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천족의 모습이 어스에게 고민과 신비를 안겨주었다면 천족들 역시 인간인 그의 등장에 적잖이 놀라워했다.
차원 이동은 천족이나 마족이나 넘볼 수 없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낱 인간이 신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을 해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이방인 그것도 타 차원에서 온 이방인임에도 천족들은 향기 짙은 꽃을 향해 모여드는 벌과 나비처럼 어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너는 인간이야? 인간을 닮은 천족인 거니? 아님, 돌연변이 천족인 거니?”
“머리카락이 헤르고스의 밤하늘처럼 까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처음이야.”
“인간의 저 연한 녹색의 눈은 어떻고. 따뜻하고 포근한 게 심장이 녹아날 것 같아.”
새끼들 말 더럽게 많네.
자신을 둘러싸고 떠드는 천족들의 행동에 어스는 정신이 없었다.
“얘들아 그만 떠들어 어린 인간이 당황스러워하고 있잖아. 인간은 우리처럼 강하지 못해서 큰 소리에도 죽을 수 있어.”
나이 지긋한 여성 천족이 나서 조용히 타이르자 천족들은 당장이라도 그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 황급히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순수하던지 도저히 마족 사냥하듯 사냥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차원 이동은 망한 듯.
어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천족들은 자신들을 만류한 여성 천족을 재촉했다.
“미에르바, 미에르바 인간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나도 나도!”
“저 인간의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나 오줌까지 마려워. 인간 앞에서 실례하면 인간이 천족을 오줌싸개라고 생각할 텐데.”
자신들이 왜 조용해야 했는지 그사이 까먹은 듯 천족들이 다시 떠들자 미에르바가 낮게 한숨 쉬며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인간이 놀라서 죽는 걸 정말 보고 싶은 거니?”
“앗! 맞다. 인간은 약해서 잘 죽지. 나 입 다물게.”
“잘 죽는 인간이 너무 불쌍해.”
“인간은 100년도 못 산대.”
“헐? 우리 동네 하루살이도 200년은 사는데 그럼 인간은 하루살이보다 더 짧게 살다가는 거야?”
하루살이가 200년을 사는 세상이라니.
이건 좀 깬다.
아니, 마계도 천계와 비슷하단 점을 떠올린 어스는 확실시 중간계가 이들 세계보다 격이 떨어지는 세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에서 깨자마자 숨 한 번 쉬고 바로 죽는 거랑 다를 바 없네. 100년이라니.”
“인간은 알에서 태어나지 않아.”
“뭐? 지성첸데? 알에서 태어나지 않는다고?”
“그래. 인간은 소나 양 혹은 개처럼 새끼를 낳아. 그렇게 낳은 새끼를 젖을 먹여서 키운대.”
인간이 생소한 세계였지만 인간에 대한 자료는 제법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이 포유류라는 것도…하아.
“조용! 그만 떠들고 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드디어 인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야?”
“나 엄청 설레.”
천족이랑 말 섞어봐야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래도 천족에 대한 궁금증도 그 역시 있었기에 일단 대화는 나눠보기로 했다.
“인간 나는 미에르바라고 한다.”
“어스 실리시아.”
“오! 인간이 말했다!”
“인간 목소리 좋다.”
“나 방금 깜짝 놀랐어. 인간도 이름을 갖고 있다니.”
“바보야. 그럼 인간이라고 이름이 없겠어?”
“난 인간1, 인간2 이런 방식으로 부르는 줄 알았지.”
“마족이나 할법한 무식한 소리는 그만해. 인간도 지성체라고.”
고작 통성명을 했을 뿐인데 그 한마디에 붙은 살만 백 마디다.
이래서야 대화다운 대화는 딴 세상에서나 바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과묵한 사람은 참아도, 수다스러운 사람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던데 확실히 그 말이 맞는 듯했다.
중재자의 역할을 맡았던 미에르바도 천족들의 자유분방하고 순수한 수다력(?)에 질렸는지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장내가 진정됐다.
‘윽박질러야 말을 듣는 족속이구나.’
천족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 미안하다. 그런데 인간인 네가 어떻게 천계에 올 수 있는 거지?”
“무작위 차원 이동을 통해서 왔을 뿐이야. 특별한 건 없어. 그보다 천계는…”
어스는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무심코 팔을 휘둘렀다.
하필 그 팔에 천족이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하급 천족을 처치했습니다.
-경고!
-모든 천족들에게 원수로 간주 됩니다.
