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황혼을 만난 보라색 하늘은 뤼빅스에선 생각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색으로 물들었다.
언제 봐도 신비로운 장면이라 어스는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상으로 공간 이동했다.
사방이 탁 트인 적당한 높이의 언덕이 있어 노을이 연출한 장관을 관람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이건 언제 봐도 예술이네.’
지평선 너머로 침몰하는 태양은 자신의 잔재를 모조리 거둬들였다.
마른 모래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이 사라지는 듯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잠시 한눈을 팔면 장관을 놓치는 건 일도 아니다.
여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하늘은 어둠이 장악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이 몇 분을 유지하다 토하듯 일시에 별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왕과 왕비가 그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거대한 달과 곱상하고 반질반질한 작은 달.
5분 남짓한 시간에 낮과 밤의 교대 작업이 끝이 났다.
뤼빅스도 그렇지만 마계의 밤은 더더욱 위험하다.
크고 위험한 맹수와 기괴한 생김새만큼이나 괴이한 능력을 가진 마물이 날뛰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마족들도 밤엔 도시나 마을 밖에선 활동하지 않았다.
뤼빅스의 인간들이 어두운 숲이나 산에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메테오를 날려야 하는데 벌써 어둠이 내리다니.
“그렇다고 마을을 상대로 메테오는 아니지.”
몇 개의 마을을 발견하고도 그냥 지나친 이유였다.
용 잡는 칼로 병아리 목을 치는 건 메테오를 민망하게 만드는 일일 테니까.
오늘은 왜 이리 어둠이 일찍 찾아온 건지.
겨울엔 해가 일찍 떨어진다지만 마계는 겨울이 아니다.
아니, 이곳은.
‘여긴 봄쯤 되나?’
여기서 남쪽으로 백 수십 킬로미터 혹은 동쪽으로 그만큼 더 이동하다 보면 겨울인 지역이 있다.
남쪽에 위치한 곳은 겨울과 여름이 붙어 있다.
한 걸음만 앞으로 가면 겨울, 반대로 걸으면 여름을 만끽할 수 있다.
동쪽 지역은 가을과 겨울이 붙어 있다.
처음 이를 봤을 땐 엄청 신기해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메테오를 시험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블링크를 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과 달리 많이 이동하진 않은 듯했다.
생각대로라면 지금쯤 도시가 눈앞에 있어야 한다.
눈앞의 평원이 아니라.
‘중간에 방향을 잘못 잡은 건가?’
야근해야 할 판이다.
도시를 찾아 이동하려고 다시 블링크를 시전하려던 그때였다.
언덕 아래의 땅이 쩍쩍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마물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참고로 마물이라고 덩치가 큰 건 아니다.
고블린만 한 크기의 마물도 존재한다.
놈들은 정수리에 눈과 입이 달려 있는 마물이다.
낮에는 땅속에서 잠을 자다 밤만 되면 기어 나오는 놈들로, 어스가 처음 저놈들을 봤을 땐 언데드인 줄 알았다.
놈들은 감각이 예민했다.
코도 없고, 귀도 없으면서도 먹잇감을 잘도 찾는다.
놈들은 언덕 위에 있는 어스를 먹잇감으로 판단한 듯 바퀴벌레를 닮은 네 개의 다리를 흡사 노 젓듯 움직이며 언덕을 올랐다.
“눈은 장식인가?”
어스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날렸다.
사실 이 자리에 어스가 아닌 다른 이가 서 있었다면 두려움에 얼어붙고 말았을 것이다.
놈들의 수가 백에 달했으니까.
눈이 있어도 감히 9서클 대현자를 알아보지 못한 무식한 마물들을 향해 매직 애로우를 날렸다.
5강의 매직 애로우다.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살상력을 가진 이 스킬은 스킬 공격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지력 스탯으로 인해 더는 매직 애로우라 불릴 수 없는 가공할 파괴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력 스탯 2만!
일반적인 매직 애로우에게선 절대 볼 수 없는 관통이 가능하다.
수천 발의 매직 애로우가 일제히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마물을 처치했습니다. 1코인을 습득합니다.
-마물을 처치했습니다. 1코인을 습득합니다.
