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영지가 벌린 사업이 많다 보니 영주 대리를 맡고 있는 푸리엘의 업무량도 그만큼 가중되었다.
덕분에 그녀에게 야근은 하루 일과였다.
뿌드득.
사무실에서 저녁을 해결한 뒤 이를 소화시킬 시간도 없이 서류 작업을 하던 푸리엘의 일과도 이제 끝이 났다.
기지개를 켜자 이전이라면 전혀 있을 수 없는 관절의 비명은 오늘이 처음이 아님에도 늘 그녀에겐 신선하기만 했다.
‘야근하는 엘프 전사라니…… 으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푸리엘은 어이가 없는지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이 많이 힘든가 봐?”
“당연히…… 엇? 여, 영주님?”
“오랜만이야. 안 본 사이에 다이어트라도 한 거야? 살이 쪽 빠졌네.”
어스는 푸리엘을 지나쳐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매일 딱딱한 의자에 앉다 소파에 앉으니 호강이 낯선지 순간 몸이 움찔거렸다.
몸의 이러한 반응에 어스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다지만 재산이면 재산, 명예면 명예, 권력이면 권력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이뤄낸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급 우울해졌다.
언제쯤 자신은 자신이 쌓은 모든 걸 편안하게 누리며 살 수 있을는지.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내 집에 내가 오는데 일이 있어야 오는 건 아니지. 물론, 농담이야. 로엘에게서 이야기 들었지?”
“들었습니다. 위그드라실 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푸리엘의 두 눈에선 열기가 감돌았다.
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엘프들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지주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향에 남겨진 동족이 인간의 노예로 지내는 걸 보면서도 복수는커녕 인간들의 눈치를 보며 동족을 구출하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 그 어찌 원통하고 분통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어째서 저들은 얌전히 있는 건지 정말 모르겠군.’
이종족들이 얌전한 건 과거의 맹약 때문이었지만 어스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에 이 점이 의아했다.
만약 자신이 이종족이었다면 뤼빅스를 침략해도 벌써 했을 텐데.
“로엘이 그렇게 말했어?”
가능성을 엿본 것이지 확신은 아직 이르다.
물론 미답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황만 보면 엘프 입장에선 충분히 의심할 소지가 다분하지만 아직 물증은 없다.
그러니 단정하긴 이르다.
이는 로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푸리엘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심증을 굳힌 게 아닐까 싶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동원된 인력을 보고 그리 판단했습니다.”
이종족 노예를 뤼빅스에서 탈출시키는 데 있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종족이 엘프다.
그런 엘프들이 지금 비밀 임무를 중단하고 현재 미답지에 집결한 상태다.
푸리엘은 이를 통해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어스는 미답지에서 활동 중인 로엘과 엘프들을 떠올렸다.
혼신을 다하는 모습을.
“위그드라실에 관해선 나 같은 인간보단 너희 엘프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리 생각하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엘프들의 오랜 숙원이 이뤄지길 바랄게.”
“감사합니다. 어스 님.”
“천만에.”
“그런데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셀레네 왕국 북부가 마지노선인 건 들어서 알고 있지?”
“설마, 축복이 북부를 뒤덮었나요?”
엘프들은 미답지에서 일어난 일을 축복이라고 불렀다.
하긴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들에겐 축복인 상황은 맞다.
잡초 하나 자라기 힘든 동토의 땅에서 뭍 생명들이 빠르게 자라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아냐. 그렇지만 늦어도 내년 초면 그렇게 될 것 같아. 하지만 꼭 내년이라고 단정할 순 없어. 그래서 왔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교단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잖아.”
“아예 오신 건가요?”
“그럴 순 없지. 그랬다간 난리 날 텐데.”
“그럼?”
“말했다시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경우를 대비해서 나도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짬을 내서 온 거야. 그러니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
“대책이라면 어떤?”
“비밀.”
엘프를 믿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특히 시쿠는.
다행히 푸리엘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성벽이 거의 완성 수준이던데 고생 많았어. 전에 들으니까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때?”
“설치는 끝났습니다. 위치는 저택 뒤쪽 숲속입니다.”
“숲이라……. 그럼, 한 번에 몇 명 정도 이동이 가능해?”
“백 명입니다. 전송 위치는 해안가 거점이이고요.”
전송할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에 필요한 자원은 몇 곱이 된다.
다행히 자원 수급은 이종족 연합이 맡고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스의 병사들 모두 이종족이기에 연합의 목적과도 부합했으니 굳이 재물을 보탤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노예는 곧 재산이니까.
