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오! 나의 소중한 형제여!”
어스를 보자마자 레이몬드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그를 포옹했다.
당연히 그의 품에 안길 어스가 아니었다.
잽싸게 스쳐 지나간 어스는 레이몬드의 수인족 노예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주인을 외면하고 수인족부터 챙기는 건 주인 입장에선 자신이 무시 받는 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레이몬드를 오래 알아온 어스는 오히려 그 행동이 그를 기쁘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과연 레이몬드는 어스가 자신의 수인들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반갑게 대해주자 매우 기뻐했다.
“이젠 완전 가을이네, 가을이야.”
가뭄의 여파로 농지를 바라보는 농심은 이미 숯검댕이가 되어버렸고, 서민들은 추위만큼이나 매서울 곡물 가격에 한숨만 커지고 있었다.
“선선해져서 좋아요?”
“아무렴 더운 것보단 선선한 게 낫지.”
“마법 물품으로 주변을 도배하고 지내면서.”
“그거랑 이건 다르지.”
“공사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너무 일찍 내려온 거 아니에요?”
“신전 함몰 사건 이후 눈치를 어찌나 주는지 그 등쌀에 더는 못 버티겠더라고 그래서 내년 봄까지 캠핑한다는 생각으로 내려왔지.”
본채와 별도로 별채는 완공이 끝났다.
돈을 얼마나 때려 박았는지 광속으로 끝난 공사였다.
그럼에도 하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마도학을 이용한 특별한 공법이 만든 기적이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돈돈 하는 것이다.
돈으로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것이 더 많다.
“그 일만 있었던 건 아니죠?”
“티 났어?”
“조금.”
“니드르 시 일로 교단 내부에서 자네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제법 커. 그 모습을 보니 불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야.”
“헤럴드 그치의 잘못인데 왜 날 탓하는지.”
“그러니까. 우리 추기경님만 계셨어도 헤럴드 그 자식은 무인도에 처박아 버렸을 거야.”
“참, 에스터 추기경님에 관한 소식은 아직 인가요?”
레이몬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스는 그를 위로했다.
“에스터 추기경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러니 아직 실망하지 말아요. 나도 한번 열심히 찾아볼 테니까.”
“재상집 개가 죽으면 문턱이 닳고, 재상이 죽으면 문턱에 먼지만 쌓인다는 옛말이 하나 틀린 게 없더군. 참, 루리아 영애와는 어때?”
“…….”
“그 표정은…… 설마? 싸운 거야? 그렇다면 얼른 풀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루리아와 헤어진 걸 아는 사람은 현재 푸리엘 하나다. 그 외 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어스는 헤럴드 주교에게 빅엿을 먹인 뒤 글리시아로 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내가 실수했군.”
“레이몬드가 알고 한 것도 아닌데 괜찮아요. 지금은 많이 털어냈어요.”
“루리아 영애도 어렵게 사는군! 자네라는 안전하고 편한 길을 두고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자네와 줄 한번 대보려고 줄을 섰는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잖아요.”
“정말 괜찮겠나? 듣자니 그쪽은 내일 당장 내전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던데.”
솔론의 상황은 레이몬드보다 어스가 더 많이,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대륙 전역에 정보원을 둔 이종족 해방 연합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헤어진 걸 주변에 밝힌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이후 레이몬드는 루리아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두 병이 일곱 병쯤 되었을 때.
“어, 어스…… 히끅, 자네 술이 이렇게 셌나?”
그 말을 끝으로 레이몬드는 의식을 잃었다.
반면 어스는 멀쩡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인족들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
어스는 집으로 향했다.
달빛과 바람을 벗 삼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굳었던 마음이, 축 처졌던 기분이 풀렸다.
‘고향에서 돌아다니던 때완 느낌이 다르네.’
산책이 주는 편안함을 알게 된 어스는 이후 자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편안하던 그 표정은 이내 사라졌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길을 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심각한 표정을 하고서.
* * *
푸리엘은 어스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갖고 왔다.
그녀가 가져온 소식은 헥터 왕국 왕도에서 2차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불과 서너 달 전 그곳에선 이미 던전 브레이크로 인하여 큰 고통을 겪은 바 있었다.
