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검은 탑에 도착한 어스는 지체하지 않고 검은 탑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분명 검은 탑의 경계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전처럼 이동하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차원 이동이 발생하는 경계석이 없다면 모를까 버젓이 서 있었다.
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쪽으로 더 이동했다.
그렇게 다가가다 보니 어느덧 검은 탑과의 거리는 불과 두 걸음 남짓 남았다.
어스의 안색이 굳었다.
검은 탑의 힘이 다한 것이면 앞으로 열흘은 뤼빅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스는 검은 탑에 직접 손까지 댔다.
손을 대자마자 검은 탑은 먼지처럼 눈앞에서 흩어졌다.
끔뻑끔뻑.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예상하지 못한 일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시쿠에게 의념을 보냈다.
-시쿠.
-주인님!
-주변에 있는 병사에게 말해서 로엘을 불러. 지금 당장.
연락을 보내고 30분이 흐르자 시쿠와의 의념이 연결됐다.
-주인님, 로엘 왔다.
-지금부터 내 말 전해.
-알았다. 시쿠 귀 활짝 열었다.
-열흘 전 다수의 마족이 뤼빅스로…
어스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시쿠를 통해 로엘에게 전달했다.
대면하진 않았지만 로엘도 상당히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
-로엘이 언제 오냐고 묻는다. 주인님.
-검은 탑이 부서져서 열흘 후에 간다고 전해. 그전까지 경계와 정보 수집에 만전을 기하라고 전해줘.
시쿠와의 의념을 끊은 어스는 검은 탑이 서 있던 자리를 응시한 뒤 몸을 돌렸다.
어차피 귀환이 물 건너 간 이상 이곳에서 어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실리시아의 무사를 기원하는 게 전부다.
* * *
열흘 전 검은 탑을 통해 뤼빅스로 넘어간 3만 명의 마족들은 던전을 경유한 뒤 중간계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들은 예기치 못한 변수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 변수란 바로 제 영혼의 일부를 잘라 만든 마계의 예의 그 검은 탑의 주인이 이동 과정에 개입한 것이었다.
수천 년간 쌓인 원한에 매몰된 존재에게 있어 3만 마족의 등장은 자신의 오랜 숙원을 이뤄주기에 충분한 영양소(?)였다.
오랫동안 갈망했던 이 순간을 어찌 포기하랴.
존재는 움직였고 그 결과 뤼빅스는 평온할 수 있었다.
오직 어스만이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여 전전긍긍했을 뿐, 결과만 놓고 보면 뤼빅스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는 이상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인 평화였다.
3만 마족을 먹어치운 존재의 오랜 복수의 칼끝은 그를 나락에 빠트린 자들이 나고 자란 세계 그 자체였으니 피바람은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3만 마족의 영혼과 마기를 흡수하는 작업은 존재에게도 제법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법이 완성되었을 때 존재는 떼어낸 자신의 영혼을 불러들여 수습에 들어갔다.
어스가 검은 탑을 만졌을 때 바스러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놈이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쥐어서였다.
마계로 보낸 제 영혼의 파편을 손에 넣은 존재가 눈을 떴다.
그러자 쳐다보기도 힘든 눈부신 섬광이 화산과 같은 기세로 뿜어져 나와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곧 안광을 수습한 괴인은 진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기다려라, 날 농락하여 끔찍한 수렁에 빠트린 너희 모두를 갈가리 찢어 죽여주마.’
복수심에 물든 괴인은 최종 봉인을 뚫기 위해 힘을 쓰기 시작했다.
쾅쾅쾅쾅-!
* * *
룬 교단의 총본산인 교황청이 위치한 곳은 테아노 왕국 남부로 테아노 왕국은 도시 규모의 면적 하나를 교황청에 기부하여 교황청 자율에 맡겼다.
사람들은 이 도시를 시국이라 불렀다.
시국은 1년 내내 순례자로 넘쳐났다.
대륙 각지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로 인해 시국의 경제는 불황이 없었다.
한마디로 근심 걱정이 없는 도시다.
그런데 그러한 도시에 최근 크고 작은 지진이 끊이지 않게 발생하면서 순례자들은 물론 교황청 인사들도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며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또, 또! 지진인가?”
“던전에, 마족에 이젠 지진까지. 이러다 큰일이 생길 것 같아.”
