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여태 만찬에 참석하지 않던 어스가 처음으로 레오다니스 왕국 서부 지역 귀족들이 주체한 만찬에 참석했다.
어스 입장에선 이유가 있어 참석한 것일 뿐인데 이 만찬에 참석한 이후 그에 관한 소문이 이상한 방향으로 부풀어져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레오다니스와 솔론 왕국이 모종의 협약을 맺어 그 일환으로 어스가 만천에 참석했다는 소문에서부터, 어스의 전 조국인 헥터와 그의 관계가 나빠 이에 앙심을 품은 어스가 레오다니스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는 등등 사실과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
이처럼 모든 게 소문에 불과했지만 소문에 민감한 귀족들의 사교모임은 물론 각국의 첩보원들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냥 만찬에 참석한 것뿐이잖아? 그게 뭐라고 다들 이 난리지?’
레오다니스 왕국에서 솔론으로 복귀한 어스는 곧장 임무를 맡았다.
나흘 내내.
그렇게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자신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고, 이에 칼렉 왕세자와 독대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지난 나흘간 어스는 몬스터 웨이브 현장에 투입되어 이를 처리하느라 시쿠의 위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소문 모두 거짓이란 건가?”
“예, 저하.”
고작 이런 일로 왕세자와 독대한 이 상황도 우습고, 이에 대해 말하는 자기 자신도 어스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칼렉 왕세자가 취조하듯 날을 세워 압박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조심스러워했다.
“내 행동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하네. 대륙에서 어스 백작처럼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개인은 역사를 뒤져도 전례가 없어 그러한 것이니까.”
의구심을 모두 해소한 칼렉 왕세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스의 감정을 다독이기 위해 노력했다.
“유명세에 대한 값을 치른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아닐세, 자네도 한창 나이인데 즐기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내 백작을 청한 건 만찬에 아예 참석하지 말란 의미가 아니라 참석하더라도 공평하게 해주었으면 하네. 특히, 내일 헥터 왕국으로 가게 된다면 그들이 여는 만찬엔 참석해주었으면 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레오다니스와 헥터의 관계가 좋지만은 않으니까.”
자신이 만찬에 참석한 일을 자랑하는 레오다니스 왕국의 귀족들이나, 또 그걸 듣고 질투하는 헥터 왕국이나 어스 입장에선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애견처럼 보였다.
‘이놈도, 저놈도 별 관심 없는데.’
귀찮지만 헥터 왕국에서도 만찬에 참석해주기로 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참, 듣기에 백작이 이종족 노예를 구입하고 싶다던데 사실인가?”
이 말은 왜 안 나오나 싶었다.
“문제가 되는지요?”
“왕국 입장에선 문제 될 건 없네. 다만 영지군의 규모나 구성이 이종족 노예인 건 극단적이지 않나 싶어서.”
왕세자는 교단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저 말의 요지를 모를 만큼 어스는 아둔하지 않았다.
왕궁은 왕실의 소유였지만 그 안에 일하는 자들마저 소유한 건 아니다.
그랬기에 왕궁에서 나누는 대화는 항상 신중해야 한다.
‘왕족도 못 해먹을 짓이라니까.’
카멜이 왕위 다툼을 일찌감치 포기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그런 게 아니었을까?
카멜이라면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제 영지가 솔론에 속한 영지이지만 일반적인 영지와 달리 자유 영지로 알고 있습니다. 저하.”
행방불명(?) 상태인 에스터 추기경에게 이 점은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녀의 개입으로 자유 영지라는 타이틀을 얻었기 때문이다.
“백작의 뜻은?”
“자유 영지가 가진 권한만큼 책임도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그 일로 문제가 생긴다면 왕세자 저하와 왕국은 뒤로 빠져 계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막상 진짜 그러면 조금 섭섭할 것 같긴 하지만 왕세자나 솔론의 입장을 고려하면 원망할 순 없었다.
빌미를 제공하지 말라는 조언을 무시하고 있는 건 자신이니까.
