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이종족에 대한 교단의 입장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줄곧 일관적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고집에 제동을 건 인물이 바로 어스였다.
미답지 내에서 발생하여 확산한 오염토, 이 오염토에 위험을 느낀 교단은 아도니스 침공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려고까지 했다.
뤼빅스와 아도니스 사이에 놓인 바다라는 천혜의 변수까지 감수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어스가 오염토의 발생 원인을 제거하였기에 최악의 수는 봉인했다.
아무튼 대륙 간 전쟁, 제2차 종족 전쟁의 발생을 막은 공로로 어스는 교단으로부터 지금의 실리시아 전역과 앞서 5가지 조건을 수락받았다.
면죄부, 테리우스 영지 한정 불가침조약, 교단이 보유한 텔레포트 마법진 자유 사용, 테리우스 영지 한정 이종족 자유 인정, 영지 개발에 필요한 재정 지원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이 다섯 가지 요구 사항을 받았을 때 교단은 몹시 분개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양을 넘어 아도니스를 침공하는 건 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조건 중 하나인 테리우스 영지 한정 이종족 자유 인정도 이종족 노예의 테리우스 유입을 막으면 그뿐이라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뤼빅스의 이종족 노예와 혼혈 모두 미답지로 보내 달라고 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추기경님.”
베로니카 단장의 보고를 받은 헤롯 추기경은 매우 언짢았다.
헤롯이 보통의 추기경이면 모를까 그는 교단과 교단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과격파인 성전단의 당대 수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찌 점잖은 인물일까.
하지만 대륙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기에 내부적인 요인보단 일단 외부적인 요인의 제거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키지 않아도 어스의 요구 조건을 수용했다.
그를 대체할 대안이 있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센힐턴 시 사건은 그의 협조를 굳이 받지 않더라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자원과 시간, 그리고 피해를 감수할 각오만 있으면 된다.
자신만 각오하면.
“오만하고 무례하군. 신의 뜻을 받드는 교단을 농락하려는 의도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과한 요구를…”
뒷말은 잇기조차 힘들었던지 헤롯 추기경은 말을 삼켰다.
말은 삼켰으나 헤롯 추기경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굳센 투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번은 앞서 벌어진 오염토 사건과 다르다고 생각하네. 그땐 그자가 필요한 존재였으나 지금은 아니네.”
센힐턴 시를 공격한 마족들의 실력은 8서클과 그랜드 소드 마스터다.
설사 어스 테리우스가 마족들의 추격에 성공하더라도 결국 놈들을 처단하는 일은 교단이 맡을 수밖에 없다.
대륙 유일의 8서클 현자라곤 하나 마족들은 어스와 동급의 실력자니까.
물론 그의 협조를 받으면 좀 더 쉽게 놈들을 제거할 순 있겠지만 이를 감수하면 그뿐이다.
반면 어스 테리우스의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면 장차 교단에 씻을 수 없는 흉터로 남게 될 것이다.
“하면?”
“그를 배제한다. 또한, 이참에 그의 파문을 공론화할 생각이네.”
파문은 신도로서의 자격을 빼앗는 일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적인 매장을 의미한다.
사회적인 지위와 재산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귀족, 아니 왕족도 두려워하는 일이다.
베로니카 단장은 크게 당황했다.
“그는 8서클 현자입니다. 마법사들이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마법사 역시 신도네 물론 불만이 없지 않겠지만 드러내놓고 반발할 순 없어. 그리고 공론화만 할 뿐 파문까진 오랜 시간이 걸릴 걸세. 그전에 개심하겠지.”
“압박용이군요.”
“그럼에도 끝까지 개심하지 않는다면 그땐 압박으로 끝나지 않을 걸세.”
헤롯 추기경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이면에 깔린 결심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단단했다.
“뜻대로 하소서.”
베로니카 단장은 헤롯 추기경의 뜻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무실로 한 인형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무례한 일이었지만 그 무례를 탓하기엔 상대가 쏟아낸 말이 충격적이라 나무랄 수 없었다.
“추기경님, 필리스 왕국 카움 시 신전이 공격받았다는 전언입니다.”
