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활동하기 편한 복장으로 단숨에 환복한 어스는 인벤토리에서 철옹성을 빼들었다.
멋들어지게.
휘리릭.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철옹성을 회전시킨 뒤 창대로 지면을 살짝 찍었다.
이는 겉멋이다.
-어스, 창은 실전 최강 병기다. 겉멋에 기대면 농민의 죽창과 다를 바 없다고. 그러니까 폼에 집중하지 말란 말이야! 젠장. 그래 알았다, 알았어. 하더라도 고수가 돼서 해, 알았지? 넌 지금 겨우 기기 시작한 갓난쟁이라고.
어스의 첫 스승이자 동료였던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려 죽은 게이브가 살아생전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덕분에 폼이란 군더더기는 쏙 뺄 수 있었다.
물론 게이브가 말하던 창술의 고수가 된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창술, 부족했던 수련 시간을 신체 능력으로 단숨에 만회해버렸다.
덕분에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고, 느낄 수 없던 것이 느껴졌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고난도 동작을 지금은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었다.
이것이 고수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니 지금은 폼을 잡더라도 게이브도 인정해 주리라.
“뭐해? 얼른 검 뽑으라고, 이러다 해 떨어지겠네.”
푸리엘을 향한 어스의 재촉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푸리엘은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았다.
아니, 뽑을 수 없었다.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실전이 아닌 대련임을 뻔히 자각하고 있음에도 망설여졌다.
“모, 모르겠어요. 검을 뽑을 수 없어요.”
한참 만에 겨우 푸리엘은 자신의 상태를 고백했다.
“검을 뽑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황당했지만 푸리엘의 표정을 보니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어스는 다른 이들을 섭외했다.
말 한마디면 달려올 자들이 이 영지엔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것도 굉장한 실력자들이다.
그중 먼저 알엘을 호출했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검을 뽑을 수 없습니다.”
“왜?”
“잘……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은 우연이다. 하지만 두 번은?
‘알엘이 일반적인 노예가 아니라 세뇌 마법까지 걸린 상태의 노예이기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앞서 푸리엘의 행동은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마법 계약서는 물론 세뇌 마법까지.
‘아! 그녀와도 마법 계약서를 작성했지. 그런데 전엔 대련을 해주지 않았었나?’
마법 계약서에 자아가 있어 자기 멋대로 계약 내용을 변경하지 않은 이상 이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알엘에 이어 다른 이들도 불렀다.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당사자들도 자신들이 왜 거절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다.
“오빠, 그 대련 내가 해줄까?”
“뭐?”
“내가 해줄게, 내가. 현재 테리우스 영지의 수련 기사이자 장차 기사가 될 이 몸이 해주겠다고.”
익스퍼트도 아니고 고작 유저 수준의 루시와 대련은 오히려 어스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하려 했는데 과거 여동생과의 대련에서 번번이 패하던 시절이 문득 떠올라서 마음을 바꾸었다.
‘푸리엘이나 다른 이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차차 알아보고 일단 루시의 콧대부터 꺾어놔야지.’
드디어 오빠로서의 권위를 당당히 세울 기회를 맞이한 어스는 내심 활짝 웃으며 승낙했다.
먼저 공격하라며 세운 검지를 까딱였다.
도발적인 행위다.
그럼에도 루시는 이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신중한 태도로 어스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는 모습을 보였다.
“언제까지 노려볼 거야? 공격 안 해?”
그의 말에 이번엔 루시가 반응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3일 만에 돌아온 어스의 외양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풍기는 기세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루시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비, 빈틈이 없어. 마법인가?’
루시는 입안이 바싹 말라 버렸다.
길지 않은 그 시간 심력을 한 번에 다 써버린 때문이었다.
“그럼 내가 공격한다?”
어스는 루시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 뒤 철옹성을 휘둘렀다.