그랬던 곳에서 또다시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
국운이 다한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고작 그 이유로 푸리엘이 어스를 직접 찾아 나선 건 아니었다.
하필 그곳에 루리아가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어스는 머리가 멍해졌다.
거기까지 가기엔 블링크로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다행히 소식을 전한 푸리엘이 텔레포트를 이용하면 된다고 말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연합의 텔레포트 마법진이 없었다면 어스는 급한 마음에 7서클 공간 이동(워프) 스킬을 구매했을 것이다.
아니, 이를 배웠더라도 좌표가 없어 사 놓고 후회했을 것이다.
좌표 입력 방식이 아닌 이미지 하나로 공간 넘나들 수 있는 스킬은 9서클 워프 게이트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빈 스킬 슬롯이 있으니 구입 즉시 사용이 가능하지만 9서클 스킬 가격이 1억 코인이나 하여 지금으로선 쳐다볼 수도 없으니 어스로선 발만 구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둘러 집의 지하실로 이동한 어스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몇 곳을 경유한 뒤 헥터 왕국에 도착했다.
테리우스 영지에서 헥터 왕국 왕도에 도착하기까지 30분이 걸렸다.
왕도의 텔레포트 마법진이 위치한 연합의 기지에서 어스는 상황을 보고 받았다.
“구울?”
“예, 백작님.”
전에도 구울이더니 이번에도 구울이라.
이 정도면 왕도가 들어앉은 이 터가 좋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루리아 영애의 위치는 알고 있습니까?”
“글리시아 영지의 사병들과 함께 토벌대에 합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딥니까?”
“도시 서쪽에 위치한 공동묘지 지하 납골당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확산 중이라고 했으니 토벌대는 그쪽으로 갔을 겁니다.”
헥터 왕국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그런 역사에 걸맞게 왕도의 역사도 유구하다.
그에 걸맞게 지금껏 이 도시에서 죽은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자연 공동묘지 아래 지하 납골당의 규모도 방대하다.
‘권력 다툼이나 하고 있을 시간에 수색에나 힘을 기울일 것이지.’
어스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블링크를 시전하여 왕도 서쪽으로 이동했다.
현장에 도착한 어스는 어디부터 살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불길에 휩싸인 건물에서 뿜어지는 연기와 겁에 질린 자들이 중심가로 가기 위해 길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걸음이 느린 노약자들은 인파에 치여 비명을 질렀다.
부모의 손을 놓친 아이들은 울며 제 부모를 불렀고,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려던 부모는 인파에 밀려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현장을 벗어나려는 사람들 뒤로 구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 왕도를 휩쓸었던 구울에 비해 외양이나 풍기는 분위기가 곱절은 강해 보였다.
‘황야의 구울인가?’
구울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고, 이 소리는 구울을 자극했다.
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익스퍼트인 루리아라면 당장 큰일은 없을 것이다.
단독으로 움직인다면 모를까 토벌대와 함께 움직인다고 하니.
‘블링크.’
어스는 지상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구울의 기세에 질려 주저앉은 만삭의 여인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등을 향해 구울의 검이 가차 없이 떨어졌다.
그 검은 여인의 등에 닿지 않고 오히려 멀어졌다.
굉음과 함께.
“움직이세요.”
여인의 고개를 들었다.
화광을 등지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소년의 얼굴에서 여인은 천사를 보았다.
“처, 천사님?”
어스의 발차기 한 방에 날아가 버린 구울을 제외하고 몇 구의 구울이 더 있었다.
달아나는 사람들의 뒤를 쫓으려던 놈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법삽니다.”
그 말이 무색하게 어스는 철옹성을 휘둘렀다.
철옹성에 맞은 놈들의 육신은 폭죽 터지듯 터졌다.
만삭의 여인을 비롯해 피난 대열 후미로 처진 사람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법사가 언제부터 창을 썼던가?
“가세요.”
