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뤼빅스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혼혈과 이종족 노예를 모두 거둬 실리시아로 데려왔다.
그렇게 모은 인원이 무려 40만 명에 육박했다.
여기에 아도니스에서 넘어온 이종족까지 더해지자 실리시아의 인구는 단숨에 70만 명을 돌파했다.
머릿수로는 인간 왕국에 비교할 수 없지만 개개인의 역량과 영토의 면적만 보면 제국이란 이름을 붙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에 아도니스 대륙과 수시로 오갈 수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실리시아의 기반은 반석처럼 넓고 단단했다.
부족한 인구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 이제 남은 건 실리시아를 왕국으로 정식으로 공표하는 일만 남았다.
그 일에 앞서 어스는 여전히 실리시아에 남아 있는 옛 동료를 왕궁으로 초대했다.
“조만간 실리시아를 왕국으로 선포할 거야.”
“건국?”
카멜이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며 반문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하였기에 어스에게 있어 카멜의 반응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어스가 생각한 건 경직된 반응이 아니라 축하였기 때문이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지난날 카멜이 자신에게 해준 일도 있었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왜 미답지를 손에 넣고, 대륙에 흩어진 이종족과 혼혈을 실리시아로 모았겠어?”
“교단은 물론 각 왕국도 실리시아를 왕국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야.”
“그들의 인정 따윈 관심 없어. 덩컨 대협곡을 경계로 실리시아는 실리시아대로 살고, 저들은 저들대로 살아가면 돼. 그게 내키지 않아서 저들이 무력 침공을 감행한다면 나 역시 가만있지 않을 거야.”
어스의 태도는 단호했다.
생각이 달라 충돌한 어스와 카멜로 인해 분위기가 경직되자 프라이스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끼어들었다.
“앞으로 어스를 국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당연히 국왕님이지.”
“우리 어스 출세했네, 출세했어.”
페어몬트의 말을 받은 프라이스는 박수까지 치며 말하였다.
두 사람이 나서주어 분위기를 풀자 카멜도 곧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하겠다 싶었는지 술잔을 비운 뒤 입을 열었다.
“네가 그리 마음먹었다니 더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마족 침공에서 인류가 자유로워진다면 그땐 2차 종족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거야.”
“감수할 생각이야.”
“인류의 적이 된다고 해도?”
“거듭 말할게. 감수할 생각이야.”
프라이스와 페어몬트도 분위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더는 끼어들 수 없었던지 술만 거푸 마셨다.
한편으론 실리시아와 인류가 맞붙어 싸울 경우 자신들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생각했다.
어스를 생각하면 실리시아의 편을 들어야겠지만 카멜이나 조국인 솔론의 입장을 고려하면 그게 과연 옳은가라는 문제에선 두 사람 모두 선뜻 결정하기 힘들었다.
“그럼 마족이 침공하면 그땐 어떻게 할 생각이야?”
대현자의 힘은 이미 입증됐다.
그러니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어스의 힘은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스가 이종족 국가를 선포한다면 교단 입장에선 그의 도움 자체가 교리에 위반되는 것이기에 그와의 협력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어스처럼 마족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이는 없다.
그리고 그가 마계를 수시로 오가며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아는 이들의 경우 더더욱.
그러나 카멜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페어몬트와 프라이스 역시.
카멜의 지적에 페어몬트와 프라이스도 상황이 심각하단 걸 인식했는지 들었던 잔마저 내려놓고 어스를 보았다.
어스는 처음으로 저들과 자신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존재함을 느꼈다.
전에 없던 감정이 들었다.
섭섭함인지 불쾌함인지 정의하기 힘든.
“협조를 구한다면 협력할 의사는 있어. 하지만 실리시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움은 없을 거야.”
“어스, 그건 아니지. 네가 외면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야. 큰 힘에는 큰 책임도 따른다는 말도 있잖아?”
“나도 프라이스의 말에 동감이다. 마족에 관한 문제는 개인의 이득을 떠나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해. 그 대상이 설사 이종족이더라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차라리 인류와 이종족이 힘을 모아 지금의 난관을 극복한 후에 나라를 세우는 건 어때? 그때면 많은 이들이 지지해주지 않겠어?”
어스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페어몬트에게 반문했다.