“안 좋은 징조가 어디 그뿐인가? 저 북쪽 미답지엔 이단의 나라가 세워졌잖아. 지금 시국에 발생하고 있는 지진이 이단의 나라 세실리아를 징벌하지 않고 방관한 교단 지도부를 향한 룬님의 경고라는 소리도 파다해. 나 역시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 못 하겠더라고.”
“자넨 그런 헛소문을 믿어?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마족이 언제 침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현자가 왕으로 있는 나라와 맞섰다간 마족 좋은 일만 시킬 텐데 이를 무시하고 성전을 선포해버리면 마족이라도 쳐들어오면 그땐 무슨 수로 놈들을 막을 수 있겠어.”
“나라고 그걸 몰라서 그래? 불안하니까 그러지 불안하니까.”
순례자들은 발길을 돌리면 그만이지만 시국에 뿌리내리고 있는 시민들이나 상인들 입장에선 밤낮없이 찾아오는 지진은 신경쇠약을 유발시켰다.
그 때문인지 최근 들어 사람들 사이에 전에 없던 다툼이 빈번해졌다.
깊은 신앙심으로 무장해도 결국 인간 역시 동물처럼 환경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게 이번 사건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지진이 어째 더 심해진 것 같지 않아? 땅울림이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아.”
“기분 탓이겠지. 기분. 이럴 땐 기도가 최고야.”
시국 출신답게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신전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지진과 함께 하는 시국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메테오를 맞아도 끄떡없던 검은 탑이 눈앞에서 바스러지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 어스의 뇌리엔 당시의 장면이 늘 맴돌았다.
그러나 당장 그 원인을 조사할 수단도 없고 방법도 없었기에 어스는 사냥에 열중했다.
대마왕이 될 수 있는 주인 잃은 대죄를 손에 넣기 위한 전쟁은 마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저리 싸워서 어떻게 대죄를 손에 넣는 것인지 의문이었지만 고위 마족을 잡아다 물어봐도 그들 역시 모른다고 했다.
그저 이런 식으로 피를 흘리며 싸우다 보면 어느 순간 두각을 나타내는 마족에게 대죄가 알아서 깃든다고 하였다.
뜬구름 잡는 소리였지만 세계도 다르고 종족도 다른 세상이라 그러려니 했다.
“죽어라!”
“헬파이어!”
“파이어 스톰!”
“라이트닝 인피니티!”
“리버스 그래비티!”
각종 고위 마법이 마족들의 손에서 펼쳐졌다.
저 하나하나가 무지막지한 위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 보통은 스쳐도 사망이다.
그러나 이곳은 마계, 개나 소나 소드마스터인 파워 인플레가 극심한 세계다.
그러한 곳이다 보니 뤼빅스에선 세상이 발칵 뒤집힐 강자도 마계에선 좀 치네? 정도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확실히 내 헬파이어가 돌연변이긴 하네.’
마족 마법사가 시전한 헬파이어와 자신의 헬파이어를 비교한 어스는 뿌듯함을 느꼈다.
더욱이 자신의 스킬은 지금보다 더 강해질 여지까지 갖춰져 있었기에 그의 눈엔 마족 마법사들의 고 서클 마법도 자연 눈 아래일 수밖에 없다.
마나 블레이드와 고 서클 마법이 난무하는 전장은 매번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직관의 참맛이란 바로 이를 두고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
성에 기대어 수성전을 펼치던 마족들은 초반엔 성을 감싼 결계 덕분에 우세를 점하였지만 거듭된 강력한 공격 앞에 끝내 결계가 무너지자 곧장 열세에 처했다.
더 방관했다간 아까운 경험치만 잃는 꼴이기에 어스는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공성전이 펼쳐지는 장소라 파괴 범위를 넓힐 필요가 없어 깔끔하게 메테오 열 발만 투하했다.
승리가 바로 코앞이라 여겨 전의가 오른 공격 측도, 결계가 박살 나는 순간 암울한 미래를 그렸던 방어 측도 이 순간은 한마음이 되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메, 메테오다!”
“학살자가 나타났다!”
헬파이어가 다 같은 헬파이어가 아니듯 메테오 역시 다 같은 메테오가 아니다.
그런 메테오가 무려 열 발이나 떨어졌다.
