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똑똑.
“영주님. 푸리엘 입니다.”
“들어와.”
테라스에 앉아 다과를 즐기고 있던 어스는 앉은 자세로 고개만 문 쪽으로 돌렸다.
대외적으로 자숙을 공표한 이후 어스의 대외 활동은 테리우스 영지 내에서만 국한되었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각국에선 솔론을 상대로 압박을 가했다.
솔론 왕국 입장에서도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지만, 어스가 교단을 핑계로 자숙을 공표했기에 솔론으로서도 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없었다.
솔론 왕국은 그러한 요구가 들어올 때마다 말을 반복했다.
교단이 움직여야 한다고.
솔론 왕국을 향한 압박은 사실 솔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교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교단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 일에 대해 침묵했다.
그렇다 보니 각 왕국은 만만한 솔론을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점심은 먹었어?”
“먹었습니다.”
“공사는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지?”
어스가 자리 잡은 농장은 성곽 도시로 가기 위한 공사가 착실하게 진행 중에 있었다.
때문에 하루에 소비되는 자재의 양과 인건비로 막대한 재정이 쓰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리우스에선 재정을 창출할 만한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영주인 어스가 영지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것도 아니었기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없습니다.”
“이주민들은 어때?”
헥터 왕국 왕도에서 발생한 두 번째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위기감이 한층 높아진 부유층들의 테리우스 영지로의 유입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간혹 외국에서 온 자들도 있었다.
이들로 인해 성곽 도시화를 추진 중인 주도만큼이나 12개 마을 역시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영주님의 단호한 태도 덕분에 병사들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은 없습니다.”
“혹시라도 내 병사들을 얕보는 녀석들이 나오면 바로 쫓아내.”
이종족을 노예로 보는 풍토는 사람들의 의식 깊은 곳까지 뿌리내렸다.
그렇다 보니 치안을 위해 활동하는 어스의 병사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토착민은 물론 이주민들까지.
물론 그 마음은 여전히 반발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대놓고 병사들을 무시하거나 욕보이려는 자들은 사라졌다.
“그리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교단에서 또 사람이 나왔어?”
“예.”
“내 땅에서 내가 뭘 하던 지들이 무슨 상관이라고.”
테리우스에서 추방된 자들은 이에 앙심을 품고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있었다.
그에 더해 일부는 테리우스 영지를 이단이라며 고발까지 했다.
이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교단에선 출석 요구서를 보내고 있었다.
어스는 이를 무시로 일관했다.
사실 이는 자멸 행위라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아직 교단에선 직접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어스와 완전히 척을 지는 건 교단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저들이 신사적으로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푸리엘은 바로 이를 우려하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왜? 이단 심판관이 와서 날 잡아가기라도 할 것 같아?”
그 말이 씨가 된 것일까?
“여, 영주님.”
시에라가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어스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조신하고 차분한 시에라가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베로니카 단장이 다수의 무장병들을 이끌고 농장 초입에 왔다고 합니다.”
“그 베로니카?”
“예, 영주님.”
“언제?”
“조나단 수문장에게서 방금 통신이 왔습니다.”
조나단 역시 시에라와 같은 혼혈이다.
다만 조나단의 반쪽 피는 엘프가 아닌 수인족이다.
그것도 근접전투에서 당해낼 종족이 없다고 알려진 호인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다.
참고로 이종족 노예의 경우 익스퍼트일지라도 작위를 수여할 수 없다.
오직 그들 사이에서만 상하를 나눌 수 있다.
“영주님?”
푸리엘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활성화한 이후 어스를 대하는 푸리엘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다.
전엔 로엘의 명령이 큰 몫을 차지했다면 지금은 푸리엘 본인이 적극적으로 그를 따랐다.
이젠 로엘의 명령, 아니 연합의 명령보다 어스의 명령을 우선시할 정도였다.
조만간 로엘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과연 로엘이 달라진 푸리엘이나 피구엘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스러웠다.
자신의 수하가 자신보다 다른 이의 명령을 더 잘 따른다면 상관 입장에선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이니까.
“할망구가 직접 왔다고 하니 문전박대할 순 없겠지?”
“교단 제일검을 그리 대했다간 지금과 달리 강경하게 돌변할 수 있을 겁니다.”
푸리엘의 충고에 어스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집에 들이는 건 내키지 않으니까 직접 나간다고 해. 그리고 영주관 주변 경계 철저히 하고.”
푸리엘에게 명령을 내린 어스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울렸다.
시쿠가 또 한 마리의 보스를 처치했다는 전언이었다.
이에 픽 웃으며 어스는 블링크를 시전했다.
할망구로 인해 가라앉은 기분이 시쿠 덕분에 다시 좋아졌다.
* * *
“어스 백작,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른 이도 아닌 베로니카 단장의 입에서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외네요. 단장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나 역시 내키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감은 접기로 했다. 그런데…… 음, 달라졌군.”
“성장기니까요. 그런데 잊으신 겁니까? 전 자숙 중인데.”
“그런 사람이 헥터 왕국의 왕도엔 무슨 일이었지?”
‘그 문제를 따지기 위해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스는 베로니카 단장의 두 눈을 직시했다.
베로니카 단장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사실 지금 베로니카는 미약하지만 기세를 쏘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기선제압용이다.
그런데 그 기세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위를 조금 높였다.
그럼에도 여전했다.
한 달 사이에 대체 저 어린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정말,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것일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뻔뻔하군.”
“욕을 하고 싶어서 온 건가요? 아님, 진짜 제 힘이 필요해서 온 건가요? 헷갈리니까 명확하게 해주세요.”