그러나 유사시 그들을 통해 가족과 지인의 안전을 맡겨야 하는 입장이라 이 점은 언급할 수 없었다.
영지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 받은 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모님과 여동생을 보고 가려고 했지만 밤도 늦은데다 모두 잠자리에 들었기에 그냥 가기로 했다.
“참, 레이몬드의 안전도 신경 써 줘. 모든 걸 내게 맡긴 사람이니까.”
“농장 안에 있는 한 레이몬드 씨의 안전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갈 길이 멀어서 이만 가볼게. 일이 생기면 즉시 연락해.”
오랜만에 영지로 내려왔지만 혹시 모를 세작들의 눈을 의식한 어스는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내 집에 오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다니.’
씁쓸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를 불평 할 수도 없었다.
“다음에 봐.”
“몸조심하십시오.”
“너도 쉬엄쉬엄해. 다이어트가 목적이 아니라면.”
* * *
은밀히 영지에 다녀온 어스는 다음 날 블링크를 사용하여 미답지로 이동했다.
정찰이 아닌 사냥을 위해서다.
베로니카 단장은 여전히 그가 정찰중이라 알고 있다.
오염토 지역에 진입하고 계속 블링크를 사용하던 어스는 전날 봐두었던 던전 앞에 내려섰다.
여기까지 오느라 철옹성에 내장된 전체 마나 중 3분의 1을 소모했다.
어스는 자신이 가진 마나 2천을 모두 철옹성에 불어 넣었다.
마나 수치는 단숨에 ‘0’이 되었지만 그에겐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어스는 주저하지 않고 던전으로 진입했다.
던전 내부에선 오염토의 영향을 받지 않아 마나 회복 물약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꿀꺽꿀꺽.
거푸 마나 회복 물약을 마신 어스는 자신과 철옹성의 마나를 가득 채웠다.
곧 그는 블링크를 시전하여 정글 상공을 누비고 다녔다.
‘원숭이 몬스터네.’
몬스터를 발견한 어스는 지상을 향해 파이어 버스터를 날렸다.
8서클 스킬 헬파이어를 구입하며 파이어 버스터의 위력은 전보다 20퍼센트 증가된 상태였다.
쾅쾅쾅쾅-!
지상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그림자 원숭이를 처치했습니다. 40코인을 습득합니다.
.
.
.
.
알람이 미친 듯 울었다.
파이어 버스터의 위력에 어스는 만족감을 느꼈다.
이번엔 파이어 볼을 날렸다.
일방적인 파이어 볼보다 몇 배 강력한 위력의 파이어 볼.
파이어 버스터와 파이어 볼 두 스킬만으로 거대 정글 전체를 태워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사냥해서 언제 1억 코인을 모을지.’
사냥 속도는 질풍과 견주어 손색이 없었지만 목표액이 워낙 거액이다 보니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게 쭉쭉 이동하며 무차별 폭격을 일삼던 어스의 눈에 그림자 원숭이 보스가 눈에 딱 띄었다.
자신의 영역이 외부의 침입자로 인해 불타고 있는 것에 극도로 분노한 보스는 어스를 보자마자 몸을 날렸다.
저 등급 던전도 아닌 무려 5띠 던전 보스라 놈의 도약력은 대단히 뛰어났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접근하는 그림자 원숭이 보스, 녀석을 기다리는 건 어스의 발차기였다.
“찌그러져 있어. 헬파이어 날려야 하니까.”
날아온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한 보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 놈을 향해 어스는 처음으로 헬파이어를 시전했다.
파이어볼의 열 배쯤 되는 크기의 불덩이가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그 속도는 콜 라이트닝과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역시, 8서클.
헬파이어는 광역 스킬이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범위를 순식간에 살라 먹었다.
거대한 나무, 바위, 그리고 늪지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피해 범위에 들어간 몬스터 역시.
단 한방에 보스는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던전 하나를 살라먹은 어스는 던전이 와해되면서 현세로 튕겨 나갔다.
현세로 튕기기 전 마나 회복 포션을 열심히 마신 덕분에 자기 자신의 마나와 철옹성의 마나 모두 가득 채워둔 상태다.
‘3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끝났네.’
그 시간에 5띠 등급 던전을 작살 냈으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괴물 마법사보다 더한 이명이 그에게 주어지지 않을까 싶다.
다음 던전을 향해 곧장 이동했다.
이번엔 현존 최고 등급의 6띠 던전이 타깃이다.
던전이 위치한 곳까지 빠르게 이동하던 어스는 엘프들을 목격했다.
