꾸민 듯했다.

머리를 빗어 올릴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할지 열 번쯤 고민하던 페란스는 빗어 넘기는 쪽을 택했다. 그게 좀 더 경직되고 딱딱한 느낌을 줄 것이다.

빈틈이 없을수록 신분을 앞세우기에도 편리할 테고.

똑똑.

“전하.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알현실에 도착했습니다. 준비가 다 되셨습니까?”

……아니.

하지만 아무리 빈틈없이 외양을 치장한다 해도 마음은 영영 준비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시건방진 알파를 다시 마주할 준비는.

“그래.”

페란스는 숨을 들이쉬었다. 느린 호흡을 따라 천천히 얼굴 위에 표정의 잔해들이 사라졌다.

심호흡을 마쳤을 때 거울 속 제 모습은 원하는 만큼 차가운 무표정이 되어 있었다.

“문을 열겠습니다, 전하.”

끼이익.

침실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페란스가 몸을 돌려 열린 문으로 걸어 나갔다.

* * *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위스타드의 왕실 예법에 능통했다.

정석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왼손을 끄트머리만 쥐어 손등에 스치듯 가볍게 입술을 댔다.

트집 잡을 게 없었다.

……빌어먹을 인간.

페란스는 뱃속에서 올라오는 조소를 삼켰다.

제 자존심을 그렇게 찢어발기고 가 버린 주제에 알파의 껍데기는 숨 막히게 근사했다.

“과연 진심인지 모르겠군. 일어나. 착석을 허락하지.”

마르스티엘이 몸을 일으켜 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알현실의 비단 의자란 화려하긴 해도 고문도구 못지않게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왕족에게 눈치 없이 들러붙는 인간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귀족들의 퉁실한 엉덩이에 꽉 끼도록 설계된 작고 네모난 의자도 마르스티엘의 자세를 흐트러트리진 못했다. 빌어먹을 알파는 빌어먹게도 완벽했다.

“진심입니다, 전하.”

“그런 인간이 이따위 물건을 선물이라고 보낼 리는 없을 것 같은데.”

페란스가 발끝으로 테이블 다리를 툭 건드렸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위에 놓인 장미목 상자도 달칵 흔들렸다.

“그 눈에는 내가 왕관을 쓴 시체처럼 보이나 보군. 보통 이런 모욕을 저지르고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못할 텐데.”

마르스티엘이 보내온 선물은 하시시였다.

어젯밤 제 꼴이 아무리 우스웠어도 말이 안 되는 선물이었다.

저 푸른 눈에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아무 알파와 몸을 섞고 아편을 빨아 대는 인간으로 보이는 것일까.

“전하께서 알고 계시는 하시시와는 다를 겁니다.”

마르스티엘은 침착했다. 선물을 보낼 때부터 이 정도의 반응은 예상했을 것이다.

“블루와렌의 특산품입니다. 페로몬 반응을 둔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각인 상대와 함께하지 못하는 이상형질이 발정기 고통을 덜 때 주로 사용합니다.”

“…….”

애써 만든 무표정에 금이 갔다.

저 입 밖으로 나온 모든 단어가 충격적이었다.

페로몬 반응. 각인 상대. 발정기. 고통.

손이 떨릴 것 같아 페란스는 손목을 꾹 움켜쥐었다. 멍이 든 곳을 누르자 통증이 번졌고, 그래서 가까스로 동요를 감출 수 있었다.

“웃기는군. 중독은 어쩌고? 그래 봤자 아편인데.”

“선택의 문제입니다. 중독과 통증. 둘 중에 견디기 더 나은 쪽을.”

“채찍과 회초리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말로 들리는데.”

“그만큼 절박한 자들도 있습니다, 전하.”

“…….”

그 말은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는 네가 얼마나 절박한지 알고 있다고. 그러니 무릎을 꿇고 애원해 보라고.

그가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런 물건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자신은 진작 아편에 절어 지냈을 것이다. 발정기 때마다, 아니, 개새끼의 아랫도리가 동할 때마다 그 밑에 깔려 다리를 벌리는 일에 비하면 아편은 낙원일 것이다.

페란스가 제 손목을 쥐어짜듯 눌렀다.

그래서 문제였다.

마르스티엘의 선물은 결국 낙원을 가장한 독이었다.

