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거침없이 이동하던 어스의 눈에 규모가 제법 큰 도시 하나가 딱 하니 들어왔다.
자잘한 마을 몇 개만 발견했던 어스에게 있어 이는 먹음직한 상차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곧장 메테오를 날리려는데 어째 느낌이 헐렁했다.
그건 마치 겉은 먹음직한데 막상 한입 베어 물고 보니 속이 텅 빈 빵 같았다.
도시에서 처음 이 빵을 사 먹을 때 어찌나 열 받던지 가게 주인의 얼굴을 때릴 뻔했다.
사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후 아니란 걸 알고 어찌나 무안했던지 도망치듯 그 골목을 빠져나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저 도시를 보니 그때 그 기억이 불현듯 스쳤다.
‘마족들이 사는 곳은 아직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는데 이참에 살펴보는 것도 좋겠어.’
철옹성을 단단히 움켜쥔 어스는 결계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헬파이어 한발을 날려 보냈다.
저 도시를 집으로 비유하면 노크를 하는 것인데 헬파이어는 과하지 않을까 싶다.
결계는 없었다.
헬파이어가 타격한 3층 석조 건물은 새하얀 불꽃에 휩싸인 뒤 이내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졌다.
피해는 그 건물 하나만이 아니었다.
주변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힌 뒤에야 사라졌다.
‘이런 큰 도시에 결계가 없다고?’
없는 건 결계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내다보는 이도 없었다.
마계에도 유령도시가 있나?
유령하니 카멜 파티와 함께 게른 산맥으로 가던 중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갔던 버려진 저택이 떠올랐다.
보스 마녀 타라카.
‘거긴 던전도 아니었는데.’
지금까지 숱한 던전을 처리했지만 마녀 타라카의 저택과 같은 던전은 없었다.
그런 곳이 있는지조차 듣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여 관심을 갖고 수소문했음에도 말이다.
‘그땐 많이 힘들었지.’
지금 그 마녀를 만난다면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자신이 있는데.
올챙이 적의 자신을 생각하니 웃음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도리도리.
너무도 조용하여 유령도시라 의심되는 도시에 내려섰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앱솔루트 쉴드 12겹을 몸에 둘렀다.
12만 마나가 쑥 빠졌다.
이는 특제 마나 회복 포션을 통해 냉큼 채웠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앱솔루트 쉴드는 멀쩡히 그를 감싸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이를 봤다면 백이면 백 모두 경악할 일이었다.
쉴드 마법을 두르고 움직인다는 건 그들의 상식을 한참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도 그것이 9서클 앱솔루트 쉴드라면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까 싶다.
9서클 경지는 지금은 전설의 시대라 불리던 고대에도 넘사벽으로 알려진 궁극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대현자가 현시대에 출현했으니 그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마법사들도 그 앞에선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교단을 예로 든다면 그들 앞에 룬이 직접 현신한 것과 동격이라 보면 될 것이다.
이러하다 보니 어스가 실리시아의 문을 마법사 한정으로 개방한다면 마탑의 탑주들도 즉각 실리시아의 백성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어, 없다고? 이 큰 도시에 아무도 없다는 게 말이 돼?”
이 도시에 온 건 우연의 산물이다.
그러니 이 도시의 마족들이 자신의 출현을 알고 대피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저들에게 예언가가 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다.
아니, 설사 예언가가 있더라도 그렇지 피난민이 한 둘도 아닐 텐데 그 많은 피난민이 단시간에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건 뤼빅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마계라 이건가?’
개나 소나 소드 마스터인 세상이다.
하물며 대마법사 급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그들이 힘을 결집했다면 단시간에 도시 하나 비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어스는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라도 한 듯 서둘러 도시를 나섰다.
끼니마저 잊고 돌아다닌 결과 어스는 마족들이 청야전술(?)을 펼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도시는 물론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마을에서도 마족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더 멀리 가야겠군.’
속으로 이를 갈며 밤새도록 블링크를 시전했다.