엘프들도 그를 보곤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스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준 뒤 다시 이동했다.
거푸 세 번의 블링크를 시전하던 어스는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이동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방향은 앞서 보았던 엘프들이 있는 곳이었다.
곧 던전에 들어갈 것이기에 어스는 스킬을 난사했다.
지상은 이내 불바다가 되었다.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2코인을 습득합니다.
.
.
.
-홉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20코인을 습득합니다.
엘프들이 가진 힘만으로 놈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만 단 한 푼의 코인도 아쉬운 입장이라 모조리 정리해버렸다.
‘포인트 몽땅 정신 스탯에 분배해버릴까?’
좀 전 5띠 던전 보스를 사냥하고 보너스 업적 포인트를 받은 어스의 미 분배 업적 포인트는 현재 125였다.
이를 모두 정신 스탯에 분배한다면 마나 총량을 625 증가시킬 수 있다.
기존 마나가 2천이니 총 2,625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현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기에.
불길에 휩싸인 지상을 일별한 어스는 이동을 계속했다.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6개의 띠를 가진 던전 앞에 내려선 어스는 지체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하며 소모한 마나를 모두 마나 회복 물약으로 채운 어스는 블링크를 시전했다.
눈에 띄는 몬스터는 죄다 태워 죽이거나, 번개로 튀겨 죽이며 보스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이동한 끝에 어스는 던전 보스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크아아아아아-!”
보스가 그의 눈앞에서 죽었다.
웬 시커먼 구멍 속에서 툭 튀어나온 뿔 달린 맹수 머리를 한 존재의 검에 사지가 잘리고 마지막에 목이 잘렸다.
던전 보스를 처치한 존재가 흰자위 하나 없는 까만 눈으로 어스를 보았다.
‘마, 마족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족을 다시 보게 된 어스는 몹시 반가웠다.
그러나 놈을 향해 손을 쓸 수 없었다.
방금 죽은 보스가 죽으면서 던전이 와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스는 마족과 함께 밖으로 튕겨 나갔다.
나가자마자 마족의 검이 어스를 노리고 쇄도했다.
‘빌어먹을 놈이!’
힘과 민첩 스탯이 빈곤하던 시절이었다면 눈뜨고 목이 베였겠지만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달라졌다.
공격이 닿기 전 어스는 즉시 무형 방벽을 시전했다.
번개를 방불케 했던 마족의 기습 공격은 무형 방벽에 막혀 뒤로 튕겨나갔다.
공격 실패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마족의 표정에 의문이 스쳤다.
이도 잠시 마족은 흥분하여 더 강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 힘과 기세가 실로 흉험하여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무형 방벽 앞에선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자신의 모든 공격이 막히자 마족도 그제야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듯 잠시 주춤거렸다.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놈의 하는 작태를 지켜보던 어스는 무형 방벽을 해제한 뒤 곧장 마족을 향해 달려들었다.
빠악!
놈의 면상에 주먹 한 방.
충격에 앞뒤로 휘청거리는 놈의 뿔을 잡고 싸대기를 냅다 갈겼다.
쫙쫙쫙-!
눈앞에서 6띠 던전 보스를 처치하던 모습을 보았기에 앞서 처리한 마족보다 더 센가 싶었지만 차이는 크지 않았다.
강렬한 싸대기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진 놈의 명치에 주먹을 깊게 꽂아 넣은 뒤 쓰러진 놈의 등짝의 날개를 잡아 우악스럽게 뜯어 버렸다.
쫘악-!
“크어어어어어-!”
지금까지 들은 것보다 더 큰 비명이 마족의 입에서 터졌다.
마족을 완전히 무력화시킨 어스는 인벤토리에서 오우거의 힘줄로 만든 밧줄을 꺼내 놈을 칭칭 묶었다.
머리 빼고.
꿈틀거리는 녀석의 뒤통수를 냅다 걷어차 기절시킨 어스는 그제야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지가 마족이면 마족이지 어디서 감히 스틸이야. 망할 놈.”
베로니카 단장이 저 마족을 보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절로 기대되는 어스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기서 캠프까지 갈 길이 멀다 보니 걱정이 앞섰다.
블링크로 타인을 대동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지에 있는 시쿠를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고.
어스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바람의 정령이 그를 향해 접근했다.
근방에 있던 엘프가 무슨 일인가 싶어 보낸 정령이었다.
‘엘프의 도움을 받으면 되겠구나!’
방법을 찾아낸 어스는 환하게 웃으며 정령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