돌아선 어스의 주변으로 매직 애로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의 매직 애로우는 성인 남성이 가볍게 휘두르는 주먹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어스의 매직 애로우는 5번의 강화를 거친 데다, 스킬 위력을 높이는 지력 스탯의 효과로 인해 숙련된 창병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더 강할지도.
콱콱콱콱-!
어스를 향해 달려들던 놈들 모두 두 다리가 허공에 붕 떠서는 한참을 밀려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매직 애로우를 머리통에 맞은 놈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황야의 구울을 처치했습니다. 50코인을 습득합니다.
급소를 피한 놈들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전처럼 빨리 움직이진 못했다.
고통이나 부상 때문이 아니라 신체가 파손됐기 때문이다.
저 등급 던전 언데드면 모를까 무려 6띠 등급 언데드가 고작 매직 애로우에 당해 걸레짝처럼 변했다.
만약 이 자리에 마법사들이 있었다면 백이면 백 현실을 부정할 것이다.
1서클 마법 따위로 파손할 수 있는 그런 허접한 몸뚱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황야의 구울을 처치했습니다. 50코인을 습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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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위처럼 단단한 그 몸뚱이가 박살 나서 영면에 들었다.
한 무리의 구울을 모조리 처리하자 건물에 숨어 있던 자들이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어스에게 연방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중심가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스가 구한 산모 역시.
그들을 일별하고 고개를 돌린 어스 앞으로 또 한 무리의 구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중엔 유난히 긴 팔을 가진 구울이 있었다.
‘정예군.’
놈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다.
너무 쉽다.
지금이라도 광역 스킬을 구매하면 된다.
사람들이 대마법사를 경외하는 진정한 이유가 바로 그들이 광역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마법으로는 파이어 스톰, 블리자드, 윈드 스톰, 라이트닝 스톰과 레인 등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마법을 사용한다면 이후 대마법사가 아니라 학살자란 소릴 듣게 될 것이다.
“사, 살았어!”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건물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 그에게 인사하곤 달아났다.
주변 건물은 텅 비었으니 더는 스킬에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
화염계만 아니면 된다.
‘체인 라이트닝.’
이곳이 대로라곤 하지만 고작 마차 세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넓이다.
그러한 곳에서 체인 라이트닝 한발이면 놈들을 정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더욱이 지력 스탯이 기존의 2배로 껑충 뛴 지금의 체인 라이트닝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다.
이를 증명하듯.
-정예 황야의 구울을 처치했습니다. 70코인을 습득합니다.
-황야의 구울을 처치했습니다. 50코인을 습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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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력만 따지면 7서클 광역 마법과 맞먹는다.
그리 맞먹고도 주변 환경을 덜 고려하고 사용할 수 있으니 광역 스킬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일반적인 마법사와 달리 어스의 경우 마나를 무한대로 뽑아 쓸 수 있다 보니 조금만 수고하면 광역 스킬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이러니 6서클처럼 7서클도 건너뛰고 아예 8, 9스킬을 욕심낼 수밖에 없었다.
‘블링크.’
다시 상공으로 이동한 어스는 좀 더 차분하게 지상의 상황을 살폈다.
간혹 위험에 처한 피난민이 보이면 즉시 그들을 구조했다.
앞서와 달리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처리했다.
그 결과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4띠 던전 터졌을 때보다 무난한데 왜 이렇지?’
일단 정예나 전사급 구울의 수가 현저히 적었다.
자신이 오기 전에 토벌당한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토벌대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 방어에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서 어스는 루리아를 발견했다.
무사한 모습이 반가웠지만 다가가진 않았다.
루리아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피했다.
그녀 주변엔 다수의 교단 측 사람들도 있었기에.
아니, 그보단 이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얼굴을 비추는 게 내키지 않았다.
‘스토커로 오해 받는 건 질색이야.’
어스는 보스만 정리하고 나머진 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부지런히 보스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곧 그는 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콜 라이트닝을 쓰려다 그만두었다.
자신이 여기 있다고 광고할 생각이 아니면 피해야 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어스는 철옹성을 응시했다.
‘냅다 꽂으면 죽일 수 있을까?’
철옹성과 보스를 번갈아 보던 어스는 들끓는 호기심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블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