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시트리 족 왕국 수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어스는 전날 도리아와 그 수하들이 지내던 폭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봐온 장소 중 이 장소만큼 괜찮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쿠.’
-앗! 주인님.
‘넘어온 인간들 있어?’
교단을 까무러치게 놀라게 만든 사건이 얼마 전 있었다.
덩컨 대협곡 너머 거대한 골짜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거대 골짜기를 만든 건 어스의 펫 시쿠였다.
-시쿠가 눈 크게 뜨고 경계한다. 누구도 시쿠의 부릅뜬 눈 피할 수 없다. 주인님 걱정 안 해도 된다.
좁쌀만 한 눈이라 제아무리 부릅떠봐야 좁쌀일 텐데 걱정을 말라니.
그래도 눈은 작아도 꽤 영특한 녀석이라 다른 조치도 분명 취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자폭 골렘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는 마법 함정과 달리 그것은 살상 반경, 아니 소멸 반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있고 이종족 경비대도 활동하고 있으니 적어도 대협곡을 통한 사람들의 실리시아 진입은 과거보다 더 까다로워졌다.
‘그럼 내가 우리 시쿠 믿지 누굴 믿겠어.’
어스는 이처럼 간간히 시쿠를 통해 실리시아의 상황을 전해 듣곤 했다.
차원 벽을 뛰어넘어서.
실리시아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시쿠에게서 보고 받은 어스는 소통을 끊고 갓 주방에서 나온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양송이 듬뿍 들어간 스프로 입가심을 한 뒤 갖가지 향신료로 48시간을 숙성한 최고급 스테이크를 꺼내 썰기 시작했다.
마치 고급 식당이라도 온 듯 완벽한 세팅을 마친 다음에 말이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와 그 위에 뜬 크고 작은 초승달 두 녀석과 눈을 잠시 마주치며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육즙을 만끽했다.
오늘 하루 그가 죽인 마족의 수를 생각하면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에게 있어 마족은 단순한 경험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딱히 마음 쓰지 않았다.
마족 목숨도 목숨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스에게 그 소리는 무좀균도 생명이라고 떠드는 자의 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간혹 마음이 안 좋을 땐 있다.
임산부나 어린아이를 확인한 상태에서 죽이는 경우다.
그렇다고 그들만 쏙 빼낼 수도 없다.
광역 마법은 사람 가려서 죽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전사가 아니라 다행이지.’
그랬다면 바로 눈앞에서 죽여야 할 테니 살생에 대한 부담감이 적지 않게 쌓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법사라 적어도 그런 부담감은 없다.
식사의 마지막은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한 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을 차리고 치우는 번거로움만 아니면 딱 좋은데.
설거지는 없다.
몽땅 버렸다.
이건 버려도 되는 식기다.
나무로 만든 것이기에.
‘마계나 마족은 더 이상 내게 위험이 안 되는데 문제는 찬란했던 타락자란 말이야.’
마족도 찬란했던 타락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놈들의 땅에 검은 탑이 있어 마계와 놈이 연관된 것이 아닌가? 그리 의심했지만 누구도 이런 이명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그러니 그전까지 부단히 강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스는 스킬 강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236).
칭호 : 위그드라실의 친구(유일). 승리의 노래(12/12). 엘프의 군주(유일). 마왕 살해자.
생명력 : 250,620/250,620. (생명력 회복 1시간 40퍼센트).
마나 : 252,250/252,250. (마나 회복 1시간 50퍼센트).
인벤토리 : 1(+22).
스탯 :
힘(152.7). 민첩(152.7). 체력(50,050). 지력(45,209). 정신(50,050).
직업 스킬(16/16) :
매직 애로우(+12/12). 파이어 애로우(+12/12). 파이어 볼(+12/12). 파이어 버스트(+12/12). 아이스 스피어(+12/12). 일루젼(+12/12). 콜 라이트닝(+7/12). 블링크(+3/12). 체인 라이트닝(+4/12). 헬파이어(+3/12). 레스토레이션(+3/12). 프로즌 템페스트(+3/12). 엘리멘탈 피니쉬먼트(+3/12). 메테오 스트라이크(+3/12). 워프 게이트(+3/12). 앱솔루트 쉴드(+3/12).
업적 포인트 : 218.
