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드디어 로엘이 테리우스로 왔다.
그와의 만남은 진작 이뤄졌어야 했으나 그간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이제야 얼굴을 마주볼 수 있었다.
어스를 본 로엘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로엘 씨?”
“아! 죄송합니다.”
로엘의 표정은 여전히 나사 하나가 빠진 모습이었다.
이 모습에 어스 역시 꽤 당황하고 있었다.
곧 정신을 수습한 로엘과 함께 어스는 지하 비밀 시설 한쪽으로 이동했다.
텔레포트 마법진이 자리하고 있는 이 지하실의 존재는 단 네 명만이 알고 있었다.
어스, 푸리엘, 로엘 그리고 텔레포트 마법진의 관리자 피구엘이 바로 그 네 명이다.
시쿠의 힘을 빌려 만든 지하실은 처음 모습과 달리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조치하여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밤낮을 알 수 없다는 단점을 빼면 나쁘지 않은 환경이다.
로엘의 마음을 짐작한 것인지 푸리엘이 시원한 물을 내왔다.
로엘은 남김없이 물을 마셨다.
탁.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후 로엘이 입을 열었다.
“어스 님.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어스는 직감했다. 로엘이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질문의 내용이 매우 심상치 않을 것이란 걸.
“일단 해보세요.”
들어 보고 결정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대답했다.
로엘은 이에 실망의 기색을 내비쳤다.
어스는 이를 외면했다.
가족 간에도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제아무리 한배를 탄 입장이라도 어찌 미주알고주알 밝힌단 말인가.
그래도 그간 그에게 받은 도움이 적지 않다 보니 이왕이면 최대한 이를 고려할 생각이다.
딱 꼬집어 질문 하나만 하겠다고 저리 진지하게 나오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위그드라실을 아십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기다린 어스는 로엘의 질문에 허탈해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예상한 질문과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추스른 어스는 오히려 역으로 질문했다.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전에 나부터 묻죠.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거죠? 오해하진 마세요. 그 말을 먼저 들어야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군요.”
“보다시피 자숙 중이라 시간은 많아요.”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푸리엘을 내보내지 않고 로엘이 입을 열었다.
이로 보아 저들 사이에선 딱히 큰 비밀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어스는 편안한 마음으로 로엘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다.
로엘의 설명은 길었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위그드라실과 엘프를 연결하는 통로, 즉 로엘은 당대 제사장이다.
그러나 오래전 인류에 의해 위그드라실이 불태워진 이후 그 제사장의 자리는 무의미해졌다.
소통해야 할 주체가 사라졌으니까.
이번엔 어스가 물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듣고 보니 엘프들이 내게 취한 행동의 변화는 칭호를 활성화한 이후 급격하게 달라졌어. 그렇다면 정말 내 칭호와 엘프의 신 위그드라실과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건가?’
시시각각 변하는 어스의 표정, 로엘은 잠시도 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관찰했다.
이를 통해 로엘은 확신했다.
그가 위그드라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로엘 씨.”
“예.”
“내게 위그드라실을 아냐고 물었죠? 사실대로 말하면 몰라요. 내가 아는 건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내용 일부, 그리고 당신과 푸리엘에게 들은 내용이 전붑니다.”
로엘의 얼굴에서 실망과 의혹이 교차했다.
로엘이 입을 떼기 전 어스는 마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아예 관계가 없는 건 아닙니다.”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계승자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자신은 살아 있는 위그드라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나무가 될 수 있겠는가.
그것도 한 종족이 오랫동안 신으로 모시던 신령한 나무라니 이는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아예 관계가 없다고 하기엔 칭호의 명칭이 너무 노골적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자연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로엘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어스 님이 가는 길에 엘프의 오랜 숙원이 이뤄질 수 있겠군요.”
어스는 자신의 말보다 로엘의 말이 더 애매모호하게 들렸지만 로엘이나 푸리엘의 표정을 보니 지금까지 이어온 관계보다 이후 이어질 관계가 더 끈끈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늬만 친구에서 진짜 친구가 된 느낌이랄까.
‘연합의 다른 종족은 몰라도 최소 엘프에겐 뒤통수 맞을 일은 없겠군.’
아니, 연합 자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연합의 중추는 엘프로 구성되어 져 있으니까.
든든하다, 몹시.
그리고 이런 든든함을 선물한 저들이 바라는 숙원이 자신을 통해 이뤄질 여지가 있다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자,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냅시다. 로엘 씨, 혹시 미답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왜?”
“오늘 베로니카 단장이 미답지에서 구한 흙을 들고 왔습니다. 놀랍게도 그 흙은 체내 마나를 갉아 먹더군요. 그리고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그게 확장 중이랍니다.”
“인간의 오만이 저지른 인과응보의 실체가 드디어 현실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군요.”
로엘이 장탄식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소리죠?”
“인간들이 말하는 미답지는 우리 엘프에겐 성지였습니다.”
“혹시, 위그드라실이 있던 장소였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위그드라실은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 신목입니다. 그러한 신목이 사라졌으니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는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다만 오염된 토양은 의외군요. 던전이라 불리는 괴현상이 위그드라실을 불태운 인간에 대한 인과응보라 생각했는데.”
로엘 입장에선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던전이 모습을 드러낸 대륙은 이종족이 떠난 뤼빅스에 국한된 문제였으니까.
“꽤 흥미로군요. 그럼 교단의 부탁을 들어주실 생각이십니까?”
“가격이 맞으면 해주려고요.”
“마나를 갉아먹는다면 마법사이신 어스 님에겐 해로운 땅이지 않습니까?”
“전 괜찮더라고요. 물론 미답지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로엘은 이 일에 큰 흥미를 드러냈다.
