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대규모 마족 침공을 받은 글리시아로 교단의 병력이 집결했다.
매직 스틱이란 신무기를 보급한 전례가 있던 터라 저들에겐 또 다른 신무기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 많았는데 이번에 입증됐다.
순교를 각오하고 글리시아 남작 영지에 도착한 교도들은 크게 놀랐다.
마족들이 자행한 흔적 때문이 아니었다.
멀쩡한 생존자들 때문이었다.
일국의 수도도 아니고 고작 변방 남작 영지가 마족의 공격을 버텼으니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족이 도망쳤단 말이냐?”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어스 테리우스를 보자 겁먹은 개처럼 꽁지를 내리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베로니카 단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족이 달리 마족인가.
비록에 기록된 마족은 싸움에 있어 물러나는 법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의 악랄함과 잔혹함은 죽음마저 초월했다고 분명, 분명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참고로 비록은 교단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록물이자, 대중에 퍼진 성서의 모태였다.
‘놈의 블링크가 제아무리 대단하다지만 테리우스에서 여기까지 그 짧은 시간에 도착할 수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온 거지?’
이러한 의문은 이내 증발했다.
8서클 현자에게 텔레포트 마법진쯤이야 문제 될 게 없을 테니까.
베로니카 단장은 옆길로 샌 자신의 생각을 바로잡았다.
중요한 건 그가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가 아니다, 그가 1천 명이나 되는 마족을 삽시간에 제거한 실력에 주목해야 한다.
하아.
‘놈은 진짜 괴물이었어.’
마족의 본격적인 침공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선 그와 같은 강자는 인류의 빛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교단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교단 입장이었다.
정면으로 충돌한 적은 없지만 교단과 어스 테리우스가 각을 세우고 있는 건 더는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 * *
어스는 룬 교단 무장 교도들이 글리시아 영지에 집결하는 걸 목격하자마자 바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전 여자 친구의 본가와 고향을 마족의 손에서 구해냈으나 그의 표정은 딱히 좋지 않았다.
마지막에 듣게 된 알람 때문이었다.
-경고! 찬란했던 타락자가 몸을 일으킵니다.
‘찬란했던 타락자라…타락한 고대 신이라도 되는 건가?’
처음 경고를 접했을 땐 마왕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마왕에게 붙을 이명으론 여겨지지 않았다.
도저히.
“영주님?”
“어? 응.”
“마족들의 본격적인 침략을 우려하시는 건가요?”
중간계 입장에선 마족은 침략자다.
종족불문의 적인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글리시아 영지 사태는 이종족들 입장에서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뤼빅스가 마계의 손에 들어가면 다음은 아도니스가 될 테니까.
아니, 그 전에 어린 세계수님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래도 어스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푸리엘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마족을?”
“그게 아니면 왜?”
시스템의 경고가 신경 쓰일 뿐, 마족은 딱히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놈들이 뤼빅스로 넘어오면 마계에서처럼 광역 스킬을 난사할 수 없다는,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리고 놈들이 뤼빅스로 넘어오는 입구의 위치를 알고 있는 이상 그것만 파괴하면 이번 글리시아 남작 영지에서와 같은 대규모 침공은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검은 탑이 그 하나라는 가정하에서.
설사 검은 탑이 그 하나가 아니더라도 문제없다.
지금까지 꺼림칙하여 건드리지 않았던 마왕 성을 이참에 보란 듯이 박살 내면 된다.
‘그러면 더 열 받으려나?’
그건 차원 이동이 가능해지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이종족들은 종족마다 신이 따로 있지? 예를 들면 엘프의 세계수와 같은 그런 존재 말이야?”
푸리엘 입장에선 뜬금없는 소리였다.
마족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신을 등판시켰으니까.
그래도 그에게 이유가 있어 저런 말을 하는 것이라 판단한 푸리엘은 이종족들이 섬기는 신들에 대해 열거했다.
한 종족이 한 신을 섬기는 건 아니다.
