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시쿠가 마족을 잡은 던전 안으로 어스는 몸을 날렸다.
시쿠에겐 앞서 의념을 보내 현장에서 이탈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의 명령대로 시쿠는 그 자리에서 그를 기다렸다.
“주인님!”
“마족은 그놈 하나였어?”
“마족 하나다.”
“대가린 뭐였어?”
“소머리였다. 주인님.”
“그외 다른 놈은 없었고?”
“그놈 하나였다. 건방지게 시쿠를 깔봐서 살짝 때렸는데 죽었다. 시쿠 잘못했다.”
애를 어떻게 팼기에 살짝 때렸는데 죽는단 말인가?
어차피 죽일 놈이긴 하지만.
‘그놈도 보나 마나 검은 돌을 주웠겠지. 땅거지도 아니고.’
일단 마족이 하나라는 점은 안심이다.
만에 하나 단체로 넘어왔다면…….
‘우려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좋아할 일 아닌가?’
다른 사람들에겐 재앙일지 몰라도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 놈들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영약이니 말이다.
“주인님, 걱정 있어?”
“걱정?”
“응, 주인님 얼굴에 주름 잡혔다. 시쿠가 주인님 주름 펴준다.”
“어떻…… 윽! 얼굴을 왜 핥아?”
“시쿠 침은 약침이다.”
녀석이 또 자신의 얼굴을 핥으려 하자 어스는 냉큼 녀석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그 마음이 가상하여 머리 한번 쓰다듬었다.
“약침은 너나 써. 이 주인님은 약이 있으니까. 아무튼 고맙다 걱정해줘서. 하하.”
“시쿠는 항상 주인님 편이다.”
“그럼, 그럼. 우리 시쿠 덕분에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참, 시쿠.”
“응. 주인님.”
“우리 조만간 크게 싸워야 할 일이 생길 거야.”
“시쿠는 강하다. 주인님은 시쿠만 믿으면 된다.”
“오냐. 참, 상대가 누군지 보러 갈래?”
시쿠에게도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군지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어스는 제안했고, 시쿠는 즉시 수락했다.
“그럼 보스 정리하러 가자.”
어스는 시쿠와 함께 보스 사냥에 나섰다.
저 멀리 보스가 보였다.
무리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놈을 향해 어스는 헬파이어를 날려 보냈다.
헬파이어는 그 자체로 이미 강한 스킬이다.
그런데 그런 스킬이 3,200이란 수치의 지력 스탯의 보조까지 받자 더더욱 강해졌다.
쾅-!
살상반경 30미터에 든 놈들은 순삭(?) 당하였고, 100미터에 이르는 위험반경에 든 놈들도 순삭에 가까운 속도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고작 스킬 한방에 이 모든 일들이 벌어졌다.
‘마족 애들에 비하면 확실히 약해.’
살상반경의 경우 마족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반면 위험반경에 위치한 마족들의 경우 제법 많은 수가 살아남았었다.
그러나 여기선 그런 놈들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스를 처치했다는 알람이 끝날 무렵 주인을 잃은 던전이 일그러지며 어스와 시쿠를 밖으로 토해냈다.
어스는 시쿠를 품에 안고 어린 위그드라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단숨에 어린 위그드라실 앞에 도착했다.
엘프들이 반응했지만 곧 그를 알아보곤 조용히 물러섰다.
“저 녀석이 나흘 후 우리가 싸울 녀석이야.”
“…….”
“시쿠?”
“…….”
“너 왜 그래?”
“주, 주인님. 나는 저분과 싸울 수 없다. 아니, 싸워선 안 된다. 싸우면 우리 다 죽는다.”
이번엔 어스가 할 말을 잃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덩치는 작아도 용기는 태산도 내려다보는 녀석이.’
시쿠의 반응은 어스에게 적잖은 충격을 선사했다.
“긴장할 필요 없어. 위그드라실 본체와 싸우는 게 아니라 녀석이 품고 있는 증오라는 감정과 싸우는 거야.”
“주인님, 그게 더 위험하다. 주인님은 안 보여? 무시무시한 눈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시쿠는…… 꿀꺽, 무섭다.”
어스는 앞가슴이 뜨뜻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싶어 살펴보니 시쿠가 자신의 옷에 실례했다.