이건 사망한 천족의 잘못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굳이 따진다면 이건 사고일 뿐이다.
그런데 천족들은 이를 단순한 사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인간이 장난꾸러기 개리풀을 죽였어!”
“도, 동족을 죽이다니!”
“인간을 죽이자!”
천족들의 분위기가 대번에 바뀌었다.
분위기만 변한 건 아니다.
그들의 육신 역시 기존보다 3배나 커졌다.
그 큰 덩치에 걸맞게 무기도 컸다.
무기의 재료는 놀랍게도 원소였다.
불, 바람, 땅, 번개, 물, 얼음 따위로 만들어진.
“개리풀의 복수를!”
-주인님, 로엘이 주인님께 말 전하라고…
천계는 그냥 건너뛰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차비라도 벌어가자는 마음에 대응에 나섰다.
바로 그때 시쿠의 연락이 왔다.
‘대기하고 있어. 곧 연락할게.’
천족은 이 자리에 있는 녀석들이 전부가 아니다.
저들의 마을에서도 천족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마계였다면 합류는커녕 제 살길 찾아 달아나기 바빴을 텐데.
순진한 놈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던가? 천족들은 일신의 안위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당연히 그들의 공격은 무형 방벽을 뚫지 못했다.
모든 공격이 무형 방벽에 가로막혔다.
이에 천족들은 그가 예사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 신성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방어가 아닌 공격용으로 사용되는 신성력의 힘은 강력했다.
백색의 눈부신 파도가 어스를 뒤덮었다.
백색의 파도에 휩쓸린 순간 대기와 지면이 열탕처럼 끓어올랐다.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건 없었다.
신성력이 가진 파괴적인 힘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러나 그 백색의 파도가 사라진 순간 천족들이 느끼는 충격은 어스가 받은 충격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건 너희가 자초한 거야!”
천계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엘리멘탈 피니쉬먼트(+8)였다.
그 순간.
-하급 천족을 처치했습니다.
-중급 천족을 처치했습니다.
-상급 천족을…
-경고! 천계의 수호자인 천사들이 분노합니다.
마계의 마신, 천계의…천신인가? 아무튼 양쪽 세계 신들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힐 날도 머잖은 느낌이 들었다.
시스템의 경고와 동시에 허공에 균열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신전 벽화에서나 보았던 딱 그 모습 그대로의 천사들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족의 기동력도 대단하다고 감탄했는데 천계에 비하면 마족은 굼벵이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집력 역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계가 압도적이다.
* * *
천족을 상대로 싸워본 결과 마족보다 천족 쪽이 좀 더 강했다.
그래봐야 어스 앞에선 고만고만한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대죄를 멸한 자(+7)을 보유하기 이전이면 모를까 지금의 그에겐 마족이나 천족 그리고 천계의 수호자라 불리는 천사들 역시 어스에겐 위협 거리도 안 되는 살아있는 경험치에 불과했다.
천족과 천사들은 불나방처럼 어스란 이름의 모닥불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족이었다면 진작 포기했을 텐데 그들은 포기를 모르는 광신도처럼 몰려오고 또 몰려왔다.
누가 정신 병신 아니랄까 봐.
기분 같아선 마족 휩쓸 듯 휩쓸어버리고 싶은데 그놈의.
‘경고를 왜 이리 많이 날리는 건지. 마계 차별하나?’
솔직히 천계도 마계처럼 훌륭한 사냥터다.
하지만 마계에서처럼 행동하려니 경고 알람이 부담스러워 손쓰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더 살업을 쌓으면 영구 추방에서 그치지 않고 더한 수준의 상황이 일어날 것 같았다.
‘이것도 스트레스다.’
거기에 마법사와 교단의 마찰이 이젠 실리시아와 교단의 마찰로까지 비화될 조짐까지 보인다는 로엘의 보고까지 더해지자 그의 기분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번에 돌아가면 교단부터 정리해야겠어.’
집안(?) 단속부터 하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 로엘이 급히 말할 게 있다고 한다.
-하라고 해.
-시국이 점령당했다고 한다.
-시국?
-교황청이 있는 그 시국이라고 한다.
대륙의 실질적인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교단의 총본산이 바로 교황청이다.
그리고 그 교황청을 품고 있는 도시가 바로 시국이다.
어스 역시 일전 교황청에 갔다가 시국의 규모와 저력에 적잖이 놀랐다.
그런데 그런 시국이 점령당했다고 하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뤼빅스에서 시국을 점령할 수 있는 세력은 우리밖에 없을 텐데. 대체 누구지?’