예를 들면 수인족의 경우 견인족은 달의 여신, 묘인족은 별의 여신을 섬기고 있다.
드워프는 불과 철 그리고 땅의 신을 모신다.
“…그러한 신님들이 계세요. 그런데 갑자기 신님들에 대해선 왜 묻는 건지?”
“찬란했던, 혹은 찬란한 이란 수식어가 붙은 신은 없어?”
“제가 알기론 없어요. 그런데 왜 그걸 묻는 건가요?”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든 존재면 신이 아닐까 싶어서 그래.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만에 하나 정말 신이 최종보스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알아봐야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문제는 다른 사람은 다 모르고 자신만 안다는 점이다.
스트레스.
“아도니스와 실리시아가 연결되면 그때 대장로님을 만날 수 있으실 테니 영주님이 직접 알아보세요. 그분의 지혜와 지식이라면 영주님이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한 해답을 갖고 계실지 모르니까요.”
“그러고 보니 로엘은 언제쯤 아도니스에 도착할 것 같아?”
“두세 달 안이지 싶어요.”
“아도니스는 정말 먼 곳이네. 알았어. 그리고 연합에도 이야기해서 마족에 관한 소식을 알아보라고 해줘.”
푸리엘의 마음에 의문이란 파문만 거세게 일으킨 어스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시선을 밤하늘로 던졌다.
‘특전 마렵네, 마려워.’
하지만 어쩌랴 특전은 이미 거둬졌으니 남은 방법은 미증유의 사태가 닥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레벨업에 집중할 수밖에.
문제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마족들이 침공할 경우다.
과연 교단이 이를 잘 막아낼 수 있을까?
자신을 정찰로 돌리려 한 걸 보면 분명 수가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자신처럼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시스템의 경고도 있는 마당에 손 넣고 있는 건 더더욱 불안하니 제2의 글리시아가 자신의 영지가 될 수 있음을 상정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안전과 직결된 문제에 있어 부족한 것보단 넘치는 게 나을 테니.
“푸리엘, 내가 없는 동안 우리 영지에 마족이 침공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 대책 마련해서 가져와 줘.”
“……”
어스가 던진 숙제에 푸리엘은 자신의 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 * *
글리시아 남작 영지에서 발생한 마족 침공 사건은 교단이 적극적으로 나서 은폐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발생할 파장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리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들은 소수의 권력자들을 제외하곤 없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지 않음에도, 정보원을 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다.
성급한 행동으로 인해 뤼빅스로 오게 된 세 고위 마족이었다.
“동쪽이지?”
“맞아.”
“마기의 질이 높진 않았지만 양은 대단했어.”
교단에 앙심을 품은 세 고위 마족은 다음 타깃으로 정한 신전을 공격하려던 계획을 전면 중단한 채 임시로 마련한 아지트에 모여 있었다.
“검은 탑의 용도를 드디어 알아냈다는 반증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대규모 마기의 출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세 고위 마족이 가진 가장 큰 의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처럼 마기를 감추고 활동하는 게 아닐까?”
“갑자기?”
바레모스의 반문에 톨로레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대답은 레이레아에게서 나왔다.
“학살자와 조우한 건 아닐까? 여긴 놈의 세계잖아.”
학살자에 대해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허튼소리라며 일축하겠지만 학살자가 마계에서 자행한 일들이 있다 보니 바라모스는 이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학살자, 아니 어스가 없었다면 저들은 마족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일삼은 교단을 향해 지금과 같은 소극적인 방식의 테러가 아닌 전면전을 선포했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괴물 같은 놈이 나와서는.”
“그보다 어스 테리우스란 그 인간이 학살자인지 이참에 시험해보는 건 어떨까?”
“네가 할래?”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지. 우리가 구출한 애들에게 맡기면 되지 않겠어? 학살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간들은 별 볼 일 없잖아.”
톨로레스의 제안에 바레모스와 레이레아는 흥미가 동한 듯 혀로 입술을 적셨다.
“난 톨로레스의 생각이 나쁘지 않다고 봐.”
