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이동할 장소에 대한 이미지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문을 열어 왕래할 수 있다는 설명을 보고서 구입한 워프 게이트.
9서클이니 차원 이동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나 막상 구입하고 보니 스킬 설명과 달리 뤼빅스와 마계를 잇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최대까지 강화하면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문을 열 수 있다.
‘제길, 저 서클 스킬도 아니고 9서클이라고, 9서클.’
100퍼센트의 확률이 적용되는 1에서 3강까지의 강화 비용은 스킬 가격의 ×2가 필요하다.
사실 여기까진 문제없다.
확률 100퍼센트니까.
문제는 다음부터다.
“흠흠, 역부족이군요.”
도리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촉각을 곤두세웠던 그들의 기대는 이내 무너졌다.
다들 염치를 모르지 않았기에 자신의 감정을 입 밖으로 터트리지 않았다.
묵직한 신음과 깊은 한숨 그리고 짙은 고뇌만이 그들에게서 흘러나왔다.
어떤 이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사실 어스 입장에선 저들이 어찌 되든 관계가 없었다.
도리아 하우든과 인연이 있다지만 그녀에게 진 빚은 그녀가 하우든 백작 영지의 영주가 되는 걸 도와준 것으로 충분히 갚았다.
아니, 오히려 이번엔 그녀가 어스에게 큰 빚을 졌다.
목숨이다.
“저와 제 수하들은 어스 백작께 이미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희를 위해 노력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법이다.
특히, 객사라면 더욱더 심하다.
그럼에도 도리아는 자신의 두려움을 누르며 어스의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검은 돌을 구하면 저들을 보낼 수 있을까?’
그 검은 돌이 마족에게만 적용될 수 있으니 언급하기가 애매하다.
어디 그뿐이랴.
설사 그 돌이 인간에게도 적용되더라도 그들이 향하는 곳은 뤼빅스가 아닌 던전이다.
하급 던전이면 던전 보스를 처치하여 뤼빅스로 돌아갈 수 있겠지만 고위 던전이면 마계에서 죽나 던전에서 죽나 뤼빅스엔 자신의 뼈 한 조각도 남길 수 없게 된다.
“혹시, 어스 백작은 뤼빅스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까?”
자신들과 달리 여유가 넘치는 어스의 태도에 도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저희의 편지를 하우든 영지에 전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입은 편지라고 하였지만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를 보니 유서로 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잃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닙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그 방법을 쓰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 정말이신가요?”
“말씀드렸듯이 시간이 필요해요.”
“문제는 저희가 그때까지 살아 있느냐가 관건이 되겠군요.”
“그 문제는 제가 조금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시쿠의 능력이면 저들을 지키는 건 문제 없을 것이다.
당장 녀석을 소환할 순 없다.
내일쯤 가능하다.
아이템을 흡수한 시쿠는 어떻게 변할까?
기존의 능력이 발전할지 아님 새로운 능력이 생길지는 내일이 돼야 알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지에 이른 9서클 대현자의 말이었기에 도리아는 그제야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편지는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일단 쉬세요.”
어스는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천막과 모포를 내주었다.
그러곤 캠프 주변으로 매직 애로우를 배치하여 안전을 보장했다.
개개인이 소드 마스터 급 능력자인 마족이 어찌 죽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은 긴장이 풀린 듯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그들을 일별한 어스는 시선을 하늘을 향해 던졌다.
‘과연 저들만의 문제일까?’
* * *
다음 날 어스는 도리아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뒤 혼자 이동했다.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버틸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근방이 아닌 장거리도 물색 대상이다.
그렇게 해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냈다.
크지 않은 폭포를 품고 있는 산속이었다.
폭포에서 4, 50미터 떨어진 곳엔 적당한 높이의 동굴도 있었다.
성인 네댓 명이 지내면 꽉 차는 면적이었다.
-펫이 아이템 습득을 마쳤습니다.
-펫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때마침 잘됐네.’
어스는 곧장 시쿠를 소환했다.
이번엔 어떤 힘을 얻었을까 기대하며.
“주인님!”
외관은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작고 귀엽다.
“이번엔 어떤 힘이야?”
“시쿠 땅 넓게 흔들 수 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능력이었지만 그건 어스의 기준에서지 일반적인 기준에서 시쿠의 땅 흔들기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했다.
‘범위가 늘었나 보네.’