코인 : 2,409,988,057.
‘역시 자잘한 마을 몇 개 처리하는 것보단 대도시 하나 먹는 게 낫군.’
그게 한 나라의 수도라면 더 좋고.
9서클 스킬의 경우 24억 코인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는 고작 4번이다.
그래서 9서클은 아예 접었다.
어스는 탑을 쌓아 올리듯 콜 라이트닝부터 도전하기 시작했다.
보기엔 코인이 많아 보이지만 앞서 경험했듯 강화를 시작하는 순간 많은 액수는 아니다.
운 좋으면 8서클 스킬 하나 정도는 10강으로 만들지 않을까 기대하며 어스의 손끝이 바쁘게 움직였다.
* * *
역시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직업 스킬 : 콜 라이트닝(+12/12). 블링크(+12/12). 체인 라이트닝(+12/12). 헬파이어(+5/12).
‘8서클 하나는 10강으로 만들 줄 알았는데.’
콜 라이트닝부터 체인 라이트닝까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술술 풀렸다.
그렇다고 실패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이전보다 실패 확률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기대했다.
이러다 8서클 2개 12강 만드는 거 아니냐고.
그건 설레발이었다.
입이 화를 부른 것 같았다.
체인 라이트닝까지 순풍에 돛을 펼친 듯 잘 나가던 성공률이 이 생각을 하고부터 더럽게 안 됐다.
그 결과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다.
코인 : 2,057.
‘스트레스.’
어젯밤 강화 작업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아서인지 입맛도 없고 해서 아침 식사는 대충 때웠다.
달랑 샌드위치 하나만 먹었다.
속은 가벼웠지만 마음이 무거운 탓에 과식한 기분마저 들었다.
오늘은 어느 방향으로 갈까?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허공으로 휙 던졌다.
빙글빙글 돌던 나뭇가지가 떨어졌다.
가지의 끝이 서쪽을 가리켰다.
“가즈아-!”
울적한 기분도 털어낼 겸 기합을 힘껏 불어놓고 허공을 향해 단숨에 솟구쳤다.
신체의 힘만으로 솟구친 높이가 무려 50미터에 이른다.
여기서부턴 블링크를 시전하며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 * *
맹수의 얼굴에 인간의 몸을 한 시트리 족은 학살자에 주 표적이 되어 왕국의 수장인 마왕이 죽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어 시트리 족은 단숨에 마계에서 약소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민족들은 이에 전전긍긍했다.
시트리 족이 그리 강한 민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의 하찮은 민족도 아니다 보니 자신들도 시트리 족 꼴 나지 말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살자의 출현을 우려한 다른 왕국들은 시트리 족 꼴이 나지 않기 위해 외부에서 활동하는 전 병력을 돌려 도시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자연 검은 탑에 관한 마족들의 관심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 학살자가 나타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이를 조사하겠는가.
“마, 마왕님! 동부 마을에 학살자가 출현했다는 급보입니다!”
인간과 유사하나 피부색이 인간에게선 볼 수 없는 회색인 마족 고모리 족, 그들의 왕국 수도에 긴급을 알리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이를 받아든 자는 즉시 대전으로 뛰어 들어가 마왕에게 이를 보고했다.
엊그제만 해도 마족들은 도시나 영지 단위로 학살자에 대응했다.
그러나 어제 시트리 족 수장인 마왕이 학살자에게 전사하고, 그들의 수도가 흔적 없이 사라진 걸 목격한 이후 학살자 대응을 마왕이 직접 주관하게 되었다.
마족 입장에서 이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자존심을 부리기엔 학살자의 이력(?)이 상당하여 더는 지방이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맡길 수 없었다.
“감히, 고모리를 노리다니! 내 이 비천한 인간 놈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근위대는 즉시 짐을 따르라!”
고모리 왕국을 다스리는 마왕은 직접 근위대를 이끌고 워프 게이트로 진입했다.
그러나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학살자는 업무(?)를 마감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대노한 마왕이 학살자의 수색을 명령하자 100명의 근위대는 신속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마왕의 수정구가 울었다.
-마왕님, 삼색 골짜기 숲 요새에 학살자가 출현했습니다.
이에 마왕은 근위대를 부랴부랴 불러들인 뒤 곧 삼색 골짜기 숲 요새로 이동했다.