설마 마계 전체가 다 이렇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 * *
드디어 어스는 멀쩡한 도시를 찾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 본 마족과 그 생김새가 완전히 달랐다.
외모는 완전 천사처럼 보였지만 천사라면 응당 있어야 할 눈부신 날개 대신 박쥐 날개를 달고 있어 기묘한 느낌의 종족이었다.
저 날개가 아니면 마계가 아니라 천계에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스가 발견한 마족은 마계에서 아리오치라 불리는 종족으로 특이하게도 그들은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은 기둥 형태의 절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놈들의 외모도 놀랍고, 놈들이 사는 장소 역시 놀라웠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밤을 새면서까지 이동한 보람을 수확해야 한다.
어스는 본신의 마나도 부족한 듯 철옹성의 마나까지 동원하여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단숨에 31개의 운석이 순차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아리오치 마족의 도시는 발칵 뒤집혔다.
“메테오다!”
“금기 마법이 우릴 겨냥하고 있다!”
여느 마족 도시처럼 저들 도시에도 도시를 보호하는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결계만으로 그 모든 운석을 막을 수 없었다.
놈들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요격에 나섰다.
절반의 운석이 요격과 결계에 막혔다.
그러나 남은 운석만으로도 도시 하나 날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중급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
.
-최상급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
.
.
-레벨업!
-레벨업!
.
.
.
알람이 미친 듯 울었다.
이틀 만에 제대로 된 사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쁨도 언제 청야전술이란 벽에 좌절할지 모른다.
그러니 사냥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무너지는 거대한 기형의 기둥 형태의 절벽.
그러나 다수의 마족들이 도시에서 탈출하여 하늘을 뒤덮었다.
이 상황에서 메테오는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엘리멘탈 피니쉬먼트!’
불, 얼음, 바람, 대지, 번개의 속성이 고스란히 담긴 광역 스킬로 허공을 메워버렸다.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알람.
-아이템을 발견했습니다.
-해당 아이템과 펫의 상성이 맞습니다.
-펫에게 아이템을 적용하시겠습니까?
시쿠는 뤼빅스에 남겨두었다.
그럼에도 승낙만 하면 바로 적용된다고 한다.
오랜만에 적용되는 아이템이니 어찌 마다하랴.
바로 승낙했다.
마족들이라고 마냥 당하고 있지 않았다.
블링크를 통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정신없이 이동하며 엘리멘탈 피니쉬먼트를 남발하는 그를 향해 달려드는 놈들도 적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마족들이었다.
놈들은 엘리멘탈 피니쉬먼트의 그물망을 단숨에 찢고 튀어나왔다.
“이노오오오오옴-!”
분노에 찬 일성과 함께 강력한 공격이 어스를 향해 쇄도했다.
그가 블링크를 통해 이동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공간 이동을 방해하기 위해 공간 왜곡 마법까지 걸어 그의 발을 묶었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다.
앱솔루트 쉴드로 몸을 도배한 상황이라 당연히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외곽의 쉴드가 깨져나가긴 했지만 정작 놈들이 노린 어스는 멀쩡했다.
‘일곱 개가 한 번에 깨져나가다니!’
혹시나 싶어 둘렀던 12겹의 앱솔루트 쉴드 중에서 7개나 깨져 나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중 하나는 마왕이다!
설마 여기가 마왕이 사는 왕국의 수도였다니.
두렵냐고? 천만에.
씩.
어스는 간만에 물약 신공을 발휘했다.
특제 마나 회복 물약을 번개처럼 마시며 엘리멘탈 피니쉬먼트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앱솔루트 쉴드를 시전했다.
백작, 후작, 공작의 작위를 가진 고위 마족을 모조리 처치할 수 있었다.
후작인가? 공작인가? 아무튼 둘 중 하나가 죽자 아이템을 발견했다.
그거도 철옹성에 적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이를 승낙하면 철옹성은 흡수한 아이템을 활성화하기까지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점이 아쉬웠지만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보니 곧장 승낙했다.
그런데 이번은 즉시 활성화가 이뤄졌다.
새로운 기능이 열렸다.