다음엔 펫과 철옹성 둘 모두에게 적용되는 아이템을 구한다면 무조건 철옹성에 주기로 마음먹은 어스는 시쿠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시쿠, 주인님과 헤어져 있는 건 슬프지만 사람들 보호한다.”
“그전에 동굴 안쪽에 공간을 만들어줬으면 해.”
땅을 파고 땅속에 공간을 만드는 일에 있어 시쿠를 따를 자는 없다.
어스의 명령을 받은 시쿠는 순식간에 50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면적의 공간을 만들었다.
도리아와 그 일행이 머물기엔 충분한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식수는 폭포가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식량인가?’
전문지식이 없이 숲이나 산에서 채취하는 걸 먹었다간 사소하게는 복통에서 심하면 죽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랬기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되도록 손을 대지 않는 게 좋다.
먹지 않더라도 만지는 것만으로도 해가 되는 식물이나 과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곳은 뤼빅스가 아닌 마계다.
그러니 먹어도 될 것 같은 과일을 발견하더라도 조심해야 한다.
‘이참에 공간 주머니 좀 비워야겠네.’
금전적으로 넉넉해진 이후 어스는 미식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전에 쟁여 놓은 음식(여행자용 식품)은 일절 손대지 않았다.
그땐 무슨 생각에 그런 음식을 쟁여 놓았는지 가끔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깝고 다른 이들에게 주자니 다른 먹을 것도 많은 이들에겐 음식 고문이 될 것 같아 그냥 방치했다.
그런데 그걸 이참에 처분할 수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맛도 없고, 영양적인 측면에선 부족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먹고 탈이 나는 음식은 아니니까.
‘몇 달은 버틸 수 있겠군.’
역시 그때의 자신은 머리에 나사가 빠진 게 분명하다.
이딴 걸 왜 이리 많이 쟁여뒀을까.
어스는 워프 게이트를 시전했다.
도리아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조금의 문제도 없었다.
어스는 자신이 생성한 워프 게이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텔레포트 마법진은 위화감이 존재하지만 워프 게이트는 그런 게 없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데 위화감이 없듯.
* * *
도리아와 그 일행은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어스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 모습이 흡사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 자식을 연상시켰다.
다수의 익스퍼트, 마법사에 매직 스틱으로 무장한 노련한 병사들이라 보기 힘든 모습이다.
그러나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이 동네는 개나 소나 소드 마스터인데다, 앞서 본 마물도 일행이 전력으로 맞서지 않으면 상대할 수 없는 것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타원형의 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지?”
“마계의 던전인가?”
사람들은 황급히 워프 게이트에서 멀어졌다.
마른 침을 삼키며 워프 게이트를 바라보던 그들의 표정과 눈에 실린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 안에서 어스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어, 어스 백작님 저건 무엇인가요?”
“워프 게이틉니다.”
마법과 연관된 단어였기에 질문자인 도리아보다 마법사들이 먼저 반응했다.
“오! 전설의 워프 게이트라니! 역시, 대현자님!”
“메테오에 이어 워프 게이트까지! 지금 당장 죽어… 흠흠. 영광이다.”
어스를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눈빛이 몇 배나 더 끈적끈적해졌다.
이번에 뤼빅스로 돌아가면 마법사들을 만나야 하는데 거기서도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내심 상상하는 어스였다.
“여러분들이 머물 장소를 찾았으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세요.”
워프 게이트를 체험할 기회를 얻은 마법사들은 놀이기구를 타기 전의 어린아이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게이트를 살피며 미적거리는 마법사들의 행동을 참지 못한 기사들의 재촉이 쏟아졌다.
그제야 자신들의 실태를 깨달은 마법사들이 헛기침을 연발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어스가 들어간 뒤 워프 게이트는 처음 나타났을 때 그러했듯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텔레포트 마법진처럼 한 자리에 고정시킬 수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 거둔 것이다.
워프 게이트를 경험한 사람들은 잔뜩 들떠 있었다.
어스는 주위를 환기시킨 뒤 동굴을 소개했다.
사람 두 명이 어깨를 딱 붙이고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동굴 입구에 실망한 사람들은 내부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좁은 입구와 다른 내부의 방대한 규모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다.