공간 이동 계열의 마법을 보유한 놈들은 이에 기대어 피신했고, 전사 계열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메테오의 파괴 범위에서 달아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이도 저도 없는 놈들은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서서 죽음을 받아들였다.
-최상급 마족을…
-고위 마족을…
-중급 마족을…
제아무리 듣기 좋은 노래도 한 두 번이나 이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았다.
귀찮을 때가 없지 않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레벨업!
.
.
.
아이템도 다수 떨어졌지만 그간 철옹성과 시쿠에게 적용된 아이템들이 제법 있다 보니 최근엔 양쪽 모두 적용되는 아이템 보기가 힘들었다.
‘적용 아이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네, 별 따기야.’
오늘은 어스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바로 강화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9서클 스킬 강화를 작심하고 있다.
메테오의 파괴 범위를 무사히 벗어난 놈들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쫓아갔겠지만 오늘은 방생하기로 했다.
특별한 날이니까.
어스는 어쩌다 보니 마계에서 아지트로 삼게 된 폭포가로 이동했다.
폭포의 기운을 받기 위해 옷을 훌렁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아낸 어스는 너른 바위에 앉았다.
‘10강, 딱 10강이라도 가자.’
스스로에게 기합을 잔득 불어넣은 어스는 강화를 시작했다.
그가 낙점한 스킬은 엘리멘탈 피니쉬먼트(3/12)였다.
분노의 주인인 대마왕 사탄처럼 자존심에 목숨까지 거는 또라이만 있으면 메테오 하나로 충분하지만 그건 요행이다.
그러니 정상적인 놈들을 상대할 때 쓸 만한 스킬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게 바로 공간적인 제약 없이 펼칠 수 있는 엘리멘탈 피니쉬먼트였다.
4에서 6강까지 강화 1회에 드는 비용은 5억 코인.
7에서 9강까지 강화 1회에 드는 비용은 8억 코인.
어스가 바라는 10강은 강화 1회에 16억이다.
참고로 11강은 32억, 12강은 50억이다.
고 서클일수록 강화 실패율도 높다 보니 자연 수백억 코인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0강만 되도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결말이여 내게 오라! 가즈아!’
모으는 건 어려워도 쓰는 건 순식간이란 말이 있다.
이와 같은 말이 유독 빛을 바라는 장르가 있었으니, 그 장르란 바로 도박성이 짙은 상황에서다.
강화 경험이 풍부한 어스였기에 누구보다 이를 잘 이해하고, 납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번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이해고 납득이고 일단 빡 돈다.
바로.
‘X팔.’
성인군자도 입에 욕설을 토해낼 수밖에 없게 된다.
대현자에게 열광하는 뤼빅스의 뭍 마법사들이 저 말을 들었다면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저 모습도 좋다고 따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게 있어 대현자가 싸지른 똥조차 귀한 연구 대상이다.
하물며 대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니.
각설하고 어스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말은 10강만 되도 좋다고 했지만 실상 그는 11강까지 되지 않을까라는, 내심 그와 같은 기대를 갖고 시도한 강화였다.
말이 쉬워 수백억 코인이지 실상 이를 모으기 위해선 마계에서도 쉽지 않다.
그런데 그걸.
코인 : 11.186,057.
다 말아먹고 고작 이것만 남았다.
엘리멘탈 피니쉬먼트(+8/12).
이러니 욕밖에 나올 수밖에.
‘내가 손모가지를 자르든가 해야지.’
하아.
요즘 마계에 자신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는지 대규모 전장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니 방금 날린 수백억 코인을 모으려면 대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지금 날린 코인으로 수명을 샀다면 수명이 수백만 년으로 늘어…
‘쇠털같이 많은 시간이 있는데 굳이 찰나의 시간에 일희일비 말자. 명색이 대현자고, 명색이 국왕인데.’
자신의 마음을 다독인 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몸을 활짝 펼치기도 전에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몸을 굳게 만든 건 이지러지기 시작한 공간에서 웅장한 마기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놈! 네가 학살자더냐!”
‘대마왕?’
마계에서 힘깨나 쓰고 산다는 고위 마족들도 살아생전 한 번 만날까 싶은 대마왕을 또다시 보게 된 어스였다.
이번엔 며칠을 죽은 듯 엎드려 있어야 하려나 벌써부터 배가 고파진 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