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웨딩 (1)화 (1/122)

1.

신년 연회의 첫날이었다.

“전하. 마음에 드십니까?”

페란스는 연회복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응시했다.

푸른색 바탕에 금사로 백합을 수놓은 연회복은 질릴 정도로 화려했다.

“휘장은 붉은색이 좋겠습니다.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휘장은 됐어. 공작새도 아니고.”

흰 피부와 그린 듯한 이목구비도 화려하긴 마찬가지였다. 짙은 초록색 눈이 금실 같은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미모를 만들어 냈다.

페란스는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이를 드러냈다.

숨길 수 없는 경멸이었다.

오메가의, 너무도 오메가적인 껍데기를 향한.

“휘장이 없으면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올해 들어 첫 번째 연회입니다, 전하.”

시종장이 점잖게 재고를 권유했다.

“가장 큰 연회고, 가장 중요한 연회지요. 검소함이 미덕이 되는 곳은 아닐 줄로 압니다. 모자와 보석도 생략하셨으니 휘장은 하시지요.”

다들 기를 쓰고 제 몸을 치장하고 왔을 텐데 행여나 그 틈바구니에서 초라해 보이면 어쩌냐는 말이었다.

시종장다운 걱정에 페란스가 피식 웃었다.

“언제는 위스타드에서 내 얼굴을 따라올 인간이 없다며?”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더 공을 들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전하.”

말해 두지만 일부러 시종장을 괴롭힐 마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때깔 좋은 리본을 두를 마음도 없었다. 치장한 오메가를 잘 차려진 음식처럼 쳐다보는 알파들을 마주할 때마다 눈깔을 파내고 싶어질 테니까.

“그렇게 말하니 뭐라도 해야겠는데. 가서 휘장을 가져와, 그럼.”

“잘 생각하셨습니다, 전하.”

시종장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짓고 뒤로 걸음을 물렸다.

옆방으로 휘장과 보석을 챙기러 가는 시종장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던 페란스는 그대로 몸을 휙 돌려 방을 떠났다.

연회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 * *

페란스가 머리 손질도 마치지 않은 채 연회장으로 향했다는 말을 들은 시종장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장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페란스의 미색이 빛을 잃는 건 아니었다. 지루함을 달래고자 홀짝이기 시작한 와인이 입술을 물들이자 더할 나위 없는 치장이 되었다.

“전하. 오늘따라 더욱 빛이 나십니다.”

매부리코가 짜증나게 생긴 알파 하나가 어쭙잖은 아첨을 해 댔다. 벨토우 백작인가 그랬을 것이다.

내가 빛이 나는데 네가 뭘 어쩌려고, 등신아.

페란스가 와인을 삼키며 웅얼거렸다.

눈치가 발바닥에 붙은 인간인 벨토우 백작은 페란스의 침묵이 불쾌감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제 칭찬이 부족했던 모양이라고 여겨 횡설수설해 댔다.

“장식 하나 없는 모습이 더 고아해 보이십니다, 전하. 하긴, 그 미모라면 가리는 게 없을수록 더 좋겠지요. 시종장 키슬크 공의 안목이 참으로 뛰어난 모양입니다.”

“입 좀,”

다물어. 눈깔 파내기 전에.

페란스가 그 비슷한 말을 왕실 예법으로 포장해 내뱉기 직전이었다.

“전하.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누군가의 손이 등 뒤로 넘어와 어깨를 짚었다.

……빌어먹을.

페란스의 와인잔이 울컥 흔들렸다.

즉각적인 반응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페란스는 볼 안을 으적 씹으며 시작되는 감각들을 버텼다.

“…….”

“전하. 설마 제 목소리를 잊어버리신 겁니까.”

어깨를 짚은 손이 지그시 힘을 주었다.

두 다리가 저릿하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페란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볼이 너덜대도록 생살을 씹어 대는 것뿐이었다.

그런 게 각인이었으니까.

페로몬이 종속된 상태에서는 그 어떤 저항도 의미가 없었다. 저 개새끼는 페란스가 어깨를 짚은 손을 쳐 내자마자 기꺼이 페로몬을 흘려 댈 인간이었다.

그리고 축축해지는 속옷을 견디다 못해 페란스가 끙끙대는 걸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즐길 것이다.

“…….”

“전하. 답을 하셔야지요.”

개새끼, 그러니까 위스타드 왕국의 현 섭정 페어먼 아만다리스는 페란스가 말이 없는 이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역겨운 목소리가 쓸데없이 부드러워지는 이유였다.

그는 제 페로몬에 휘둘려 꼼짝 못 하는 페란스를 진심으로 즐겼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라는 듯이.

“공이 설마 나를 치매 환자로 모는 건 아닐 테고.”

입 안에 찝찌름한 피 맛이 번지고 나서야 페란스는 평이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앉도록. 등 뒤에 서 있지 말고. 그건 왕실 근위대에게만 허락된 일이니까.”

“오늘따라 유독 싱싱한 장미 같으시군요, 전하. 가시가 제법 날카롭습니다.”

개새끼. 각인만 아니었으면 진작 혀를 잡아 뽑는 건데.

페란스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만들어 내는 데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했는지는 신만 아실 것이다.

“그러는 공은 삼류 시인만도 못한 비유법을 쓰는데. 신년 선물로 시집을 하사해야겠어. 공의 화술에 도움이 되길 바라지.”

등을 돌아 앞으로 다가온 개새끼의 눈이 번들거렸다.

