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차원 이동 재사용시간이 되지 않았음에도 어스가 불쑥 나타나자 이를 본 로엘이 크게 놀라워했다.
“전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검은 탑이 사라졌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그런데 어찌 벌써 오실 수 있었습니까?”
간단해 마신 열 받게 하면 돼.
‘그러고 보니 시스템이 신과도 소통할 수 있는 걸 보면 시스템을 신과 동급의 존재로 봐야 하는 건가?’
하긴 그러니 자신과 같은 괴물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 마계행에선 얻은 것도 크고 잃은 것도 컸다.
얻은 건 무지막지한 칭호를 완성한 것이요, 잃은 건 아직은 더 빨아먹을 게 많이 남은 마계라는 멋진 사냥터를 잃은 것이다.
‘너무 날뛰면 추방당하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다음엔 신중해야겠어.’
특히, 뤼빅스에선 더더욱 조심하기로 했다.
마계에서 추방당하면 고향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반대로 뤼빅스에서 추방당하면 모든 걸 잃고 방랑자가 되어 떠돌아다녀야 하니 말이다.
“궁금해?”
“그러니 묻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왜 앉지 않고 계속 서 계시는 겁니까?”
“소파 부서질까 봐.”
로엘은 어스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했다.
아도니스에서 가장 단단한 흑목으로 소파의 뼈대를 만들었다.
이 흑목이 얼마나 단단하냐면 집채만 한 바위를 올려놓아도 조금의 변형이 생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소파가 부서질까 봐 앉지 못하겠다고 하니 당연히 로엘은 농담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농담도.”
“그래 그리 들릴 거야. 그런데 저 소파 로엘 어머니 유품이지?”
“예.”
“그래서 그런 거야. 만에 하나의 경우란 게 있으니까. 아직 확인한 건 아닌데 내 경우엔 만에 구천구백구십구의 확률일 것 같아서 당분간 몸 사리고 있어야 해.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별궁에서 생활할 테니까 별궁에 배치한 인원 싹 빼서 비워둬.”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고 자꾸 엉뚱한 말만 늘어놓는 어스의 태도가 그제야 이상했는지 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저주라도 걸리신 겁니까?”
“그건 아냐.”
“정말이십니까?”
“정말 아니니까 걱정 마.”
“그렇다면 다행인데 혹시 그게 아니라면 즉시 말씀해주십시오. 전하의 안위는 곧 실리시아 전체의 안위니까요.”
“알지, 잘 알고말고. 아무튼 검은 탑이 사라졌으니까 마족의 침입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문제는 이 사실이 알려지면 교단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할 수 있으니까 이 사실은 당분간 로엘만 알고 있어.”
누구의 명이라고 이를 거절할까.
어스가 말하지 않더라도 로엘은 이미 그리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 말씀해주시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로엘도 은근 질긴 구석이 있네. 좋아, 말해줄게. 마신이 마계에서 날 추방시켰어. 그래서 이렇게 일찍 올 수 있었던 거야.”
“끝내 말씀해주실 생각이 없으시군요. 섭섭하지만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진짠데 도통 믿을 생각을 하지 않는 로엘이었다.
하긴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자신이 로엘이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별궁 바로 비워줘.”
“시에라 시녀장에게 말해두겠습니다.”
“그래.”
마법 통신구를 통해 시에라 시녀장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는 로엘을 일별한 어스는 무심코 소파에 앉았다.
턱.
소파는 멀쩡했다.
뒤늦게 이를 인지한 어스는 곧 안심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런데 그 마음이 무색하게 등받이가 그의 상체를 지탱하지 못하고 부서지는 대형 참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어스도 로엘도 놀라 입만 뻐끔거렸다.
* * *
본궁에 있던 개인 짐을 모두 별궁으로 옮겼다.
가족들이 무슨 일이냐며 별궁까지 찾아왔다.
행크, 엘이나, 루시가 별궁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왕의 가족인 그들이 별궁에 올 일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별궁에 온 세 사람은 제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분명 왕궁 내 별궁에 온 것인데 건물은 외부만 멀쩡할 뿐 내부는 전쟁이라도 발발했는지 멀쩡한 가구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 건물 내부뿐이랴.
