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과호흡이 올 지경이었다.
페란스는 잔을 들어 경련이 일어난 것 같은 입매를 가렸다. 초록색 눈은 이 순간 해일이 일어난 바다처럼 보였다.
……마르스티엘이라고 했나.
페란스의 두 눈은 블루와렌의 새로운 수호자에게 들러붙은 채 떨어지질 않았다.
올해 신년 연회의 주인은 왕실의 주인이 아닌 이국의 여행객이었다. 어지간히 콧대 높은 귀족들도 어떻게든 옷자락을 살랑대며 마르스티엘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덕분에 페란스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그를 관찰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미남이군.
잔을 쥔 손가락이 가늘게 흔들렸다.
각인을 깨는 법을 안다는 알파가 얼마나 잘났는지는 어깨 각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슬쩍 돌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수많은 오메가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어떻게 말을 건다…….
페란스는 뒤늦게 시종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번쩍대는 보석이라도 주렁주렁 달았으면 저쪽에서 먼저 위스타드의 왕위 계승자를 알아보았을지도 몰랐다.
“그럼 실례.”
문득 그런 말 한마디가 들려왔다.
페란스는 그 낯설고 독특한 억양을 블루와렌의 수호자가 흘렸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미친. 목소리가 왜 저래.
연음이 많아 스르륵 굴러가는 것 같은 위스타드어가 색달랐다.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모든 자음을 절도 있게 끊어 발음하고 있었다.
그게 낮고 깊은 목소리와 더럽게도 잘 어울렸다. 이제껏 알던 위스타드 억양이 갑자기 경박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마르스티엘을 둘러싼 사람들이 마지못한 듯 길을 터 주었다.
그가 눈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어딘가로 향했다. 테라스로 가는 듯했다. 주변의 오메가들이 알파를 세워 두고 경쟁하듯 저마다 페로몬을 흘려 댄 모양이었다.
지금이야.
페란스가 더 생각할 것 없이 마르스티엘이 간 테라스로 향했다.
와인잔을 쥐지 않은 손은 목을 감은 스카프를 느슨하게 풀었다.
* * *
밤바람은 찼다.
위스타드의 봄은 느렸다. 신년 연회를 치르고 나서도 한 달은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따듯한 기후를 느낄 수 있었다.
검은 얼음 같은 밤을 배경으로 알파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거장이 그린 초상화 같았다. 누군가가 서 있는 자세만으로 감탄이 일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미리 선점한 분이 있었군요. 실례했습니다.”
오메가와 알파가 득실대는 왕실 연회에서, 테라스에서 잠시 쉬는 시간은 방해하지 않는다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추잡한 사고가 끝도 없이 벌어졌을 것이다.
“…….”
알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한 페일 블루의 눈동자가 제 모습을 느리게 훑었다.
정중하다면 정중했고, 무례하다면 무례했다.
오메가 왕자를 몰래 힐끔대는 눈들이야 어디서든 있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훑어보는 시선은 감히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게 불쾌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알파의 저 눈이, 숨이 불편할 만큼 자극적이라서.
게다가 지금은 무례를 따질 수도 없었다.
제 옷차림은 평범했고, 따로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으니 블루와렌의 수호자는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더 나으려나.
페란스는 잠시 신분을 감추기로 했다.
“괜찮다면 잠깐 공간을 나눠 써도 될까요? 피차 도망쳐 나온 처지를 가엾게 여겨서.”
페란스는 와인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사실은 제 표정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좋을 대로.”
대답은 느렸지만 마르스티엘은 그를 위해 난간 옆으로 약간 몸을 비켜 주었다.
“감사합니다.”
페란스는 필요할 때 짓는 옅은 웃음을 지어 내며 마르스티엘의 옆에 섰다.
“공기는 찬데, 그래서 폐가 맑아지는 기분이군요. 그쪽은 어떻습니까? 위스타드의 추위가 견딜 만합니까?”
“……제가 누군지 아는 모양입니다.”
“아, 억양이 다르니까. 그리고 그 외모는 이제껏 본 적이 없기도 했고.”
그럭저럭 대화를 잇고 있었지만 페란스는 호흡곤란을 느끼는 중이었다.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각인을 깨는 방법을.
개새끼가 제게 걸어 놓은 목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와인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잔이 깨지겠습니다.”
무심한지 다정한지, 무례한지 정중한지 모를 손길로 알파가 제 손에서 잔을 가져갔다.
잠깐 스치는 손의 온도가 따끔했다.
동시에 속이 울렁거렸다. 배 속을 난자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알파가 페로몬을 흘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페란스가 저도 모르게 휙 고개를 뒤로 젖히자 마르스티엘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향이 궁금해서. ……제 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게……,”
아니라 각인 때문이었다.
각인 이후로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고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온몸이 페로몬을 거부했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개새끼의 페로몬뿐이었다.