제 혈관에 흐르는 건 카벨리카의 피였다. 그 피에 아편같이 더러운 것을 섞는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니 선물로 포장한 독을 가져온 인간의 저의 또한 의심해야 했다.

목적이 뭘까.

단순히 재미있자고 위스타드의 왕족을 모욕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탁!

페란스가 탁자를 걷어찼다.

탁자 위에 놓인 장미목 상자가 바닥으로 굴렀다.

“도로 가져가. 한 번만 무례를 눈감도록 하지. 애석하게도 블루와렌에서 배우는 예의는 위스타드와 많이 다른 모양이니.”

“무례로 비쳤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도움이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새 도움을 청했나? 위스타드의 예법이 너무 심심한 것 같으니 새로 하나 만들어 팔아 달라고 말이야.”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주우려던 마르스티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까?”

“새 예법은 괜찮아. 값이 너무 비싸군.”

“각인을 푸는 법보다는 비싸지 않습니다.”

“……!”

그 순간 참고 있던 동요가 얼굴 위로 튀어 나갔다.

표정을 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상자를 집은 마르스티엘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인사를 할 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낮춘 마르스티엘이 페란스의 손을 잡고 소매를 살짝 들어 올렸다. 옷자락이 감추고 있던 짙푸른 멍 자국이 동요처럼 드러났다.

“…….”

마르스티엘은 입을 살짝 벌려 소리 없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제 머릿속이 하지도 않은 아편으로 미친 탓인지 그건 무례가 아닌 연민으로 보였다.

발현과 동시에 각인을 하게 된 왕자가 왕이 없는 왕국에서 이제껏 무슨 일을 겪으며 살아왔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원하시면 저를 찾아오십시오. 그때 값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

신종 아편보다 각인을 푸는 법의 값이 훨씬 더 비싸다는 말은 옳았다.

그 값은 고작 무례나 중독이 아닌, 왕족의 자존심이었다.

* * *

“……제기랄.”

페란스는 마차의 내부를 가린 커튼을 쥐었다 펴며 저린 혀끝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페란스가 탄 마차가 서 있는 곳은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통째로 빌렸다는 호텔 건물 앞이었다. 그는 아직 마차에서 내려 저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제 생각과는 많이도 다른 인물이었다.

나이가 젊어 당연히 상단주의 아들일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노예 출신이었다.

이전 수호자에게 입양된 것도 아니었고, 여섯 매듭들의 추천으로 수호자가 되었다. 이전 수호자가 추방당할 때까지 자유 상업 도시 블루와렌에서는 매일같이 피 튀기는 권력 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살아남은 쪽은 마르스티엘이었다.

그런 과거를 딛고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된 자였다.

그런 자를 과연 그저 상단주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게다가 나이가……,”

거기까지 되짚은 페란스가 불쑥 미간을 찌푸렸다.

마르스티엘의 나이는 이제 고작 스물여섯이었다. 자신보다 세 살이나 연하였다.

“그게 말이 돼?”

이런저런 사기 같은 이력 중에서도 가장 믿지 못할 건 나이였다.

무려 세 살이나 어렸다. 그 얼굴로, 그 무게감으로.

두 번 마주하는 동안 괜히 한 대씩 얻어맞은 기분이었데, 나이까지 어렸다.

“……빌어먹을, 진짜.”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어떤 거래에서도 손해 보는 일이 없는 자였다. 왕족을 상대로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패가 월등히 낫다는 걸 드러내고 아쉬운 사람이 먼저 걸음하도록 판을 짰다.

똑똑.

“저어……. 도착했습니다, 전…….”

눈에 띄지 않게 일부러 위장용 마차를 타고 왔다. 자신이 블루와렌의 수호자를 찾아왔다는 것은 아무도 몰라야 했다. 특히나 개새끼가 알게 된다면 침대에서 길길이 날뛰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아만다리스라면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각인을 푸는 법을 알고 있다는 소문쯤은 진작 들어 두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젯밤 자신이 마르스티엘을 따로 만나고도 별일이 없었던 게 기적이었다.

“문 열어. 내리겠다.”

“예. 그럼.”

마찬가지로 옷을 바꿔 입은 왕실의 마부가 마차 문을 열었다.

마부만 덜렁 동행한 단출한 외출로 보였지만, 실은 왕실 근위대가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 절반은 사복을 입은 채 제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정문에 가서 내가 왔다고 알려.”

마차에서 내린 페란스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얼굴로 으리으리한 호텔 건물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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