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서로의 온기를 서로의 몸에 남긴 두 사람은 헤어져 있던 그간의 시간을 보상 받기라도 하려는 듯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가뭄으로 인해 사람과 자연 모두 고통 받고 있었지만 밤이 되면 반대로 깊은 산속에 웅크린 작은 호수처럼 몹시 아름다웠다.
“어떻게 된 거야? 온다는 말은 없었잖아?”
루리아의 포커페이스는 여전했지만 그 얼굴이 어스의 눈을 가릴 순 없었다.
“당신을 놀라게 해주려고 말하지 않았죠. 그보다 좀 전에 한숨 쉬던데 영지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망설이는 루리아를 보자 어스는 그녀를 다그치기보단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의 마음을 열기로 했다.
잠시 생각하던 어스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루리아는 대경했다.
어스의 행동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교단을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가 사적인 자리였다면 파장이 크지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리 선포한 이상 교단으로서도 이 문제를 조용히 덮을 공산이 작았다.
지금껏 교단이 보여준 행태를 생각하면 이건 차후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루리아는 자신과 가문을 괴롭히던 일들이 한 없이 작게 보였다.
“그렇게 하고 그냥 와버렸다고?”
“응.”
“어스, 상대는 교단이야? 주교라고?”
“루리아는 내가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분명 교단은 두려운 상대다.
일국의 왕도 그들 앞에 서면 긴장하는데 하물며 일개 백작이 공적인 자리에서 그처럼 교단을 대표하여 마중 나온 자를 몰아세웠으니 어찌 후폭풍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루리아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약한 반응이다.
“내 말은 그게 아냐. 나 또한 화가 나. 하지만 너의 행동은 교단이 충분히 앙심을 품을 수 있는 행동이었어. 칼렉 왕세자님도 알고 있어?”
“지금쯤 알고 있지 않을까?”
“지금 장난해?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감이 안 와?”
루리아는 크게 화를 내다 곧 안절부절못했다.
어스는 자신을 위해 그녀가 적나라한 반응을 보이자 그게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웃음이 나와?”
“인정해 교단이 강하단 걸.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그들이란 것 역시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도 적어도 지금의 난 공격할 수 없어. 그랬다간 이후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그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어스의 침착한 모습에 루리아는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천천히 생각했다.
교단이 어스를 공격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답은 곧 나왔다.
하아.
루리아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화가 나더라도 참을 것이지.”
“화? 내가 헤럴드 주교 따위에게 화를 낼 것 같아? 천만에 그런 작자는 안중에도 없어.”
“그럼 왜 그런 행동을 한 거야? 그건 너 답지 않은 행동이었어.”
확실히 이번 행동은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또 그리 할 생각이었다.
“난 나보다 루리아가 더 걱정돼.”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 봤어. 혼자 한숨 쉬는 걸.”
“그,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문제야. 나보단 네가 더 문제라고. 당장은 던전이란 발등에 떨어진 불이 있어 교단도 쉬쉬하겠지만 과연 그들이 이번 일을 잊을까? 분명 가슴에 품고 있을 거야.”
“말했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고. 그러니 날 믿어. 그보다 말해 봐. 당신의 문제를.”
어스가 워낙 자신 있어 하자 루리아는 정말 그에게 이 문제를 풀어낼 절묘한 수단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던 루리아는 그제야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는 가문에 닥친 문제를 언급했다.
조용히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스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문제면 간단하지 않아? 나처럼 헥터를 뜨는 건 어때? 이참에 나랑 솔론으로 가는 건 어때? 아니, 그냥 가자.”
지방에 있다곤 하지만 글리시아는 영지를 보유한 귀족 가문이다.
그러한 가문이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남겨두고 떠나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다.
어스는 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처럼 가족이랑 재산만 챙겨서 훌쩍 떠나면 되는 게 아니라 아주 많은 걸 그들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루리아는 어스의 손을 빤히 응시했다.
전에 느끼지 못한 힘이 그 손에 느껴졌다.