“페어몬트의 말처럼 나와 이종족들이 마족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쳐요. 그래서 일이 좋게 마무리되어 더는 마족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때, 그런 때가 온다 치면 과연 교단이 이종족의 나라를 용인할까요?”
페어몬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 말을 아꼈다.
일방적인 신념을 가진 자들이 언제 주변의 말을 듣던가? 오히려 옳은 말을 하면 이단으로 몰아 입을 다물게 하는 게 교단의 방식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봐요, 말 못 하잖아요. 아무튼 여러분들의 생각은 잘 들었어요. 그리고 여러분들과 제 생각이 다르다는 것 역시 확인했어요. 세 분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솔론으로 가세요. 워프 게이트를 열어줄 테니 가는 길이 힘들진 않을 겁니다. 전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면 각자의 길을 가면 그뿐이다.
그걸 잘라내지 못해 연연하면 필시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피할 수 없다.
혹은 양측의 불화만 가중할 것이다.
그러니 뜻이 다른 걸 확인한 이상 끊어내는 게 서로를 위해서 낫다.
카멜, 페어몬트, 프라이스는 침중한 기색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 * *
전 동료들을 솔론 왕국으로 돌려보낸 어스는 3일 후 실리시아를 왕국으로 선포했다.
이 사실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마탑을 통해 알렸고, 이를 접한 마탑은 각 왕국에 알렸다.
당연히 큰 파장이 일었다.
그럼에도 실리시아를 향한 공격은 없었다.
공격은커녕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시하겠다는 건가?’
교단과 각 왕국들은 이처럼 무시로 일관했다면 마탑에선 축하사절단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이는 마탑이 교단과 대놓고 척을 지겠다는 선포와 다름없었다.
마탑의 행동에 실리시아 건국엔 무시로 일관하던 교단은 마탑의 집단적인 행보에는 대로했다.
하나 마족이 언제 침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탑과 척을 지는 건 교단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기에 각 왕국들을 부추겨 경제적인 제재를 단행했다.
사절단의 파견을 취소한다는 조건을 수락하면 그때 이를 풀어주겠다며 마탑을 상대로 협박했다.
“전하, 마탑을 받아들이는 건 어떻겠습니까?”
공식적으로 건국을 선포한 뒤 어스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드워프의 정성이 들어간 대전은 어스가 앉은 왕좌를 중심으로 좌우에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수인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실리시아엔 엘프만 사는 게 아니다 보니 각 종족의 인물을 뽑아 각료에 임명한 것이다.
실리시아의 전반적인 운영은 여전히 엘프들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실리시아의 중심에 위그드라실이 있다 보니 다른 종족들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스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신들보다 엘프가 가깝다는 점도 작용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재상에 오른 로엘이 신하들을 대신하여 어스에게 주청했다.
어스 역시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들인데 괜찮겠어?”
“실리시아의 백성 절반이 인간들에 의해 오랜 세월 차별과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자신들에게 자유를 선물하신 전하의 뜻에 반할 백성은 없습니다.”
인간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반면 이종족은 그와 같지 않았다.
어스는 이종족의 이런 한결같은 모습이 좋았다.
아마 그래서이지 않을까 싶다.
어스의 마음이 이종족에게 크게 기운 이유.
“좋아, 재상이 각 마탑과 접촉해보고 그들이 실리시아의 규칙을 온전히 수용하겠다면 들이도록 해. 만약 이를 수용하지 않고 협상을 하려 든다면 들이지 마.”
건국을 선포했지만 확실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다 보니 곳곳에서 삐걱거리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탑이 들어온다면 지금보다 더 삐걱거릴 것이다.
그런데 실리시아의 규칙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 들어온다면 단순한 삐걱거림을 넘어 혼란을 일으킬 게 자명하기에 확실하게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들인다면 다른 지역에 마법사들의 도시를 따로 만들도록 해. 백성 태반이 인간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을 테니까.”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이…”
“중앙군 창설입니다.”
국방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당장은 시쿠가 덩컨 대협곡에 배치되어 국경을 지키고 있지만 언제까지 녀석에게 이를 맡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시쿠가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들이 존재하다 보니, 지금처럼 주먹구구식의 군대보단 군기가 잡힌 군대의 양성은 필수였다.