후원 역시 국지성 태풍이 강타했는지 모두 엉망이었다.
어스를 향한 신하들과 백성들의 충성심이 높다는 걸 알고 있는 세 사람이었지만 폐가라고밖에 볼 수 없는 곳에 아들 혼자, 그것도 시중하나 거느리지 않고 홀로 있는 걸 보자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사달이 난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게 아니라 내 몸이 갑자기 급격하게 좋아지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라고.”
몇 번을 거듭 말해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부모님과 루시의 반응에 답답해진 어스는 세 사람을 데리고 직접 정원으로 나왔다.
작은 짐 마차 크기의 정원석을 향해 걸어간 어스는 검지를 펼쳐 보였다.
“손가락으로 이 큰 돌을 밀면 밀릴까? 안 밀릴까?”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당연히 안 밀리지.”
“아들, 무슨 일인지 지금이라도 말해다오.”
“네 아빠 말처럼 우리에게 숨기지 말고 말해줘도 돼.”
참고로 입바람으로 바위를 굴리는 건 실패했다.
만약 그 일이 성공했다면 숨 쉬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한숨.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보는 게 낫다 싶었는지 어스는 검지로 정원석을 밀었다.
힘(6,552.7).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손끝으로 살짝 밀었을 뿐인데도 그 큰 정원석이 발이라도 달린 듯 쭉 미끄러진 것이다.
정원석의 이동 거리만 무려 20미터였다.
“아들, 마법이냐?”
“순수한 제힘이에요. 아버지.”
“마법사의 힘이라고?”
“제 육체가 내는 힘이라고요. 별궁에서 본 것들 모두 제가 방심한 순간에 건들어서 죄다 그렇게 된 거예요.”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마법이랑 육체적인 힘도 구분 못 할 것 같아?”
제 입으로 바보임을 인증하는 루시였다.
어스는 밀어버린 정원석을 이번엔 발끝의 힘만으로 위로 올렸다.
공깃돌 올라가듯 가볍게 솟구친 정원석에 가족 모두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떨어지는 정원석 아래에 어스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해!”
“위험해!”
“미쳤어!”
그 말의 여운이 끝나기 전 아래로 떨어지던 정원석은 어스의 손끝에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이를 보고도 여전히 믿지 않는 가족들을 보자 공깃돌…아니, 작은 짐마차 크기의 정원석을 위로 던졌다.
팔 힘만 사용하였음에도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큰 정원석이 구름을 꿰뚫었다.
“다들 봤지? 이거 가볍게 던진 거야. 이러니 내가 주변에 사람들을 둘 수 있겠어? 없겠어?”
어스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가족들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시녀장인 시에라와 근위 대장인 푸리엘이 장내에 들어오고 있었다.
루시는 쪼르르 달려가서 자신이 방금 본 것들에 대해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공주님.”
“저도 처음엔 무척 많이 놀랍답니다.”
시에라와 푸리엘마저 이리 나오니 이젠 믿지 않으려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야 믿는 눈치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본궁이 아닌 별궁에서 이러고 있는 거야. 내 힘에 적응하면 그땐 본궁으로 갈 테니까 괜한 상상력 발휘하지 말고 편하게 지내요.”
“아들.”
“응.”
“그런데 아까 던전 정원석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사람이 없는 곳에 떨어지면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민가에 떨어지면 큰일 아니냐?”
“깜빡했네. 잠깐만.”
순식간에 종적을 감춘 어스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탁탁.
그러곤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처리하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자신의 아들이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한 행크와 엘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거처로 돌아갔고, 루시는 찰거머리 붙듯 붙어선 비법전수를 부탁했다.
시원하게 깐 여동생의 마빡에 딱밤 한 대 시원하게 때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머리통이 물방울 터지듯 터질게 눈에 선하였기에 푸리엘을 시켜 루시를 데려가게 했다.
그제야 평화를 되찾은 어스는 또다시 재활치료(?)에 들어갔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X발, 어느 세월에 마음 편히 변기에 앉아보냐.’
* * *
뤼빅스엔 유례없는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마족이라는 더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인류가 모든 힘을 결집한 데서 이뤄진 평화였다.