‘고블린보다 못한 놈들. 쳇.’
뤼빅스의 고블린도 2코인인데.
참고로 덩치가 황소만 한 마물도 끽해야 5코인이다.
이러니 마물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건방진 마물을 죽음으로 죄를 물은 어스는 밤하늘을 건너뛰며 이동했다.
그렇게 20분을 이동했을까?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난 방향치가 아니었어.’
도시의 규모는 앞서 초토화시킨 도시와 비슷한 규모였다.
드디어 메테오를 영접할 시간이다.
두근두근.
심장이 오두방정을 떤다.
‘메테오 스트라……?’
속으로 시동어를 뇌까리던 어스는 이를 완성하지 못했다.
도시를 향해 접근하는 작은 불빛들 때문이었다.
불빛이 한두 개였다면 무시하고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완성했겠지만 그 수가 제법 많았다.
더는 보너스 업적 포인트를 기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코인과 경험치는 여전하기에 저들이 도시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블링크를 끊임없이 사용 중이다.
이전이면 마나량을 신경 써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환골탈태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달라진 마나량 때문이다.
여기에 매 시간 회복되는 마나 수치는 또 어떤가.
8이나 9서클 같은 스킬을 남발하지 않는 이상 마나 회복 물약에 손댈 일은 평생 없다고 봐야 한다.
가진 자의 아량? 아니, 알뜰하고 검소한 정신을 발휘하던 어스는 행렬을 지켜보았다.
별생각 없이.
그런데 웬걸? 귀에 익은 욕설을 들었다.
통역 마법에 관한 물품도 없고, 통역 마법이 걸리거나 시전한 상태도 아닌데 귀에 착착 감긴다.
아니, 알아들을 수 있다.
‘사람이다!’
그것도 뤼빅스 언어를 사용하는.
어스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즉시 아래로 향했다.
* * *
마족이 휘두르는 채찍이 여자의 등을 후려치고 있었다.
여자의 등짝은 몇 번의 채찍질에 의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마족의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다.
맞고 있는 여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어스가 들은 욕설과 비명은 채찍질을 당하는 여자가 아닌 여자의 동료들이 애가 타서 내지른 소리였다.
“그러다 죽어! 죽는다고 이 개새끼들아! 그만해!”
“제발 그만하라고!”
사람들이 소리쳤지만 마족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마족의 동료들 역시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
신음조차 삼키며 웅크린 여자의 모습에 희열이라도 느끼는 듯 다들 두 눈이 시뻘게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거친 숨을 내쉬는 마족들의 머리통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한두 명이 아니다.
다수의 마족들이 머리나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일제히 쓰러졌다.
-하급 마족을 처치했습니다. 8,000코인을 습득합니다.
.
.
.
.
마족들은 이 상황에 크게 당황했다.
쓰러진 동료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마족들은 즉시 무기를 빼들곤 사주경계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런 자들도 곧 앞서 죽은 마족들처럼 죽었다.
쉰 둘.
무려 쉰두 명의 마족이 모두 매직 애로우에 당해 명을 달리했다.
마족의 포로로 잡혀 끌려온 사람들은 이에 크게 놀랐다.
그중 마법사가 선호하는 로브 차림의 이들의 반응이 가장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들이 떼로 덤벼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던 마족들이 매직 애로우가 분명한 공격에 짚단 쓰러지듯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매직 애로우라니!”
“몸뚱이가 바위보다 더 단단한 놈들인데.”
매질에 웅크린 여자도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두 개의 달이 그런 여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여,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영주님!”
기습 공격에 마족들이 죽자 이에 놀라 얼을 타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여자의 안위를 물었다.
영주라 불린 여자는 수하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흘러나온 건 경악성이었다.
그녀를 경악하게 만든 인물은 어스였다.
놀라긴 어스도 매한가지였다.
“도리아 영애?”
“어스 백작?”
“아니, 영애가 왜 여기서 나옵니까?”
오히려 도리아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는 백작은…… 윽!”
“가만있어요. 많이 다쳤잖아요.”
인벤토리에서 치료 물약을 꺼내려던 어스는 ‘아차’ 하고는 곧장 치료 스킬을 시전했다.