‘왕 노릇이 생각보다 쉽지 않네.’
그래도 자신이 세운 왕국이기에 천년, 아니 만년은 쭉 이어지길 원하는 마음에서 어스는 국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왕 노릇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마계도 가야하고 또 찬란한 타락자의 출현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러니.
“재상에게 일임하겠다.”
로엘을 굴릴 수밖에.
대전회의를 끝낸 어스는 왕궁 근위대 대장을 맡고 있는 푸리엘을 호위를 받으며 집무실로 향했다.
곧 로엘이 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나 마계에 갈 테니까 문제 생기면 시쿠를 통해 연락해.”
험트리 자작 영지에 마족이 출현한 이후 한 달이 흘렀다.
그럼에도 아직 잠잠한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어스는 마계 행을 더는 늦출 수 없었다.
로엘과 푸리엘 역시 이에 이미 동의하였기에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다녀올게.”
어스는 그 자리에서 차원을 건너뛰어 마계로 향했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마계로 넘어온 어스는 곧장 검은 탑으로 이동했다.
마족들이 뤼빅스로 넘어올 수 있는 유일한 입구가 그곳이기에.
검은 탑 주변은 조용했다.
마족들도 저 검은 탑이 중간계로 넘어가는 입구임을 알고 있을 텐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대마왕을 잡은 것 때문에 다들 겁먹은 건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뤼빅스는 더 이상 마족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계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어스는 검은 탑을 잠시 쳐다본 뒤 이동했다.
마계에서 제법 활동하였기에 아는 좌표가 상당하다 보니 이동은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이동한 끝에 어스는 마족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마족 놈들이 죽기 살기로 서로 싸우고 있었다.
한두 놈이 아니다.
몇만 단위의 마족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래서 침공이 없었던 건가?’
개나 소나 소드 마스터인 세상이라서 그런지 박진감 하나는 끝내줬다.
저기에 메테오 한방 떨구면 어떻게 될까?
한 놈이라도 더 살아 있을 때 떨궈도 떨궈야지 전쟁이 끝나서 떨구면 손해 막심이기에 어스는 곧장 메테오를 시전했다.
대기를 가르는 굉음과 함께 메테오 다발이 상공에 나타나자 비명과 괴성이 난무했던 전장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메, 메테오다!”
“학살자가 나타났다!”
“피, 피해!”
좀 전까지 적이었던 자들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급 마족이건 고위 마족이건 할 것 없이 모두가 도망치기 여념 없다.
어스는 고위 마족으로 보이는 놈들의 이동 방향을 예의 주시했다.
쾅쾅쾅쾅-!
운석이 지면과 충돌하자 대지는 가라앉고 주변은 강력한 지진으로 몸살을 앓았다.
파괴 범위는 넓었지만 제법 많은 수의 마족들이 도주에 성공했다.
그래봐야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하급 마족을…
-최상급 마족을…
알람을 무시하며 곧장 이동한 어스의 손엔 고위 마족의 뿔이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채가 잡힌 고위 마족이 크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스와 눈이 마주친 마족의 안색은 보기 안쓰러울 만큼 창백하게 질렸다.
“하, 학살자?”
“알아보니 소개는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군. 지금부터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해주기 바라. 대답이 만족스러우면 넌 살려줄게.”
자신이 오지 않은 지난 한 달간 마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어스는 묻기 시작했다.
어스가 붙잡은 고위 마족은 대가 센 성격이 아닌 듯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렇게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나하나 들은 어스는 황당함에 입만 뻐끔거렸다.
분노의 대죄를 얻기 위한 마계대전이 발발하여 마족들이 죄다 싸우고 있다니.
‘그래서 험트리 자작 영지 전투 이후 마족들이 나타나지 않았던 거구나?’
설마 이런 이유로 침공이 없었을 줄이야.
이러면 인류가 자신에게 상장이라도 줘야 하지 않나?
“하, 하지만 모든 마족이 마계대전에 휩쓸린 건 아닙니다. 일부 현자들이 중간계 침공을 주도하여 꽤 많은 마족들이 중간계로 이미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지?”
“열흘 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스는 마족의 목을 단숨에 꺾어 버린 뒤 검은 탑으로 급히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