하지만 당장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침공도 없고, 혹은 이렇다 할 조짐 역시 모두 사라지자 마족 침공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들의 불만이 컸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은 기득권층에겐 닿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을 드러내면 마족에게 세뇌당한 게 아니냐며 어딘가로 잡혀가기 일쑤였다.
먹고살기 힘들어 목소리를 높였더니 이야기를 들어주기보다 오히려 잡혀가는 사태가 줄을 잇자 이래선 굶어 죽기 십상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의 야반도주가 줄을 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스가 한창 활개 치고 다니던 당시 마계와 유사했다.
아무튼 야반도주 가정이 속출하자 그제야 일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대륙 통합 사령부는 당근책을 내놓았다.
그렇게 한고비 넘기나 싶었던 어느 날, 실리시아를 향한 마탑 이전이 속출하며 지역 경제 및 방어에 구멍이 뚫렸다.
이는 일반인의 야반도주와는 비중이 다르기에 대륙 통합 사령부는 마탑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대륙마법사 연합도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 마탑은 마족이 침공한다면 당연히 인류의 편에서 마족에 대항해서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진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사를 침해받길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계속 대륙 통합 사령부에서 우리의 뜻을 막아 세운다면 파멸을 각오하고 이에 맞서 싸울 것이다.”
이런 소릴 일반인이 했다면 뚝배기부터 깨졌을 테지만 상대가 마법사들이었기에 철퇴 대신 설득을 위한 당근만 잔뜩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마법사들이 고집을 부리자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대륙 통합 사령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류의 현재와 미래가 달린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를 상황에서 마법사들의 집단행동은 인류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대륙 통합 사령부가 다루기엔 각 마탑과 마법사들과 이런저런 관계로 얽혀 있는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확률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대륙 통합 사령부가 창설된 이후 독단적인 행동을 자제했던 교단이 대륙 통합 사령부를 대신하여 전면에 나서 마법사들을 향해 선전포고에 준하는 경고를 날렸다.
교단이 이처럼 대놓고 경고를 보내자 할 말 다하던 마법사들도 그제야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마법사이기 이전에 그들 역시 룬의 신도였기 때문이다.
설사 마법사 본인은 무늬만 신도일지 몰라도 마법사의 주변인들이 신도였으니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할 생각이 없다면 처신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사건이 잘 마무리된 건 아니다.
뜻을 굽히지 않고 실리시아로 넘어간 소형 마탑과 자유 마법사들이 속속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에 교단은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해버렸다.
그건 바로 마법사 한정 통행 제한을 걸어버린 것이다.
앞서 교단의 경고에 한발 물러섰던 마법사들은 이전과 달리 이번 통행 제한 조치 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의 권리와 자존심을 정면으로 훼손당했기 때문이다.
마법사 대 교단, 교단 대 마법사들의 감정의 골이 깊어질 무렵 어스는 차원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발, 마계! 마계 같은 곳으로 가게 해주세요!’
위그드라실의 인도는 2개의 차원 좌표를 저장할 수 있다.
마계 좌표가 추방과 함께 사라지면서 위그드라실의 인도에 저장된 좌표는 뤼빅스뿐이었다.
당연히 뤼빅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지울 수 없다.
이를 지우고 차원 이동했다간 뤼빅스로 돌아올 방법이 무작위 차원 이동을 통해 얻어걸리는, 그야말로 운에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간절한 바람을 담은 기도 후에 어스는 차원 이동을 시전했다.
그렇게 그가 별궁에서 모습을 감춘 직후, 로엘이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들었다.
“전하! 전하!”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 말인즉 한발 늦었다는 뜻이다.
‘할 수 없군. 시쿠 경을 통해 연락을 드리는 수밖에.’
그나마 시쿠를 통해 어스와 교신이 가능한 게 다행이다.
로엘은 서둘러 시쿠가 있는 국경으로 이동했다.
그 시간, 무작위 차원 이동에 성공한 어스는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할 말을 잃고 버벅거리고 있었다.
‘처, 천족?’
마계에 이어 이번엔 천계에 오게 되었다.
엘프만큼이나 기똥차게 아름다운 외모도 외모지만 성스러운 백색의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는 천족을 보자 도저히 마족 대하듯 대할 수 없었다.
마족들이 이런 그를 보았다면 필시 그의 차별적인 사고방식에 분개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