“허락하시기 전에 저희가 따로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 *
베로니카 단장은 신전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여 교황청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어스가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선 교황의 허락이 필요해서다.
그러나 교황청으로 돌아간 베로니카 단장은 교황이 아닌 헤롯 추기경의 집무실로 곧장 향했다.
교단 제일검이자, 교황청 근위대 단장이란 직책이 무색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아딜레스 교황은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고, 그런 교황을 대신하여 헤롯 추기경이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헤롯에 대한 교단 내 정치적인 압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갔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베로니카 단장.”
“어스 백작 본인의 말에 따르면 괜찮다더군요.”
“놀랍군요. 그는 순수한 인간일 텐데 어찌. 그렇다면 미답지 조사에 있어 적격이군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하던가요?”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대가?”
“예.”
“불쾌하지만 미답지에서 발생한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들어줘야겠군요. 그래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였습니까?”
“우리가 먼저 제시하라더군요.”
베로니카 단장의 말에 헤롯 추기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오염된 토양이 뤼빅스 전체를 뒤덮을 경우 인류는 그 순간 무장해제가 될 터이기 때문이다.
던전에 이은 오염토까지.
어느 하나 절망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원하는 건 모두 준다고 하세요.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상황이 아닙니다.”
* * *
-블러드 하피를 처치했습니다. 40코인을 습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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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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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블러드 하피 던전인가?’
시쿠의 태생을 생각하면 블러드 하피는 그림의 빵이어야 한다.
그러나 비행이 가능해진 시쿠에게 있어 이젠 하늘을 나는 몬스터 역시 더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시쿠를 만난 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경험치와 코인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니 이보다 더 편한 성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것에 비할 순 없어도 그래도 무시 못 할 속도였다.
‘차원 이동을 해보고 싶은데.’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활성화하기 전부터 어스는 차원 이동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장 이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30일 재사용 시간 때문이다.
대체 언제쯤 마음 편히 차원 이동을 쓸 수 있을지.
늦은 점심을 먹고 연무장으로 이동하려던 그때 시에라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영주님, 베로니카 단장이 왔습니다.”
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선제시 요구를 받고 돌아간 게 바로 어제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상의할 시간을 고려하면 최소 며칠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고로 조직이 비대하면 비대해질수록 결정은 더디게 내려지니까.
“어제 온 그 할망구 말이야?”
“예?”
“아, 아니다. 그럼 검문소에 있나?”
“예.”
과연 베로니카 단장은 어떤 답을 갖고 왔을까?
수련을 위해 간편한 복장을 입고 있던 어스는 즉시 환복한 뒤 블링크를 시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문소에 도착한 어스는 어제와 같은 규모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거스티는 보이지 않았다.
어스는 곧 자신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 보네요.”
“앉지.”
‘을이 갑에게 이렇게 나와도 되나?’
속으로 구시렁거렸으나 그 속이 무색하게 어스는 활짝 웃으며 냉큼 착석했다.
베로니카 단장은 그에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원하는 걸 적도록.”
“놀랍군요. 교단에서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던전으로 인해 그 난리가 났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던 교단의 태도를 생각하면 어스의 놀람은 지극히 당연했다.
‘던전보다 미답지를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건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베로니카 단장은 먼 산만 쳐다보았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베로니카 단장 입장에선 이 자리가 가시방석, 아니 지옥이리라.
‘이러면 연합보다 내가 먼저 미답지에 가겠네.’
막상 백지를 받아든 어스는 뭘 적을지 고민에 잠겼다.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스는 자신이 원하는 걸 적어나가기 시작했고, 먼 산을 바라보던 베로니카 단장은 펜촉이 굴러가는 소리에 처음엔 쳐다보지 않다가 소리가 끝날 기미가 없자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백지는 여백 하나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차 있었다.
이에 베로니카 단장은 황당함을 넘어 분노했다.
교단이 이렇게까지 양보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예의를 보이기 마련인데 상대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다.
마치 호구라도 잡은 듯 영혼까지 털어먹으려 들었다.
순간 이에 욱한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검자루를 잡았다.
물론 검은 뽑지 않았다.
당장은 필요한 사냥개였으니까.
“베로니카 단장님? 종이 더 없으세요? 종이가 모자라네요.”
그러나 이 말엔 모든 걸 내려놓은 베로니카 단장도 참을 수 없었다.
“죽고 싶나?”
베로니카는 기세에 살의를 담았다.
그것은 곧 어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생명력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전처럼 수백 단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생명력 수치가 높아질수록 외부의 충격 역시 어느 정도 상쇄한 결과였다.
‘남은 포인트 체력 스탯에 다 몰아주면 할망구의 기세도 감당할 수 있을까?’
시쿠의 노력의 결과로 현재 어스가 보유한 미분배 포인트는 48에 달했다.
물론 이 모두 시쿠가 벌어다 준 건 아니다.
아무튼 살의를 담은 베로니카의 기세에 어스는 큰맘 먹고 모조리 체력 스탯에 분배해 버렸다.
1,500이던 생명력에 240이 더해졌다.
동시에 줄어들던 생명력의 양도 크게 감소했다.
역시 당분간 생명력을 높이기 위해 체력 스탯에 포인트를 투자해야 할 듯싶었다.
‘살아서나 마법사지, 죽으면 망자일 뿐.’
“거래 안 합니까?”
여기서 아쉬운 놈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다. 그래서 어스는 당당하게 소리쳤고, 이에 베로니카 단장은 이를 악물며 기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내미는 또 다른 백지.
‘알뜰하게 써 주마.’
오기가 동한 어스는 보란 듯 글을 써내러 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펜촉이 굴러가는 그 소리는 베로니카 단장의 복장을 제대로 박박 긁었다.
깨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