루리아의 마음이 흔들렸다.
던전과 가뭄도 부족해 언제 터져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내전의 기운이 팽배한 지금 확실히 솔론 왕국은 살기 쉬운 왕국이 아니었다.
특히, 내전의 소용돌이에 필히 휘말릴 처지에 놓인 입장에선 더더욱 위험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개인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혈혈단신의 처지였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어스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겠지만 그러한 상황이 아니다보니 루리아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스, 우리 그만 헤어지는 건 어떨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헤어지자고 한 거야? 왜?”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어스는 크게 당황했다.
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는 개인이기 이전에 글리시아의 일원이야. 나는 지금껏 누린 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해.”
처음엔 살짝 흔들리던 루리아의 눈은 마지막엔 굳건했다.
어스는 그녀가 자신이 아닌 가문을 선택한 것에 몹시 실망했다.
한편으론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실망감은 곧 화로 변질되었지만 사람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기에 어스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제안을 바꾸었다.
“글리시아가 솔론으로 가면 되잖아? 내가 도와줄게. 글리시아가 솔론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나 그만한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어.”
“너에게 부담 주기 싫어.”
“부담 아냐. 당장 아버님을 만나서 제안할게.”
루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어스의 손을 잡았다.
그에 어스는 루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과 두 눈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내게 부담 주기 싫어서가 아니지?”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은 루리아는 생각의 정리를 마친 듯 다시 눈을 떴다.
“나도 너처럼 내 길을 개척하고 싶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너의 연인이 아니라, 너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내 이름으로.”
이번엔 어스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두 눈을 감았다.
루리아보다 한참을 더 생각을 정리한 끝에 어스는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생각할 시간이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 밤 좀 더 깊이 생각했으면 해. 그때도 지금 같은 대답이라면…… 루리아의 뜻을 존중할게.”
어스는 루리아의 손을 자신의 손에서 떼어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버렸다.
‘헤어지자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거지?’
루리아에게 시간을 줬다, 그러나 실상 자신에게 시간을 준 것이다.
* * *
어스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하룻밤이 1년처럼 길 수도 있다는 걸 체험했다.
꽤 힘든 밤을 보낸 어스는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 날 루리아를 찾았다.
하지만 루리아의 대답은 어젯밤과 다르지 않았다.
이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생각이 맞아떨어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다.
“루리아의 뜻을 존중할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인사말처럼 이 말만 하고 돌아섰다.
그렇다고 어찌 미련이 없을까.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부르면 곧장 돌아설 수 있도록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루리아는 끝내 어스를 잡지 않았다.
탁.
루리아의 방문을 닫자 그제야 그녀와 자신의 짧은 연애도 끝이 났다는 생각이 깨달음처럼 찾아왔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글리시아로 오지 않는 거였는데, 아니 헥터 왕국으로 아예 오지 않았어야 했다.
복도 창문 밖 맑은 하늘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어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은 창문을 통과하여 글리시아 상공에 떠 있었다.
‘잘 살아요, 루리아 영애.’
실연은 남의 이야긴 줄 알았는데.
‘그 모지리 세 왕자들 때문일까?’
영향이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 탓만 할 수 없었다.
이건 전적으로 루리아의 결정이니까.
사람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당장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언젠가 또 이런 일이 터질 것이다.
그래서 어스는 돌아서야만 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루리아 곁에 있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는 삶은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어스는 글리시아 영지를 곧장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선물로 글리시아에서 발견하지 못한 던전을 찾아 죄다 정리한 뒤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던전에서 한바탕 날뛰자 무겁던 마음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다.
* * *
헥터 왕국 남부 도시 니드르에서 어스와 헤럴드 주교의 일은 예상대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교단은 자존심을 굽힐 수 없었기에 뒤로 한발 물러나 침묵했다.
반면 어스의 지원이 필요했던 각 왕국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들은 자숙을 천명하고 영지에 칩거한 어스의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어스와 마찰을 빚은 헤럴드 주교를 표적으로 삼았다.