그것은 어스가 늘 아쉬워하던 비행 기능이었다.
어쩜 이리 시의 적절하게 이런 기능이 뜬단 말인가.
덕분에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더는 블링크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될 놈은 된다더니 역시 자신은 될 놈이었다.
씩.
“너, 넌 대체 누구냐!”
어스와 마주한 건 이제 마왕 하나만 남았다.
마왕은 불신과 경악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왕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다.
단신으로 쳐들어와서 마왕성을 이처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마왕도 할 수 없는 일.
있다면 오직 하나, 스스로 심연으로 걸어 들어간 대마왕들뿐이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순간, 아주 짧은 순간 아리오치의 마왕은 그를 대마왕 중 한 명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나 상대에게선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볼품없는 외양은 아무리 봐도 기록으로 남겨진 인간의 그것이다.
물론 마왕은 어스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왕은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답을 냈다.
“드래곤이냐? 아니, 드래곤도 너처럼 강할 수 없다. 그렇다면…천족이냐?”
“나? 난 인간이야.”
“지금 날 농락하려는 것이냐!”
“농락이라니. 내참 어이가 없네. 어쩜 마족들은 이리 한결같은지 모르겠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난 인간이다.”
“믿을 수 없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지?”
“저승길 궁금하지 않게 특별히 말해주마. 각성하면 돼. 그럼 잘 가라.”
놈과 대화하는 짧은 시간 동안 특제 마나 회복 포션으로 마나를 모두 회복한 어스는 놈을 위해 특별히 31번의 엘리멘탈 피니쉬먼트를 중첩시켰다.
앞서 마기를 크게 소모한 탓에 31번이 아니라 5번의 중첩만으로도 처치할 수 있었지만 연이은 대박을 선사한 공을 생각하여 최선을 다해 저승으로 모셨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어스는 도리(?)를 지켰다.
-마왕을 처치했습니다.
-강력한 대상을 사냥했습니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 100을 습득합니다.
-레벨업!
-레벨업!
.
.
.
어라? 80이 아니라 100이라니 그럼 이 녀석은 앞서 두 마왕보다 강한 놈이란 말인데.
그럼에도 딱히 어렵지 않으니.
씩.
‘마왕도 다 같은 마왕은 아니란 말이군.’
마족 놈들이 소문 듣고 도망치기 전에 얼른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이번엔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하지?
‘젠장, 한 번에 다 몰려오면 안 되나?’
검은 탑 앞을 지키고 있으면 올까? 밤새 이동하여 정신적으로 피로했던 어스는 일단 검은 탑이 있는 곳으로 워프 게이트를 타고 넘어갔다.
* * *
마족의 침공을 대비하여 뤼빅스의 지배층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했다.
그래도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점검하고 또 점검하며 조금의 빈틈도 발생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였다.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다.
폭풍전야가 제아무리 길다지만 이렇게까지 긴 건 분명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륙 통합 사령부의 두뇌 집단인 참모진 전체가 술렁거렸다.
“마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글리시아 남작 영지 이후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지 않습니까?”
“정탐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탄식에 섞여 나오고 있었다.
전쟁에서 정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물론, 상대가 마족이라 정보를 얻더라도 이를 활용하여 적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단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았기에 정보에 대한 참모들의 갈증은 한계까지 도달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차라리 마족이 침공했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심정의 발로다.
각자 자신의 타들어가는 속을 내보이지 못해 안달이던 참모 본부로 종합 통신부 소속 통신관이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약속한 것처럼 전령을 향했다.
‘치, 침공인가?’
‘놈들이 온 것인가?’
두근두근.
이 순간 참모들은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차라리 속을 끓이더라도 폭풍전야가 더 유지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자신들의 점검이 정말 물샐틈없이 촘촘한지도 의심했다.
“무, 무슨 일이냐?”
“마, 마족이 크세론 왕국 남부에 출현하여 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올 것이 왔다!
참모들의 심장은 일제히 끈 떨어진 추처럼 떨어져 바닥을 때렸다.
쿵쿵쿵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