레이레아가 찬성하자 톨로레스의 어깨가 커졌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를 보았기에 바레모스 역시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사실, 바레모스 역시 괴물 마법사로 알려진 어스라는 인간이 진정 학살자인지 아닌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찬성하지.”
글리시아 남작 영지에서 벌어진 마족 침공 사건의 불똥이 테리우스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 * *
뤼빅스 내 이종족 노예와 혼혈의 미답지(실리시아)로의 이동을 어스에게 요구받은 교단은 이에 분노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린 결정은 테리우스에 대한 경제적 봉쇄 조치였다.
그러나 이 봉쇄는 헤롯 추기경의 집무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장됐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마족의 침공이 가까웠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런 마족들을 파리 잡듯 단숨에 처리한 어스의 가공할 능력에 분노조절이 저절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뤼빅스의 진정한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교단의 입을 알아서 막아버린 어스는 헥터 왕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침착해, 침착하라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볍게 다듬은 어스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민들에게 높은 문턱을 자랑하는 식당인지라 종업원들의 교육은 귀족만큼이나 잘 되어 있었다.
“예약하셨습니까?”
“루리아 글리시아란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을 겁니다.”
글리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루리아는 한동안 고민한 끝에 어스에게 마법 통신을 보냈다.
가문과 고향이 그로 인해 지켜졌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어스 역시 처음엔 감사만 받을 생각이었다.
결코 만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게 그만 약속을 잡아버렸다.
두근두근.
종업원을 따라 걷던 어스는 한발 옆으로 물러선 종업원이 가리킨 문을 보자 심장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스는 종업원이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 있었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뗀 건 루리아였다.
“앉아.”
“고마워.”
“들었어. 현자가 되었다고.”
“별거 아냐.”
어색한 침묵이 사라지고 대화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자 그와 함께 긴장감도 점차 사그라졌다.
떨리던 심장도 언제 그랬냐는 듯 물결 한 점 없는 매끈한 호수처럼 변했다.
밤잠 설친 일이 무색하게.
이야기 도중 음식이 나왔다.
서민 가정이 두 달을 벌어야 할 액수가 테이블 위에 세팅됐다.
“마족이라고 들었어.”
글리시아에 발생한 사건은 대륙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을 거대한 사건이었지만 그 사건에 대해 아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교단이 소문을 철저하게 통제했기 때문이다.
3왕자를 도운 공로로 왕실 근위대에 이름을 올린 루리아였지만 교단이 나서 통제한 정보를 접하기엔 부족한 지위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를 아는 건 그곳이 자신의 본가이자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의 고향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몰랐을 것이다.
처음엔 어색했던 두 사람의 자리는 곧 부드러워졌다.
연인이던 시절에 비해 달콤함은 사라졌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있었던 자질구레한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마르지 않는 샘이 없듯 그들의 이야기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잘 지내니 다행이야.”
“너도.”
어스와 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보자는 기약 역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꺼내지 않았다.
식당 입구에서 어스는 돌아선 루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딱히 섭섭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루리아네.’
그런 전 여자 친구에게 어울리는 전 남자 친구가 되기 위해 어스도 걸음을 옮겼다.
앞만 보고 씩씩하게.
루리아가 멈춰 서서 뒤돌아섰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 전 남자 친구의 모습에 루리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나직하게 내뱉고서.
오랜만에 온 헥터 왕국의 왕도는 여전히 인파로 붐볐다.
내전이 발생한 지 1년도 안 된 것치곤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어스는 이왕 온 김에 맛집들을 찾아다녔다.
각 식당에서 대량의 음식을 주문한 뒤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찾았다.
비었던 공간 주머니가 가득 차 인벤토리를 하나둘 채웠다.
그렇게 채우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골목길로 들어선 어스는 워프 게이트를 열었다.
그 안으로 발을 들이기 직전이었다.
마법 통신구에 반응이 온 것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를 살핀 어스의 눈과 입이 동그래졌다.
-마족을 생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