동굴 벽면과 천장이 자연동굴에선 볼 수 없는 매끄러움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스캔 마법을 시전하여 마법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이 현상을 마법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
어스의 눈빛, 말, 몸짓 하나하나도 귀중한 자료처럼 생각하던 마법사들에게 있어 이는 어쩜 당연한 행동이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마법사들의 호들갑을 이미 충분히 경험했기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도리아 백작님.”
“예, 어스 백작님.”
“방법을 찾을 동안 여기서 생활하면 될 겁니다. 가까이 폭포가 있어 식수는 거기서 해결하시고, 이건 보존식품입니다. 몇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놀라지 마세요. 몇 달 뒤에 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결연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자신들의 주군이자 영주인 도리아의 모습을 본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 말하였다.
어스가 저들의 도움을 받을 일은 평생 가도 없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후 어스는 그들에게 시쿠를 소개했다.
‘사람들에게 시쿠를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시쿠는 그에겐 히든카드다.
아니, 히든카드였었다.
“소, 소환도 하십니까?”
“대체 못 하시는 건 뭡니까?”
“대현자께서 부리시는 소환수 치곤… 음.”
“보기보다 엄청 셉니다. 여러분이 안심하고 목숨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니까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 마세요.”
“시, 실례 했습니다. 대현자시여!”
“용서하소서. 대현자시여! 저희들이 무례했습니다. 대현자께서 부리시는 소환수인데.”
하우든 영지의 마법사들은 어스에게 전향이라도 한 듯 그를 도리아보다 더 높게 받들었다.
도리아 입장에선 기분 나쁜 일이다.
기사들 입장에서도 탐탁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도리아와 기사들 모두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어스는 이들과 잠시 함께 한 뒤 곧 생존 캠프를 나섰다.
언제까지 저들을 위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블링크!’
야간에 메테오와 안면을 익혔으니, 이젠 주간의 메테오와 안면을 익힐 생각이다.
과연 주간의 메테오는 어떤 모습일지.
* * *
인간 학살자에 의해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 밴드로스 시에 출현한 신비의 검은 탑.
천뇌의 탑은 물론 마계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두 옛 밴드로스 시에 모여 검은 탑 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검은 탑에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면 상대가 모두 증발했다.
가까이 접근할 수 없으니 조사도 자연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검은 탑을 멀리서 구경만 한 건 아니다.
범죄자와 마물, 가축, 야생 동물, 그리고 곤충까지 탑에 접근시켰다.
그 결과 오직 마족만이 사라지는 걸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앞서 입수한 검은 돌에도 같은 실험을 했다.
결과는 동일했다.
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검은 탐과 검은 돌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는 점이다.
“키빌 님.”
검은 탑을 응시하던 키빌의 뒤로 그의 보좌관이 다가왔다.
굳은 얼굴을 하고서.
“무슨 일이냐?”
“어젯밤 자린 시가 증발했습니다.”
깨드득.
“이번에도 학살자의 소행이냐?”
“그것이… 조금 이상합니다. 지금껏 학살자가 남긴 흔적과 양상이 다릅니다.”
“달라? 무엇이 말이더냐?”
“자린 시의 자리에 거대 크레바스뿐이라고 합니다.”
“운석?”
“흔적으로 보아 그렇습니다.”
확실히 인간 학살자의 소행이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학살자에 이어 출현한 저 검은 탑의 비밀도 풀지 못한 상황에서 자연재해까지 더해지자 키빌은 마계가 지독한 저주에 걸린 게 아닌가 싶었다.
“안타깝지만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다.”
“혹시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죄송합니다.”
“받아.”
샤쿠오는 몸을 돌려서 마법 통신을 수신했다.
샤쿠오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슨 일이지?”
“메, 메테오 마법이 출현한 것 같습니다.”
궁극의 파괴 마법이라 알려진 메테오는 마계에선 금지된 마법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 메테오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은 마계 전체를 뒤져도 열 명이 채 안 된다.
그리고 그 열 명이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
그들 모두 하나의 왕국을 다스리는 마왕이기 때문이다.
혹시 알려지지 않은 9서클 마족이 탄생한 것인가?
격을 뛰어넘은?
그런데 그런 존재가 굳이 양민을 학살할 이유가 있나 싶다.
마계의 전통을 생각하면 차라리 마왕에게 도전하여 그 자리를 강탈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키빌의 뇌리로 한 존재가 뇌전 스치듯 스쳤다.
그 존재는 바로.
‘설마…인간 학살자!’
확인이 필요한 순간이다.
“현장으로 간다. 즉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