순간 마족이 떠올랐지만 검은 탑이 사라진 이상 그들이 뤼빅스로 넘어올 통로는 없다.
전처럼 검은 돌을 통해 소수가 넘어올 수 있겠지만 검은 탑이 사라진 이후 검은 돌을 통해 넘어온 마족의 사례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뤼빅스 내부에서 범인을 찾을밖에.
‘급 궁금하게 만드네.’
-시국을 점령한 놈들의 정체는 뭐래?
-개인이라고 한다. 주인님.
어디서 자신 같은 놈이라도 떨어진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어찌 단신으로 시국을 점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놈 혹시 시스템이 경고했던 찬란했던 타락잔가?’
궁금했지만 당장은 뤼빅스로 갈 수 없으니 귀만 열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 * *
시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지진 현상이 사라지고 난 다음 날, 오랜만에 평화를 되찾은 시국 광장에 괴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괴인은 광장 곳곳에 세워진 성인과 성녀들의 동상을 부수고, 룬의 성물을 부수었다.
이에 놀란 시민들이 저지하려고 나섰으나 그들은 괴인의 손짓에 그 몸이 물방울 터지듯 터져버렸다.
광장을 중심으로 공포가 퍼져나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시국 경비단과 성기사들도 괴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괴인은 그들의 수급을 잘라 무형의 사슬로 구슬 꿰듯 꿰어 교황청으로 향했다.
무형의 사슬에 꿰인 수급은 분명 죽었음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다들 살아 있기라도 한 듯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귀곡성이었다.
듣는 이의 몰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끔찍한 소리 말이다.
괴인의 앞길을 막아서는 자들은 모두 괴인의 장신구(?)로 전락하여 그들처럼 울부짖는 신세로 전락했다.
혐오스럽고 불길한 그 소리가 시국 전체를 뒤덮었다.
-끄아아아아아-!
-까아아아아아-!
시국 중앙 광장에서 시작된 혈겁은 교황청까지 이어졌다.
교단 제일검 베로니카와 교황 근위대가 괴인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대륙 통합 사령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각 왕국에서 파견된 소드 마스터들 역시 이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그들 모두 변변한 저항 한번 못하고서 괴인의 장신구가 되어 울부짖는 수급이 되고 말았다.
그사이 수급의 줄은 한 줄, 두 줄…수십 줄로 늘어났다.
각 줄의 길이만 해도 자그마치 수백 미터에 이른다.
괴인이 허공을 향해 손을 털어내자 수급이 다닥다닥 붙어 만들어진 긴 줄은 흡사 살아 있는 뱀이 움직이듯 움직이며 산자를 찾아내 음산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룬을 부정하고 저주하라 그 길만이 너희가 살길이다. 너는 룬을 저주하느냐?
두려움에 긍정한 자들은 살아남아 시국을 떠날 수 있었다.
반면 끝까지 신앙심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은 수급이 분리되어 수급으로 이뤄진 사슬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산자를 찾아 움직였다.
그날, 단 하루 만에 시국의 수천 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이 사실을 접한 사람들은 처음엔 불신, 이후엔 경악감에 빠져 침묵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대륙 각지의 신전들이 들고 일어났다.
총본산이 그리되었으니 그들이 이를 좌시할 리 없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마족 침공? 이젠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시국으로 진군한다!”
“삿된 것을 멸하자!”
“성지를 다시 룬께 받치자!”
“룬께 영광을!”
힘이 있는 자는 무기를 들었고, 없는 자들은 주머니를 털었다.
그렇게 움직인 군세가 2백만 명에 달하였다.
그들만 움직인 건 아니다.
각 왕국의 왕실과 귀족들 역시 앞다투어 이에 가세하여 병력을 보태었다.
단 한 명을 상대하기 위해 대륙 전체가 뭉쳤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면 괴인의 힘을 목격했던 자들의 시선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이 보았던 괴인의 능력은 초월자 그 자체였으니까.
신을 부정하고 살아남은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생존자 중 일부는 그 사실이 드러나 봐야 본인에게 좋을 게 없음을 알면서도 끝내 양심의 목소리를 저버리지 못하고서 괴인의 상대는 오직 대현자뿐임을 성전 지도부에 알렸다.
그러나 그 말은 성전 지도부의 노여움을 받았고 그들은 이단이란 낙인이 찍혀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
양심을 따른 대가치곤 혹독한 대가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