평범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를 방어한 루시는 그 평범한 공격을 막자마자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루시는 수련을 위해 날을 없앤 철검을 목검 대신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철검이 나무 재질의 창대에 부딪히자마자 잔가지 부러지듯 똑 하고 부러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창대에 실린 거력에 의해 루시의 몸은 수 미터를 날아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엉망이 된 루시는 주저앉은 채 멍한 눈으로 어스를 보았다.
정신적인 충격은 비단 루시만 받은 게 아니었다.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이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다들 남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느끼는 충격은 굉장히 컸다.
“마, 마법이지? 어떤 마법을 쓴 거야? 방금 그거 뭐냐고?”
겨우 정신을 차린 루시가 말하였다.
그녀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다.
한편 어스는 무술로 여동생을 이긴 것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드디어 여동생을 완벽하게 압도한 첫 경험이었기에 기분은 더 짜릿했다.
어스는 턱 끝을 최대한 높이 치켜세운 채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얄밉다,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고 싶은 정도로.
그럼에도 루시는 어스를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해소되지 않은 충격이 여전히 그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스는 느릿하게 돌아서선 철옹성을 어깨에 척 올리곤 입꼬리를 귀에 걸고 집으로 향했다.
“어, 어디 가!”
“출근.”
“뭐?”
“휴가 오늘까지거든 그러니 출근 준비해야지. 왕도로 간다. 다음에 보자.”
어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지금 이 모습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구를 겨우 억누르며.
* * *
-로엘 님.
-푸리엘 무슨 일인가?
-로엘 님이 어스 님을 보셨으면 합니다.
-어스 님께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저 그게 아니라…….
푸리엘은 자신에게 대련 신청한 어스를 도저히 공격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장문의 문자를 모두 읽었음에도 로엘은 한참동안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이에 푸리엘은 마법 통신구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의심했다.
다행히 통신구의 문제는 아니었다.
문자가 왔으니까.
-왕도로 가셨다고?
-예.
-알겠네, 조만간 다시 연락하지.
마법 통신구를 회수한 푸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와 어스의 대련을 떠올렸다.
아니, 애초 그건 대련이 아니었다.
어른이 갓난쟁이를 상대로 잠시 놀아준 것이었다.
‘대체 그에게 지난 3일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 그리고 그 힘은 납득하려야 납득할 수 없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것 같았다.
* * *
여동생의 질문 공세가 귀찮아 출근을 핑계로 영지를 나선 어스는 블링크를 쉴 새 없이 사용하여 늦은 저녁에 왕도 내 자신의 저택에 도착했다.
마침 퇴근한 거너, 아그네스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린다와 니코는 시내에 나가고 없었다.
거너와 아그네스를 보자 또 한 번 대련이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마음은 꾹 눌렀다.
‘날 상대하려면 최소 익스퍼트는 돼야 하지.’
그러니 익스퍼트에 이르지 못한 두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상적인 이야기와 상단에 관한 이야기로 늦은 식사를 마친 어스는 제 방으로 올라갔다.
‘흐흐, 마법사가 아니라 무술계에서도 이젠 괴물 소리를 들으려나.’
마법사도 좋지만 역시 원거리 타입이라 전투의 박진감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안전하게, 손과 옷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깨끗한 승리를 거둘 수 있어 좋긴 하지만 마음 한편엔 전사들처럼 박진감 넘치는 싸움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아예 없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젠 그게 가능해졌다.
‘베로니카 그 집착 할망구도 이길 수 있을까?’
어스는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칭호 활성화 전엔 느껴보지 못한 충만감이 움켜쥔 주먹에서 느껴졌다.
곧장 내지른다면 태산도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철옹성으로 몬스터를 때려 잡아봐야겠어.’
힘을 사용하고 싶어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어스의 밤은 유난히 길었다.
* * *
다음 날, 어스는 입궐했다.
왕세자 집무실로 들어선 어스는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인물을 만났다.
슈리에 율리아스 후작이 선객으로 와 있었다.
“후작님.”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반기던 슈리에 후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굳은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서 어스의 위아래를 살폈다.