모욕을 당했다 여기고 있을 것이다. 정작 그가 저지르는 불경이 얼마나 모욕적인지는 머릿속에서 도려낸 채.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전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초부터 불화를 만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벨토우 백작.”

제삼자는 그만 꺼지라는 말을 아만다리스가 내뱉었다.

그러나 다행히 벨토우 백작은 눈치가 발바닥에도 안 달린 인간이었다.

“아, 저기! 보이십니까? 아무래도 저자가 소문의 마르스티엘인 모양입니다.”

개새끼가 아무리 양심을 제 몸에서 떼어 냈다 한들, 다른 알파 앞에서 페로몬을 뿌려 댈 수는 없었다. 벨토우 백작이 알파라는 게 이 순간 행운이 되었다.

“보이긴 뭐가 보인다는 건지.”

아만다리스가 이를 으득 물었고, 페란스는 그 틈을 타 재빨리 벨토우 백작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술도 권하지 않았군. 한 잔 받도록.”

벨토우의 목덜미가 벌게졌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지만, 페란스는 평소라면 역겨웠을 그것을 무시했다.

지금은 매부리코 알파에게 술이 아니라 미소라도 던져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마르스티엘이라고 했나? 그게 누군데?”

“아,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벨토우가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감이지만 그랬다. 제 눈과 귀는 진작부터 막혀 있었다.

페로몬이 종속된 그 저주받은 날을 기점으로, 자신은 왕족도 뭣도 아닌 그저 오메가일 뿐이었다.

“내 귀가 어두운 걸 이해하도록. 궁 안에서만 지내면 사람이 아둔해지는 것 같아.”

“전하. 아직 제 얘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개새끼가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짖어 댔다.

페란스는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어깨 너머로 성의 없는 손짓을 보냈다.

“시집에 관한 얘기라면 나중에 하지. 굳이 연회석에서 할 만큼 재미난 얘기는 아니잖아. 지금은 소문이 더 궁금하군.”

“전하. 거리의 소문 같은 시시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시다니요. 섭정으로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네가 그 개같은 페로몬으로 날 등신처럼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내가 거리의 소문 같은 것에 목말라 덤벼들 일도 없었겠지.

“거기까지. 공, 거기서 더 하면 무례라는 것을 모르겠나?”

페란스가 차갑게 내뱉었다.

벨토우 백작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둔한 작자가 보기에도 일국의 왕자와 섭정 사이에 오가는 심상찮은 공기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만다리스가 작게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예의란 상호 교류가 아닐까 합니다, 전하.”

……끝내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로군.

개새끼가 가진 가장 안 좋은 버릇이었다.

그는 페란스가 타인 앞에서도 순종적으로 굴길 바랐다. 그걸 알기에 나중에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항했다.

각인한 등신이긴 했지만 제 이름은 페란스 로사델 카벨리카였다. 카벨리카의 피를 잇는 자이자 위스타드의 왕관을 머리에 쓸 자였다.

남들 앞에서 카벨리카가 아닌 자에게 순종하느니 차라리 손발 하나가 잘리는 게 나았다.

“그래?”

차락!

페란스는 잔 속에 반쯤 남아 있던 와인을 아만다리스에게 뿌렸다.

“어, 엇……!”

벨토우 백작이 입을 벌린 채 굳었다.

아만다리스 또한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공에게 예의를 갖출 시간을 주지. 가서 옷이나 갈아입도록. 그럼 그 꼴로 내 신년 연회에 나타난 것을 용서해 줄 테니.”

“…….”

부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동 반사처럼 제 입 안에 쓴 맛이 고였다.

오늘은 편히 자긴 글렀군.

화가 난 개새끼가 제 몸을 밤새도록 물어뜯을 게 뻔했다.

“뭘 하고 있나. 빨리 가 보지 않고.”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아만다리스가 대가를 암시하며 걸음을 물렸다.

페란스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벨토우에게 돌아섰다.

밤은 밤이었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얘기를 마저 하도록. 저자가 누구라고?”

“예, 그, 그게…….”

떨떠름해하던 것도 잠시, 벨토우는 곧 페란스 왕자의 관심에 황송해하며 신이 나 입을 놀렸다.

“자유 무역 도시 블루와렌은 아시지요? 그곳의 새로운 수호자라 불리는 자입니다. 그렇다는 건 저 젊은 나이에 위스타드 왕국 한 해 예산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재산을 굴린다는 의미지요. 전하께서는 진작 알아보셨을 테지만, 아주 우수한 알파라고 하였습니다.”

“흠. 그래서 다들 주변에서 저 법석이라는 건가. 집안에 혼인 전 오메가가 남아 있는 집이라면 탐낼 만도 하겠네.”

페란스는 곧 흥미를 잃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큼 인파에 둘러싸인 인간의 소문이라면 뭔가 있을까 했더니, 그저 그런 가십거리였다.

조만간 그를 놓고 자살 소동이라도 벌이는 오메가라도 등장하면 사교계가 한동안 떠들썩하겠지만 그러고 말 일이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하지만 저자가 아슈하바트 해를 넘어 이곳 위스타드에서까지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국의 수호자는 그저 그런 시시한 가십거리가 아니었다.

벨토우는 비밀 얘기랍시고 말을 옮기는 떠버리들이 그렇듯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블루와렌의 새로운 수호자는 그걸 알고 있다고 하였사옵니다.”

“그것?”

“예, 전하.”

벨토우의 목소리가 한층 더 작아졌다.

“각인을 푸는 법 말입니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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