‘30일 재사용 시간만 아니면 차원 이동을 써볼 텐데.’
재사용 시간 조건 때문에 쳐다보기만 할 뿐 쓸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어스였다.
자신이 한 달간 자리를 비운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괜찮겠나?”
어스는 대답하지 않고 왕세자의 두 눈만 직시했다.
그에 왕세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자와의 독대를 끝낸 어스는 퇴궐했다.
왕궁에서 일하는 자에서부터 병사와 기사에 이르기까지 한둘이 아닌 사람들이 그런 어스를 지켜보았다.
시선에 경외를 담고서.
* * *
어스는 헥터 왕국을 향해 부지런히 블링크를 시전했다.
환하게 웃으며.
그가 저처럼 웃는 이유는 이번 임무를 끝내고 개인적인 볼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볼 개인적인 볼일이란 바로 루리아였다.
솔론과 헥터 왕국의 국경을 단숨에 넘어 계속 서진한 어스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참고로 헥터 왕국의 왕자들의 다툼은 격화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렇다 보니 던전이나 몬스터 웨이브에 대한 대처에 있어 교단을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백성들 역시.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어스 백작님.”
마중 나온 이는 어스와는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테리우스 영지의 중심으로 거듭난 그의 농장을 탐했던 프린트 시의 신전 주교가 바로 눈앞에 있는 저 남자였기 때문이다.
에스터 추기경의 힘을 빌려 멀고먼 동토의 땅으로 보냈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헤럴드 주교도 아는지 정중한 태도와 달리 눈엔 쌍심지가 켜져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스는 보란 듯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교단 제일검 베로니카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데 하물며 주교 따윈 발아래 기어가는 저 개미만도 못한 존재다.
‘딱밤 한 대 때리기 딱 좋은 날씬데.’
엄지에 중지를 올리며 살살 비볐다.
작정하고 때리면 이마에 큼직한 구멍도 가능할 텐데.
어스가 자신을 앞에 두고 어떤 상상을 하는지 전혀 모른 채 헤럴드 주교는 여전히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그를 대했다.
“시장은 없습니까?”
차마 때릴 순 없었다.
그 순간 교단과는 전쟁이니까.
그렇다고 저 면상을 계속 두고 볼 생각도 그에겐 없었다.
그래서 헤럴드 주교 면전에서,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무안을 주는 언사를 거침없이 토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싸해졌다.
가을을 박차고 동장군이 들어온 것 같았다.
웅성웅성.
어스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자 헤럴드 주교는 이에 크게 당황했다.
“시장 없습니까!”
어스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만 높인 게 아니다.
보란 듯 인상을 구겼다.
이에 니드르 시 관료들과 귀족들이 당황하여 쩔쩔맸다.
하지만 그들도 헤럴드 주교, 아니 교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보니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했다.
시장이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좋을 텐데 하필 니드르 시 시장은 왕도로 소환되어 떠난 상태였다.
이런 시국에 시장이 자신의 도시를 비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 건 헥터 왕국의 정세가 몹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어스의 태도에 위축되었던 헤럴드 주교가 다시 나섰다.
“시장은 왕도에 갔습니다. 그러니 나…….”
“부시장 없습니까?”
“저, 제가 부시장입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40대 중반의 대머리 남자가 손을 들었다.
어스는 헤럴드 주교를 스쳐 부시장 앞에 섰다.
머리털 나고, 아니 머리털 빠지던 20대 시절 이후 이와 같은 모욕은 처음인 헤럴드 주교는 제대로 열이 올랐는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감히 지금 교단을 무시하는 겁니까? 어스 백작! 이는 스스로 이단을 자청하는 것임을 진정 모르는 것입니까?”
교단도 지금은 어스가 필요하여 그의 행동이 마뜩잖아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고작 주교가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그를 압박해 버렸으니 이는 교단 입장에선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도 벌할 수 없고 그렇다고 헤럴드 주교를 벌하자니 교단의 권위와 위상에 흠이 생길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도시에 드리운 암운을 걷어낼 영웅을 마중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이 상황에 머릿속이 텅 빌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막상 일을 저지른 헤럴드 주교 역시 내심 크게 후회하는 중이었다.