시쿠를 충격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무시무시한 눈, 혹시 위그드라실의 증오일까?
‘시쿠 왜 그러니, 네가 그러면 나도 무서워지려 하잖아!’
이거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아닐지 꺼림칙함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시쿠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기에 어스는 즉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도 한참을 시쿠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작은 몸을 벌벌 떨었다.
그 모습에 어스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영성을 잃은 위그드라실은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증오로 채워져 있습니다.
-위그드라실 계승자 칭호를 어린 위그드라실에게 양도하면 증오를 몰아내고 영성의 씨앗을 심어 줄 수 있습니다.
-영성을 잃은 어린 위그드라실에게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양도하시겠습니까?
개인적인 손해를 감수하면 대륙은 평화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 손해가 워낙 막심하여 섣불리 승낙할 수 없었다.
-어린 위그드라실을 펫으로 길들일 수 있습니다.
-어린 위그드라실을 펫으로 길들이기 위해선 ‘위그드라실의 증오’와 싸워야 합니다.
-위그드라실의 증오와 싸우시겠습니까?
그때, 이 알림이 떴었다.
자신의 마음을 감안한 듯하여 몹시 기뻤는데,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시쿠의 태도를 보니 자신의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일이 아닌가라는 불길한 생각을 떨치려야 떨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안 돼, 시쿠 내게 용기를 줘! 네가 그러면 안 된다고!’
이런 어스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시쿠는 여전히 움츠려 있었다.
* * *
“어스 님?”
“로엘 왔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잠자리가 불편하신가요?”
“아니, 그런데 로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당연하죠. 종족의 오랜 염원이 나흘, 아니 이제 사흘 후면 이뤄지는데 당연히 기쁘죠.”
로엘에게도 그리고 베로니카 단장에게도 다 된 일 인양 큰소리 뻥뻥 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한다면 둘 모두에게 실없는 놈이 될 것이다.
‘둘에게 실망을 주면 뤼빅스에도, 아도니스에서도 고개 들고 살지 못할 텐데.’
차라리 두 눈 질끈 감고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포기할까?
그리한다면 자신은 큰 손해를 보겠지만 엘프는 정상적인 위그드라실을 찾아서 좋고, 교단은 종족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어져 두 발 뻗고 전처럼 살면 되니까.
그러면 자신 빼고 다 해피엔딩이다.
‘개뿔 내가 성자도 아니고 왜 나만…….’
두루두루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지.
머리에서 다시 종이 울린다.
커다란 종이.
지끈.
“어스 님?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아냐, 생각할 게 많아서 잠을 설쳤어. 그 때문인지 두통이 있을 뿐이야. 조금 쉬면 괜찮아질 테니까 가서 일 봐.”
“두통에 좋은 약이 있으니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 엘프야 내가 그런 약이 없어 마음고생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 생각, 부디 생각 좀 하게 나가주는 게 날 위하는 일이라고!
속에선 천불이 끓어올랐지만 영문도 모르는 로엘에게 이를 쏟아낼 만큼 인성이 바닥이 아닌 관계로 어스는 나오지 않는 미소를 억지로 끌어내 로엘을 안심시켰다.
“정말 약한 두통이야. 굳이 약까지 쓸 필요가 없으니까 나가봐도 돼. 필요하면 그땐 이야기할게.”
“그럼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그래,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사실 로엘하고도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 이야기의 전제 조건은 위그드라실의 영성을 찾아 준 후에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지금은 그에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시쿠를 귀환시키고 만 하루쯤 되어가고 있었기에 어스는 시쿠를 소환했다.
어제 같은 모습이면 어쩔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주인님!”
시쿠는 어스에게 실망을 주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가 죽어 있었다.
그런 녀석이 안쓰러웠던 어스는 녀석의 반질반질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침은 약침.
내 손은 약손.
어스의 약손이 통한 듯 시쿠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어제…… 많이 무서웠지?”
어제의 일을 떠올린 것인지 시쿠의 작은 몸뚱이가 다시 부르르 떨렸다.
저기서 더 발동이 걸리면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말을 얼버무리려 할 때 시쿠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무섭지만 나는 주인님과 함께한다. 시쿠, 무시무시한 분과 싸울 수 있다. 살아도 죽어도 나는 주인님과 함께하겠다.”