제 페로몬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각인은 다른 알파에게 제 페로몬을 페로몬이 아닌 괴상한 악취로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실례했습니다.”
마르스티엘은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잔을 테라스 난간 위에 올려 두고 돌아섰다.
“잠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페란스가 마르스티엘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마르스티엘의 한쪽 눈썹이 위로 휘었다.
“여기서는 좀 그래서.”
혀가 초조하게 입술을 적셨다.
“따로 만날래요?”
“…….”
얇은 살얼음 같은 시선이 제 얼굴 위로 쏟아졌다.
페란스는 그 어떤 알파에게서도 느낀 적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어쩌면 각인으로 인한 페로몬 거부 반응일 것이다. 혹은 상대가 간직한 비밀을 캐내야 한다는 압박감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알파는 제게 필요했다. 필요하기에 환심을 사고, 이런 싸구려 같은 말도 던져야 했다. 그가 원한다면 침실로도 부를 수 있었다. 제 입에 성기를 물려도 기꺼이 빨아 댈 것이다.
물론 각인 반응으로 성기를 물자마자 백번쯤 토하겠지만.
“그건 제가 마음에 든다는 뜻입니까?”
툭툭 끊어지는 단단한 억양이 제 뺨을 두들기는 듯했다.
실제로도 마르스티엘은 엄지를 들어 가볍게 뺨을 만지고 있었다.
은근하지만 노골적이었다.
어쨌거나 마르스티엘은 제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로 등신이었다.
페란스는 배 속에서 이는 통증을 애써 씹어 삼키며 제 뺨을 문지르는 마르스티엘의 손목을 잡았다.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페란스가 닿을 듯 말 듯, 손바닥 안쪽을 입술로 스쳤다.
“안 그런 사람이 없었을 텐데요.”
“……듣기 나쁘진 않군요.”
마르스티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칼 같은 동작으로 페란스의 손을 뿌리쳤다.
“…….”
갑자기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페란스가 쳐다보고 있자 마르스티엘이 손바닥을 가볍게 털었다.
“유감이지만 주인이 있는 몸은 건드리지 않는 주의라.”
마르스티엘은 손이 아닌 말로 제 뺨을 후려쳤다.
모욕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페란스를 앞에 두고, 마르스티엘은 걸음을 뒤로 물렸다.
“몸을 좀 더 아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전하. 각인한 몸으로 여러 알파를 상대하려면 고통이 상당할 테니.”
“그, 나는, 아니……,”
이국의 알파는 처음부터 자신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각인을 한 상태라는 것도 알아챘다. 이제껏 개새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한 일이었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이제껏 제 인생을 전부 써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무슨 재주로.
“…….”
손끝까지 전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혀가 굳은 듯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한 밤을.”
마르스티엘은 깍듯이 고개를 숙인 뒤 몸을 휙 돌렸다.
밤은 검은 얼음 같았다.
페란스는 얼음이 깨져 제 몸 위로 와르르 쏟아지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 조각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자신도.
* * *
“……개새끼.”
“저, 전하……?”
침실에서 아침을 먹는데 욕이 튀어나왔다.
시종장이 한 대 맞은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저를 쳐다보았다.
“제가 뭐…… 혹…… 잘못…… 들었습니까?”
제대로 들었다.
페란스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달칵 내려놓았다.
혀가 엉망이었다.
어젯밤 침실로 숨어든 개새끼가 신나게 물어뜯은 탓이었다. 스카프로 가린 목 안쪽에는 짙푸른 멍이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양 손목에도 쥐어짜 놓은 것 같은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거지같았다.
“치워. 입맛이 없다.”
“전하, 어인…… 일이십니까.”
시종장이 말을 하던 중간에 침을 꿀꺽 삼켰다.
시종장이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를 볼 때마다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밤늦게 찾아오는 개새끼에게 침실 문을 열어 주는 게 바로 그였으니까.
……빌어먹을.
아니, 아니었다.
잘못은 시종장이 아닌 자신에게 있었다.
어리석게도 각인을 유도하는 수작에 휘말려 간 자신에게. 순진하게도 아만다리스를 믿고 따랐던 유년 시절의 멍청함에.
“아만다리스 공께서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연회에서 뭔가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있는 것 같다 하시더군요. 혹 제가 알아 두어야 하는 일입니까?”
개새끼가 개소리를 짖고 갔다.
“그런 게 있다고 한들 아만다리스만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너무 자주 찾아오지 말란다고나 해 둬.”
“전하, 외람되지만 그건……,”
섭정이라 핑곗거리도 많았다. 국사라는 말만 갖다 붙이면 아만다리스는 왕족인 자신을 욕실까지도 쫓아올 수 있을 것이다.
정작 문을 닫은 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추잡하고 역겨운 정사가 전부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