“이번에도 마족이냐?”
“예.”
헤롯 추기경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약과에 불과했다.
곧이어 또 한 인형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 마족 군이 침공했습니다. 그 수가 일천에 달한다고 합니다.”
연이은 급보였다.
전자든 후자든 둘 다 막중한.
* * *
에스터 추기경 실종 이후 그녀의 모든 재산을 은밀히 빼돌려 테리우스로 내려와 생활하던 레이몬드와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던 어스는 마법 통신구의 울림에 술잔을 내려놓고 이를 확인했다.
그 내용은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하던 그의 얼굴에 찬물을 날렸다.
“무슨 일이 터졌나?”
“영주관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급한 일이 터졌나 보군. 난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일보게.”
“다음에 마저 이야기하죠.”
레이몬드에게 실리시아로의 이주를 제안할 겸 겸사겸사 가진 자리였지만 정작 본론은 꺼내지도 못한 어스는 곧장 영주관으로 이동했다.
집무실 테라스에 발을 딛자마자 푸리엘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글리시아에 마족이 침공했다니, 정말이야?”
“던전이 사라진 자리에서 1천에 이르는 마족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마족 놈들이 드디어 검은 탑의 비밀을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
시간문제긴 했지만 이처럼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첫 침공지가 전 여자 친구의 본가일 것이라곤 더더욱.
“그게 언제였지?”
“20분 전입니다.”
교단에 뒤처질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뤼빅스에서 암약한 연합의 정보조직도 꽤나 촘촘하다.
그렇다고 헥터 왕국에서 변방으로 취급되는 글리시아 남작 영지까지 정보원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20분 전의 일이 알려진 건 글리시아 남작 영지와 어스와의 관계를 고려한 연합에서 그곳에 요원을 배치해둔 결과물이었다.
물론 어스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그의 입장을 고려한 연합의 배려였다는 것을.
이미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의 본가라곤 하지만 그래도 한때 정을 주었던 곳이라 어스는 이 일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
물론 루리아와 잘 해볼 생각은 이미 그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다녀올게.”
어스가 등을 돌렸다.
그 방향은 지하 밀실로 향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이에 푸리엘은 그가 너무 놀라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루리아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푸리엘은 그리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아니, 오산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워프 게이트가 어스가 바라보는 정면에 생성되었기 때문이었다.
푸리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입이 다물어지기 전 어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 * *
글리시아 영지에 대한 이미지가 남아 있었기에 단숨에 워프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었던 어스는 단숨에 글리시아로 넘어왔다.
평화롭던 변방 영지의 주도 곳곳에서 검은 연기와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족과 주민이 뒤섞인 상황이라 광역 스킬로 놈들을 제거할 수 없었다.
“아, 안 돼!”
“으악!”
“루, 룬이시여!”
개나 소나 소드 마스터인 세계의 주민들이 바로 마족이다.
뤼빅스에선 전략 병기로 여겨지는 그런 존재가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마족이 한 둘도 아니고 무려 일천이었으니, 당연히 일방적인 학살일 수밖에 없었다.
어스는 상공으로 블링크를 시전했다.
영주관을 둘러싼 담장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있었다.
마족을 상대로 저항하는 기사와 병사들이 보였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그들은 시체가 됐다.
상공에서 살핀 결과 아직 본채는 멀쩡했다.
본채 주변엔 다수의 병사와 그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루리아의 아버지 오스완드 남작도 보였다.
멀리서 보았지만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외곽의 병력을 모조리 처리한 마족들이 본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스완드 남작을 비롯한 전원이 바짝 긴장했다.
어스는 양측이 격돌, 아니 일방적인 학살이 펼쳐지기 전에 개입했다.
최대까지 강화한 일루젼을 뿌렸다.
마족들을 향해.
4만 5천이 넘는 지력 스탯의 영향까지 더해진 +12강의 일루젼은 단숨에 마족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환영에 사로잡힌 놈들은 독 안에 빠진 생쥐처럼 제 자리에서 허우적거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스킬이 엉뚱한 방향으로 튈 수 있다 보니 단일 대상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그건 바로 매직 애로우였다.