슈리에 후작의 돌연한 태도에 칼렉 왕세자는 영문을 몰라 걱정했다.
“슈리에 후작?”
칼렉 왕세자가 거듭 부르자 슈리에 후작은 그제야 어스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런 후작의 표정은 꽤 복잡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하.”
“아닙니다. 그보다 어스 백작을 왜 그리 보신 겁니까?”
그건 어스도 궁금했다.
어스는 냉큼 자리에 앉았다.
슈리에 후작의 시선이 다시 어스를 향해 떨어지지 않았다.
“슈리에 후작.”
“음, 송구합니다. 저하.”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혹시 어스 백작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게 아니라…… 음, 설명하기가 애매한데 어스 백작의 기세가 낯설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슈리에 후작의 말에 칼렉 왕세자는 어스를 보았다.
찬찬히 뜯어보았다.
휴가를 제대로 보낸 것인지 전보다 건강한 느낌은 들었지만 딱히 기세의 변화는 느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의구심을 던진 왕세자는 순간 휴가 기간 중 어스가 대마법사의 경지에 한 발 더 다가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선 슈리에 후작의 태도는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아군이 강해져 나쁠 게 없으니까.
“기세라고 말하였지만 저 역시 뚜렷하게 무엇이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슈리에 후작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리 말하였다.
이에 왕세자는 당사자인 어스에게 직접 물었다.
“어스 백작, 혹 경지에 진전이 있었는가?”
위그드라실의 계승자 칭호를 활성화한 어스는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는 신체 능력에 국한된 것이지 마법사로서의 진전은 아니다.
3개의 빈 스킬 슬롯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단 하나도 채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수련자들이 자주 입에 담고 있는 벽을 조만간 허물 것 같다는 말로서 대답을 대신했다.
“오! 축하하네, 정말 축하해. 하하하.”
칼렉 왕세자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슈리에 후작도 그제야 표정이 풀어졌다.
어스는 슈리에 후작의 반응에만 집중했기에 그 변화를 금방 알아차렸다.
‘달라진 점을 명확하게 짚은 건 아니군.’
이건 이것대로 좋았다.
수단이란 꿍쳐 둘수록 유사시 더 빛이 나는 것이니까.
“감사합니다, 저하. 푹 쉬었으니 이제 업무에 복귀할까 합니다. 어디로 가오리까? 명만 내려주십시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으로 가득 한 그 말에 왕세자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어스가 가야 할 곳은 레오다니스 왕국이었다.
어스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 * *
레오다니스 왕국 서부 지역에 위치한 대숲에서 최근 6띠 던전이 발견되었다.
숲 안쪽에 위치하여 그간 발견되지 않았던 던전이었다.
명색이 6띠 던전이라 원정엔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 중 한 명은 반드시 동참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레오다니스 왕국 역시 다른 왕국들처럼 여러 장소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라 그들을 원정에 배정할 수 없었다.
원정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난다면 모를까, 광활한 던전 내부에서 보스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보니 긴 시간을 요구하다.
이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어스가 레오다니스 왕국에 나타났다.
던전 전문가의 등장은 대숲과 인접한 영지를 안심시켰다.
사람들의 열렬한 환대와 배웅을 받으며 어스는 보무당당하게 던전에 발을 디뎠다.
당장 눈에 보이는 몬스터는 없었지만 그쯤 찾는 건 일도 아니다.
“시쿠.”
“응, 주인님.”
“난 이쪽으로 갈 테니깐 넌 저쪽으로 가봐. 몬스터 발견하면 즉시 보고해. 아니다, 처리할 수 있으면 처리해도 돼.”
비행 능력을 갖게 된 시쿠는 정찰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정수리의 나뭇잎을 파닥거리며 시쿠는 날아올랐다.
그 속도가 제법 빠르다.
물론 블링크에 비할 수준은 당연히 아니다.
시쿠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응시하던 어스는 곧 반대 방향으로 블링크를 시전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한 무리의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철옹성을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부쩍 들어갔다.
‘서전을 장식하기엔 딱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