기세를 올리려던 베로니카는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곤 이를 거두어들였다.
이에 어스는 한결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베로니카 단장은 제 입술을 가볍게 깨문 뒤 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우리 사이에 선물은 아닐 것 같은데.”
콧방귀를 날린 베로니카 단장이 주머니를 풀어서 그 안의 내용물을 테이블에 쏟았다.
그것은 흙이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아무리 궁리해도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니 만져 보면 알 것이다.”
“내가 왜요?”
이런 반응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베로니카 단장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를 본 거스티는 분개했다.
“어스 백작 그대는 단장님을 욕보이려 함인가! 당장 단장님께 사죄하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어스에게 거스티는 그런 존재였다.
어스는 악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수행원 따위가 여기가 어느 자리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너의 그 행동이 오히려 베로니카 단장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가, 감히!”
“감히?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군. 베로니카 단장님과의 대화는 여기서 중단해야겠군요. 저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기 전까지 전 할 말이 없습니다.”
어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에 베로니카 단장은 기세로 그를 압박했다.
이전의 그였다면 먹혔을지 몰라도 지금의 어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베로니카 단장은 자신의 기세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간 어스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기세에 살의를 싣지 않았다곤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더욱이 마법으로 저항한 것도 아니다.
어스가 건물 밖으로 나오자 건물 안에서 들린 큰 소리에 베로니카 단장의 수행원과 테리우스 영지군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일개 영지군이 교단의 성기사를 상대로 각을 세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스의 병사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흉흉한 장내에 모습을 드러낸 어스는 양측의 팽팽한 기 싸움을 중지시켰다.
“조나단.”
“예, 영주님.”
“손님들 가실 테니 배웅해 드리세요.”
“영주님의 명을 받잡습니다.”
“잠깐 기다려라.”
베로니카 단장이 뒤따라 나왔다.
“하실 말씀이 더 있습니까?”
“거스티 경은 어스 백작에게 사죄하라.”
“다, 단장님?”
눈앞의 전개에 어스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거스티만큼이나 분개할 것이라 여겼던 베로니카 단장이 의외로 침착했기 때문이다.
‘뭐지? 좀 전 그 흙 때문인가?’
그제야 어스도 그 흙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당장은 시누이, 아니 거스티의 진심 어린 사죄였다.
베로니카 단장의 압박에 거스티는 피 눈물을 흘리며 어스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이를 지켜보는 성기사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베로니카 단장의 냉랭한 시선에 가로막혀 표출 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나가면 칼부림 나겠군.’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다.
어스는 예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이번엔 거스티를 배제했다.
“만져 보게.”
이번엔 순순히 흙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오염된 토양입니다.
-오염된 토양의 영향으로 체내 마나가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오염된 토양에 저항합니다.
-저항에 성공하여 마나 감소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마, 맙소사 이거 대체 뭐야?’
흙에서 손을 뗀 어스는 베로니카 단장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두 눈은 깊은 의심을 담고 있었다.
교단에서 개발한 무기가 아닐까 싶어.
하지만 그 생각은 찰나에 그쳤다.
교단에서 만든 무기라면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을 테니까.
아님, 협박용인가?
‘마나를 다루는 자들에게 이 흙은 독이다.’
마나 감소 속도 유무는 생명력이 완벽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이러한 흙이 세상을 뒤덮는다면 이 세상에서 마나를 다루는 자들은 씨가 말라 버릴 것이다.
“혹시, 침습을 뿌리쳤나?”
“이게 뭐죠?”
“먼저 물었네.”
“마나 감소는 없었습니다.”
그의 말에 베로니카 단장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다행이군.”
“다행?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저 흙은 미답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과거 뤼빅스 대륙은 이종족과 인류가 함께 살던 대륙이었다.
그러한 대륙은 종족 전쟁을 거치면서 이종족이 빠진 인류의 대륙으로서 지금껏 내려오고 있었다.
이후 인류의 영역은 무서운 속도로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여 과거 이종족이 살았던 지역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뤼빅스 대륙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인류가 터를 내리고 사는 비율은 10분의 4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이것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종족 전쟁 이전 인류가 차지하던 땅은 고작 10분의 1에도 못 미쳤으니까.
참고로 미답지는 과거 이종족도 외면했던 땅을 의미한다.
“미답지면?”
“동토 너머의 땅.”
“설마 교단이 거기 진출한 겁니까?”
“미답지에 진출한 건 아니다. 우연히 입수하게 된 것이지.”
“그런데 이걸 왜 제게 보여주는 겁니까? 용도에 따라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텐데.”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인간은 그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열 이상을 감당할 수 없다.
반면 마나를 체내에 축적하여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은 수백 명도 상대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초인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전투의 양상은 순식간에 기울게 될 것이다.
물론 아군에게 해가 되어선 안 된다.
그랬다간 의미가 없을 테니.
“그 흙은 인류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재앙이다.”
“그게 무슨 뜻이죠?”
“오염된 흙이 생물처럼 자라고 있다. 이대로 방관한다면 뤼빅스 전체가 그 흙에 뒤덮일지 모른다. 그래서 어스 백작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 미답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대가 확인해 줬으면 한다.”
태도는 뻣뻣했지만, 그 내용은 명백한 부탁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로니카 단장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꽤나 신선한 경험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번 일이 위험하다는 반증이다.
“그 부탁 들어주면 교단에선 내게 뭘 해줄 수 있죠? 뭘 줄 수 있는 지 선제시하세요. 이왕이면 문서로 작성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물며 그간 저들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가 얼마던가.
그러니 이번엔 너희가 스트레스를 받아봐라 단단히.
어스는 선제시를 강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