반면 어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헤럴드 주교를 깔아보았다.
곧 그는 픽하고 웃어 보였다.
웃음기는 금방 사라졌다.
“그럴 리가요. 그리 생각하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어스가 굽히고 들어오자 안절부절못했던 헤럴드 주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해졌다.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한 전형적인 인물답게.
헤럴드 주교의 안심은 너무 일렀다.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또한 제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오늘부터 공식적인 대외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무기한 자숙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의미는 천둥벼락처럼 강력한 위력을 뽐내고 있었다.
장내에 또 한 번 휘청거렸다.
충격에.
자신의 결정을 통보한 어스는 곧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현실을 자각한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어, 어스 백작이 가 버렸어!”
“던전은 어떡하라고.”
“오! 룬이시여, 이 일을 어찌합니까?”
그 소리는 태산처럼 헤럴드 주교를 마구 짓눌렀다.
헤럴드 주교의 입에선 앞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음만 흘렀다.
* * *
던전과 몬스터 웨이브는 대륙 전체를 끝 모를 수렁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가뭄으로 인해 곡물 가격이 천정부지 솟구쳐 굶주림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일이 이 지경임에도 이를 살펴야 할 중앙 정부는 나 몰라라 하고 차기 국왕이 누가 될지만 살피며 줄을 대고 있었다.
그건 중앙 귀족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방까지 떨어진 화두였다.
그래서 글리시아 영지도 더는 중립을 표방할 수 없었다.
아니, 글리시아라서 더더욱 압박이 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루리아.”
“예, 아버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도 입장을 정해야 한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어.”
아버지의 말에 루리아는 속으로 한숨 쉬었다.
글리시아가 일개 남작 영지였다면 사실 가문이 누굴 지지하던 큰 비중이 없다.
비중이 없다는 건 그만큼 입과 행동을 조심하면 큰 바람도 피해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글리시아 영지는 고만고만한 일개 남작 영지임에도 그 비중이 남달랐다.
그 이유는 글리시아 가문의 장녀가 어스 테리우스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자들은, 그들의 참모들은 글리시아의 지지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참고로 루리아는 지금껏 이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인류를 위협하는 던전을 없애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는 연인에게 자신과 가문의 일로 부담 주기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생각하는 왕자가 있습니까?”
“내 생각엔 3왕자가 적당할 것 같구나.”
“그러면 그리 하십시오.”
“너도 알다시피 가문이 3왕자를 지지하는 순간 3왕자는 어스 백작의 명성을 이용하려 들 것이다. 자칫 그 일로 인해 너와 어스 백작 사이에 문제가 벌어질까 걱정이구나.”
어스는 글리시아 가문에도 은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오스완드 남작의 진심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기에 루리아 역시 난처했다.
자신으로 인해 어스가 더러운 권력 다툼에 그 이름을 오르내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게 싫어 아버지에게 중립을 종용할 수도 없었다.
가문과 백성들의 미래가 달린 문제였기에.
그래서 루리아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선 루리아는 어스가 이곳에 올 때마다 함께 하던 후원으로 향했다.
하아.
주변의 사람들이 없자 루리아는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그때,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그림자와 포개어졌다.
이에 놀라 반사적으로 돌아선 루리아는 상대를 확인하곤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잘 지냈어요. 루리아.”
루리아를 놀라게 만든 이는 어스였다.
어스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 연인이 너무 반가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처럼 루리아도 그러했는지 루리아는 어스의 품 안에 자신을 모두 담았고, 어스 역시 힘주어 그녀를 품었다.
‘그녀가 허락한다면 루리아를 내 영지로 데려가야겠어.’
언젠가는 할 제안이었지만 그것이 오늘일 것이라곤 그 역시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입을 열 타이밍을 재는 어스의 가슴은 걱정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순간의 즐거움과 별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