그의 매직 애로우는 유도 장치라도 장착된 듯 마족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다.
환영에 사로잡힌 상태라 마족들은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픽픽 쓰러졌다.
-하급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
.
-중급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
.
뤼빅스에서 들린 알람이어서 그런 것인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마족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이를 목격한 오스완드 남작 이하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놀란 그들의 앞으로 어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스를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예상 밖의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어, 어스 백작?”
“오랜만입니다. 남작님.”
“그대가 어찌 여기에?”
“우연은 아니고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습니다.”
루리아는 남작 영지에 없었다.
3왕자 클리프 헥터의 편에서 내전에 참가한 루리아는 3왕자가 왕위에 오르자 그 공을 인정받아 지금은 왕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오스완드 남작은 크게 감동했다.
헤어진 전 여자 친구의 본가를 위해 단숨에 달려온 그의 의리에.
“남작님은 이곳에 계십시오. 마족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루리아 본인은 아니지만 그 아버지를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루리아와 잘 됐으면 가족이 되었을 사람이었기에.
“염치없지만 부탁하겠네.”
마족들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오스완드 남작은 전적으로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스는 몸을 움직이기 전 시쿠를 소환하여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지시했다.
사람들이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어스는 곧장 움직였다.
지금은 과거의 인연이라곤 하나 이 영지에서 쌓은 추억도 적지 않다보니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일루젼으로 마족들의 움직임을 막고, 매지 애로우로 놈들의 육신을 박살 냈다.
고작 4서클인 일루젼으로 마족을 잡아두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스킬은 특별했기에 상급 마족도 그의 일루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더해 1서클 스킬도 감당하지 못하고 스틱스로 향했다.
‘짜증 나네.’
블링크, 일루젼, 매직 애로우로 무장한 어스의 손에 마족들은 맥을 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경이로운 업적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이 상황이 불만이었다.
한방에 정리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살육에 미쳐 날뛰던 마족들도 그제야 어스를 알아차렸다.
“인간 마법사다!”
놈들이 칼끝을 주민이 아닌 어스를 겨냥하며 달려들었다.
놈들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기에 어스는 매직 애로우 다발을 날렸다.
일루젼에 당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공격은 적중하지 않았다.
피하고 쳐내며 접근했다.
하지만 어스가 시전한 매직 애로우의 물량이 적지 않다 보니 곧 허점이 드러났고, 그 허점에 매직 애로우가 박히자 놈들도 곧 비명과 함께 무너졌다.
그래봐야 고작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일천이란 수가 이제 보니 적은 수가 아니었구나.’
백만이 넘는 마족을 학살하고 다니던 시절엔 일천이란 수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지만 여기선 일일이 찾아가서 제거하려니 보통 많은 수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어스가 전투에 개입하면서 주민들의 희생은 줄어들었다.
반면 그를 향한 마족들의 시선이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났다.
“다 덤벼!”
어스는 놈들을 도발했다.
도발은 성공적으로 먹혔다.
덕분에 놈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어스의 명성이 또 한 번 드높아지는 사건이었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사건이다.
“크아아아아-!”
“매, 매직 애로우 따위에 당하다니!”
“마, 말도 안 돼!”
“하, 학살자? 저놈은 학살자다!”
뒤늦게 어스의 정체를 알아차린 마족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어스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놈들이 주도 밖으로 도주하자 처치는 더 쉬워졌다.
지겨운 매직 애로우를 졸업(?)한 어스는 그때부터 다중 공격 스킬을 퍼부었다.
‘체인 라이트닝! 파이어 볼! 파이어 버스터!’
살려고 주도를 벗어난 행위가 오히려 마족들 입장에선 최악의 한 수가 되었다.
“아, 안 돼에에에에-!”
곧 최후에 남은 마족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것으로 글리시아 영지를 뒤덮은 칙칙한 죽음의 암운이 모조리 걷혔다.
알람 역시.
한데 웬걸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불쑥 알람이 들렸다.
-경고! 찬란했던 타락자가 몸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시스템이 전하는 두 번째 경고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