이젠 학살자를 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웬걸 일반 마을도, 도시도 아닌 요새에 도착해보니 거대한 크레바스만 남고 자신의 백성도 없고, 학살자도 보이지 않았다.
메테오가 손짓 한 번에 발동하는 그런 허접한 하위 마법도 아니고, 어찌 그새 메테오를 날리고 사라질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뒷북을 치자 이래선 답이 없다고 판단한 마왕은 근위대를 이끌고 요새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학살자를 기다릴 심산이었다.
‘이게 맞아, 이게.’
그렇게 도시에 도착하여 학살자를 기다리던 마왕은 이후 4개의 마을과 1개의 도시가 박살 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고모리 족 마왕은 뒷목을 잡았다.
앞서 마을 4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도시는 아니다.
삼색 골짜기 숲 요새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요새 북부에 위치한 이 도시 하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 오지 않고 엉뚱한 도시로 갔다?
‘짐이 여기 있다는 걸 놈이 알아차린 것인가? 혹시, 내부에 놈의 첩자가 있는 건가?’
마왕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왕이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스는 오늘 아침 나뭇가지를 던져 그 나뭇가지가 서쪽을 가리켰기에 계속 서진한 것뿐이다.
이를 알 리 없는 고모리 족 마왕의 의심은 쓸데없이 깊어만 갔다.
* * *
마왕이 자신의 행보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을 그 시간 어스는 작은 규모의 도시를 발견하곤 보자마자.
‘메테오 스트라이크!’
슈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도시 하나를 지상에서 3초 만에 지워버린 뒤 열심히 서진했다.
‘서쪽은 아닌가? 당최 쓸 만한 도시가 없네, 도시가.’
속으로 불만을 드러냈지만 방향은 바꾸지 않았다.
중간에 방향을 틀었는데 알고 보니 그 방향에 큰 도시가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그래, 남자가 일관성이 있어야지. 일관성이.”
* * *
당장이라도 인류 멸망급 전쟁을 기정사실로 여긴 뤼빅스 대륙은 열흘간 마족의 코빼기도 볼 수 없어 내부적으로 여러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시체제로 돌입하다 보니 물자의 생산과 운송 모두 전투에 필요한 것을 우선시했고, 이에 민간에 필요한 물자의 생산과 운송에 차질이 빚어져 물가가 연일 폭등하여 서민 경제에 큰 타격이 발생했다.
당장은 큰일이 아니라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경제적으로 심각한 상태가 발생할 소지가 컸다.
그렇다고 마족이 통로로 사용하는 던전이 사라진 것도 아니기에 걱정하면서도 현 전시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스가 뤼빅스로 돌아왔다.
그의 왕국에.
“영주님!”
마계로 차원이동한 지 보름 만이었다.
“별일 없었지?”
“골짜기 때문인지 실리시아로 잠입했던 인간들은 없었습니다.”
어스의 곁엔 시에라와 푸리엘이 함께 하고 있었다.
실리시아의 주도는 이미 그 모습을 완전히 갖춰 하나의 도시로 거듭났다.
기반이 완전히 구축된 건 아니지만 어스가 머무는 성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어 중심가의 기반 시설이 완료되었다.
외곽이야 딱히 급할 게 없어 공사가 늦어져도 큰 탈은 없었다.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에 인구가 고작 3만 명이기 때문이다.
“시쿠가 지키고 있으니까. 참, 이종족 노예와 혼혈은?”
“연합이 운영하는 상단을 통해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교단이 입김이 강한 탓에 지난 보름 동안 300명만 간신히 확보했습니다.”
마계가 아니라 교단부터 손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교황청을 지상에서 지워버릴까?’
인간의 나라가 아닌 이종족과 혼혈의 나라를 세우기로 작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교단도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름에 300명은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번듯한 나라 하나 세우기 왜 이리 힘든 것인지.
어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반가운 소식이 그의 집무실로 날아들었다.
“충! 영주님 로엘 님이 귀환했습니다.”
5월 초에나 오지 않을까 예상했던 로엘이 무려 두 달을 앞당겨 3월 초인 지금 왔다는 말에 어스는 물론 푸리엘도 크게 놀랐다.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로엘이 돌아왔다는 건 일단 반가운 일이기에 어스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