린다의 팔을 재생해 준 이후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레스토레이션이 도리아 하우든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료해 버렸다.
레스토레이션을 목격한 마법사들의 입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함지박만큼 커졌다.
어스는 자신을 향한 마법사들의 뜨거운 눈길에 픽 웃었다.
뿌듯함에.
마침 앞에 쓰러진 마족의 옆구리에 열쇠꾸러미가 보여 도리라 하우든의 사지를 얽어맨 족쇄를 풀었다.
그녀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던 족쇄에서 자유를 찾았다.
다들 험한 일을 겪었는지 백작 영지의 정예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몰골은 엉망이었다.
다행히 포로로 잡은 사람들의 물자는 마침 마차에 보관되어 있었기에 거지 꼴을 면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멀리서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한 무리의 군세가 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시와 가까운 거리에서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이를 본 도시의 군대가 출동한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도리아는 물론 사람들은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마족은 이 땅에 없다.
개나 소나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경지가 소드 마스터이고, 대마법사다.
상대가 한 명이라도 버거울 상황에 오십이 넘는 마족을 상대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어스는 저들에게 파이어 볼을 잔뜩 먹여준 뒤 도심 상공으로 이동했다.
‘관객들이 있으니 조금 떨리네.’
예상과 달리 늦었지만 결국 어스는 마족 도시에 돌멩이(?)를 던졌다.
대기를 떨어 울리는 웅장한 소리와 함께 불타는 운석이 도심을 강타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장 때려 버렸다.
쿠아아아앙-!
도시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거대한 크레바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충격의 여파로 일대에 지진이 발생했다.
대지가 파도처럼 움직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는지 쩍쩍 갈라졌다.
강력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지진이 진정되기까지 30분이 걸렸다.
30분 후 본 인근은 지형지물이 바뀌어 있었다.
한때 도시였던 크레바스는 헬파이어에 버금갈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메테오가 남긴 또 다른 후폭풍이었다.
메테오를 구경한 마법사들, 아니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8, 8서클이라며! 8서클이 메테오라니!”
“9서클이야! 그는 대현자야!”
“우린 대체 뭘 본 거지?”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살아생전 9서클 마법을 봤으니까.”
* * *
땅거죽이 찢기고 뒤집어진 현장에서 서쪽으로 1시간가량 이동한 사람들은 그제야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어스 백작님은 어찌 여기에 계신 겁니까?”
“여긴 어떻게?”
“아, 먼저 이야기하세요.”
“아뇨, 먼저 하세요.”
어스가 건네준 수통을 만지작거리던 도리아는 하루 전 일을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영지에 던전이 생성되었습니다. 3띠 던전이라 크게 위험할 건 없었죠. 가벼운 마음으로 신병들까지 대동하고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바로 여기더군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마족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놈은 우리와 함께 여기 떨어졌더군요. 나중에 알았습니다.”
검은 돌을 만진 마족은 던전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던전 보스를 처치하면 뤼빅스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다시 던전으로 들어가 던전 보스를 죽이면 그땐 마계로 돌아갈 수 있다.
‘내 생각이 맞구나.’
어스는 자신의 추측을 도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검증 받았다.
도리아를 비롯한 하우든 영지의 사람들은 운이 너무 없었다.
“어스 백작은 어찌 이곳에 계신 겁니까? 혹시, 저희와 같은 경우인가요?”
“아뇨.”
뤼빅스로 돌아갈 방법이 막막했던 도리아를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은 부정하는 그의 말에 희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정작 어스는 그럴 수 없었다.
차원 이동은 혼자만 되는 것이기에.
아니, 펫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저들은 펫이 아니다.
다시 말해 어스도 저들을 뤼빅스로 데려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니구나. 그런데 워프 게이트가 과연 차원 너머까지 연결될까?’
어차피 구입할 생각이었기에 이참에 저들을 상대로 실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말씀은?”
“하우든 영애. 아, 하우든 백작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이동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아직 낙담하진 마세요. 지금은 쉬세요.”
어스는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뒤 스킬 상점을 열었다.
세 번째 9서클 스킬을 구입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