“꼭 싸워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어. 평화적인 방법이 있단다.”
제 주인을 위해 용기를 냈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거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시쿠는 이 말에 몹시 기뻐했다.
본인은 아닌 척 노력했지만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쓰려면 시쿠만큼이나 소중한 것을 내줘야 해.”
“시쿠만큼 소중한 것?”
기뻐하던 녀석은 금세 풀이 죽었다.
팔짱을 끼고 싶은지 낑낑거리던 녀석은 신체 구조상 이를 실패한 뒤 양손을 잡았다.
“어? 응.”
“시쿠는 주인님께 얼마만큼 소중해?”
“하늘만큼 땅만큼.”
“음, 그렇다면 시쿠는 주인님과 함께 싸우겠다. 주인님이 슬퍼하는 것보단 무서운 분과 싸우는 게 낫다.”
시쿠의 태도를 보면 녀석은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체 어린 위그드라실이 품고 있는 증오가 얼마나 대단하면 저럴까 싶다.
정말 평화적인 방법만이 두루두루 행복한 길이란 말인가?
‘어차피 다 잃는 것도 아니고 칭호 달랑 하나만 잃는 것인데 만인을 위해 손해를 감수해 버릴까?’
베로니카 단장과 약속한 시간까지 앞으로 3일, 교단이 자신의 요청을 거부했으면 싶다.
그럼 그 핑계로 로엘에게 한 약속도 모른 척할 수 있을 텐데.
“시쿠, 기분도 꿀꿀한데 우리 사냥이나 나가자.”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교단의 답을 들을 시간이 왔다.
어스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캠프로 향했다.
나흘 만에 찾은 교단의 캠프는 그새 뒤로 이동한 상태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성기사 둘이 어스를 안내했다.
그곳은 전에 보지 못한 대형 막사였다.
대형 막사 주변은 성기사들뿐만 아니라 복장이 제각각인 기사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뭐지?’
의아했지만 두렵진 않았다.
캠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덤벼들어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대형 막사로 들어선 어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칼렉 왕세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실내엔 칼렉 왕세자를 비롯해 십 수 명의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커다란 원탁에 앉아 있었다.
칼렉과 짧게 눈을 맞춘 어스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어스가 앉은 자리 맞은편엔 교황을 대신하여 교단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헤롯 추기경이 앉아 있었다.
모두를 대표하여 헤롯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정중하게.
“나는 교단을 대표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저분들은 각 왕국을 대표한 분들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듣고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어스는 천천히 그들의 면면을 살핀 뒤 헤롯 추기경을 보았다.
“제 요청이 심각했나 보군요.”
“다섯 왕국이 들어서도 널찍할 광활한 땅이 달린 문제인데 심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어스 백작.”
과연 저들은 어떤 대답을 갖고 왔을까?
이 순간은 모든 걸 잊고 직면한 상황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경청하겠습니다. 추기경님.”
“덩컨 대협곡 너머의 미답지를 어스 백작의 땅으로 인정하겠습니다. 그 땅에선 백작이 무엇을 하건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교단 역시.”
역시나 저들도 대양이란 거대한 장벽 너머 아도니스와의 전쟁은 원치 않았던 게 맞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쉽게 허락할 수 없었을 테니까.
“무엇을 해도 말입니까?”
“교단과 열 개 왕국 대표들이 서명한 마법 계약서입니다.”
헤롯 추기경이 언급한 굵직한 내용 이외에 조항 몇 개가 붙어 있었다.
조항 역시 문제 될 건 없었다.
“간단명료하네요.”
“백작이 거기에 서명하면 계약은 정식으로 발동될 겁니다. 대신 오염토 문제는 확실하게 처리해야 할 겁니다.”
어스는 펜을 들었다.
펜은 든 순간 어스는 이미 마음먹었다.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녀석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슥슥.
그렇게 인류를 대표하는 세력들과 개인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계약이 성사되었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저들 입장에선 개인에게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고, 어스 입장에선 소중한 칭호를 넘기기로 결정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3일 이내로 오염토 문제는 해결될 겁니다.”
저들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렉 왕세자와는 개인적으로 대화하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지금은 어려워 보였다.
칼렉 왕세자도 그와 같은 마음인지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