교단에서 그를 찍어 내면 어스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하여, 하지만 교단은 그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단 입장에서 헤럴드를 징치하는 건 자존심 문제였기에.
일이 이렇게 되자 호미로 막을 일도 가래로 막는 사태가 곳곳에서 빈번해졌고 이로 인해 교단을 향한 사람들의 불만은 점차 쌓이기 시작했다.
어스 입장에선 속 시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들.”
“예, 아버지.”
“헤럴드 주교란 작자 때문에 아직 마음이 상해 있는 거니?”
사실 헤럴드에 관한 일은 이미 어스의 마음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건 루리아였다.
헥터에서 돌아온 이후 어스는 그녀와 연락을 끊었다.
처음 얼마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밤낮 없이 마법 통신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올까 싶었다.
끝내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실수로 그녀에게 연락할 뻔했다.
다행히 중간에 정신이 번쩍 들어 애꿎은 마법 통신구를 박살 냈다.
새로 구입한 마법 통신구엔 루리아의 번호가 없었다.
덕분에 취중 실수는 하지 않았다.
-갈색 오크를 처치했습니다. 25코인을 습득합니다.
.
.
.
.
어스는 영지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경험치와 코인은 정체되지 않고 늘고 있었다.
그를 대신하여 시쿠가 원정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쿠의 활동 영역은 솔론 왕국 한정이었다.
덕분에 어스는 실연의 상처를 치료하는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한 입으로 두말할 수 없잖아요.”
“정말 그 때문이야?”
“그일 말고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정말 그 때문이라니 그건 무슨 말이에요?”
“아빤 잘 모르겠는데 네 엄마가 네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처럼 보인다더라고 난 아니라고 하는데 네 엄마가 하도 그리 말하기에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엄마는 매의 눈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에 반해 사냥꾼이었던 아버지의 눈은…… 여기까지만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아버질 무시할 것 같았다.
“나 같은 남잘 세상 어떤 여자가 찬다고. 그런 거 아니니까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보다 루시는 여전히 폐관 수련 중이에요?”
“그때 그 일이 충격이었나 봐.”
그때 그 일이란 어스가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막 활성화한 이후 몸이 한껏 달아올랐을 때 대련을 자청한 루시가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한 사건이었다.
잠시 그때 일을 떠올린 어스의 입가에 웃음이 매달렸다.
합의하에 헤어졌지만 그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여파로 수년은 웃을 일이 있어도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이렇듯 실없이 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래서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매번 이겨놓고서 그거 한번 졌다고 이를 갈다니. 기사가 목표인 루시 입장에선 그것도 좋은 공부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루시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푸리엘에게 말해서 몸에 좋은 약 잔뜩 챙길게요.”
“알았다. 그럼 아빠도 네 엄마에게 한 소리 해야겠다.”
“뭘요?”
“너 실연당한 남자로 만들었잖아. 여자의 감? 쳇, 어처구니가 없지 않냐?”
그건 아빠고.
“그러게요.”
행크는 어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곤 휘적휘적 걸어갔다.
행크가 가자 기다렸다는 듯 푸리엘이 다가왔다.
“레이몬드 씨가 왔습니다. 영주님.”
“그럼 마중 나가야지.”
참고로 레이몬드가 말했던 이종족 노예는 조금씩 영지에 유입되어 지금은 영지를 지키는 영지의 병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덕분에 영지의 전력은 한층 두터워져 이젠 그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영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 은인이 이젠 천문학적인 재산을 싸들고 제 발로 찾아와줬으니 어찌 무거운 엉덩이를 자랑할까.
-보스 야쿱을 처치했습니다.
-업적 보너스 1을 습득합니다.
-5,000코인을 습득합니다.
-레벨업!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 할 때 9월의 마지막 날을 축하하는 의미인지 시쿠가 좋은 선물을 보내주었다.
‘역시, 펫이 진리지.’
또다시 어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고 이를 본 푸리엘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난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의 기분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