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드디어 로엘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어스는 미리 저택 지하에 대기하고 있었다.
눈알이 튀어나오기 직전 드디어 마법진이 환한 빛을 발산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어스는 맹수가 사냥감을 향해 몸을 날리는 심정으로 빛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 시간은 짧았지만 그가 체감하는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어스 님.”
환한 얼굴로 로엘이 어스를 향해 목례했다.
로엘의 미소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이 순간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웃는 부모님의 미소도 저 로엘이 짓고 있는 미소엔 못 미쳤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연합 일은 잘 되고 있죠?”
“흠흠, 이 손은 놓아주시겠습니까?”
“아! 실례.”
얼른 손을 놓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위그드라실 조각을 내놓아라! 그 손은 그리 부르짖고 있었다.
어스의 손과 그 얼굴을 번갈아 보던 로엘이 그의 얼굴을 보자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왜 그래요? 로엘?”
“아, 아뇨.”
로엘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어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낯선 그의 행동에 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 그에게 급한 건 로엘의 반응 따위가 아니었다.
고대하고 또 고대했던 위그드라실 칭호 활성화가 눈앞이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어스 님.”
얼른 줄 것이지 사설은 왜 붙이는지.
“내 물건 안 갖고 왔다는 말만 아니면 뭐든 다 대답해드릴 테니까 말해보세요.”
“어째서 그 열매를 원하시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응, 칭호 활성.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였지만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고 가야할 비밀이라 방금 한 말을 지킬 수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아무리 기뻐 흥분해도 생각을 하고 말해야 하는 법인데.
“날 강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비밀은 지키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약속은 지켰다.
“원하시던 열매입니다. 개수는 일전 요구하신 것처럼 20개입니다.”
오! 드디어, 드디어 손에 넣었다.
시스템 알림도 네 생각이 맞는다고 말해주었다.
-위그드라실의 조각을 습득하시겠습니까?
로엘과 저택 마법진 관리자 피구엘이 아니었다면 냉큼 수락했을 테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있다 보니 일단 인벤토리에 잽싸게 넣어두었다.
이젠 하늘이 두 쪽 나도 자신에게서 위그드라실 조각을 가져갈 수 없다.
당장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산속으로 달려가 칭호를 활성화하고 싶다.
두근두근.
그래도 먼 길 온 손님을 물 한잔 대접하지 않고 보내는 건 주인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었다.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피구엘 씨.”
“예, 영주님.”
“푸리엘에게 말해서 다과 좀 가져다 달라고 해주세요.”
로엘과 함께 지하실 한쪽으로 이동하며 로엘의 표정을 살폈다.
위그드라실 조각을 받기 전엔 보이지 않던 로엘의 표정이 그제야 들어왔다.
곤란한 일이 생긴 것인지 표정 한구석에 그늘이 보였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
이유가 어디에 있건 교단이 이단으로 지목한 단체의 수괴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 수하를 오른팔로 삼았으며, 그들이 하는 일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니 저들이 잘못된다면 자신 역시 그리될 공산을 배제할 수 없었다.
연락을 받은 푸리엘이 다과를 갖고 내려왔다.
푸리엘과는 자주 연락을 하고 있는지 다과를 내려놓은 푸리엘은 별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피구엘 역시 그녀를 따라갔다.
넓은 지하실엔 이제 어스와 로엘 둘만 남았다.
입을 가볍게 적신 로엘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어스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사방천지가 자신의 도움을 원하는 자들로 가득했다.
이는 그들에게도 좋고 자신에게도 딱히 나쁘지 않다.
그들은 던전과 몬스터로부터 안전해서 좋고, 자신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로엘의 요청만큼은 어스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교단이 자신을 향해 손을 쓰지 않는 이유가 만인이 자신을 원하고 있기에 내키지 않아도 지켜보는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종족 노예 해방 연합과 자신의 연관성이 밝혀진다면 그땐 더 이상 지켜보는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게 자명했다.
아도니스가 로엘에게 듣던 대로 종족 차별이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이면 모를까 아직 이를 확인하지 못한 처지에선 가족과 지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어스의 현재 처지였다.
‘루리아에게도 언젠가 말해야 하는데.’
로엘의 부탁이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의 부탁이기를 바라며 어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말하세요.”
* * *
로엘은 어스에게 이종족 노예 구입을 의뢰했다.
인기가 없는 노예들의 경우에는 금액만 맞으면 구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엘프나 드워프처럼 쓸모가 많은 노예들의 경우에는 좀처럼 팔지 않는다.
설사 팔게 되더라도 인맥을 통한 조용한 직거래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리아가 소개해준 중개인 한스가 대단한 사람인 것이다.
‘한스 씨는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그런 한스도 한계가 있다.
반면에 어스에겐 그러한 한계가 없다.
던전과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각국이 이에 고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보다 자신의 도움이 절실한 그들에게 지나가는 투로 한마디만 툭 던져 놓기만 해도 술술 풀릴 수 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건 대놓고 이 땅에 이종족의 나라를 세우려는 것처럼 보일 텐데.’
교단에겐 좋은 빌미가 될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사들인 이종족 노예가 외부로 빠져나가게 되면 이를 수상히 여긴 자들이 조사에 나설 수 있다.
친구보다 적이 더 많은 처지를 감안하면 확률 100퍼센트다.
어스가 가장 우려하는 건 바로 이점이었다.
일이십 명이야 빼돌려도 문제없지만 그 수가 수백을 넘어 수천이 된다면 그땐 변명의 여지도 없다.
이는 이단을 시인하는 짓이다.
‘일단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좋게 말하긴 했지만 엄청 섭섭해하던데.’
인간이고 엘프고 좋은 기분에 찬물 뿌리는 건 어찌 이리 똑같은지.
그렇다고 로엘을 매몰차게 대할 수는 없다.
교단과는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져버린 관계다. 그런데 여기서 이종족 해방 연합과도 틀어진다면 그땐 이 넓은 세상천지에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는 것이기에 연합은 어떻게든 잡고 있어야 할 동아줄이었다.
교단이 망하지 않는 이상엔 반드시 그래야 한다.
‘교단이 망한다?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세상엔 영원한 게 없다.
이를 알면서도 사람들은 교단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스 역시 그러한 사람들의 범주에 속했다.
교단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인물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어스의 이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틀에서 벗어난 이 사고는 자연스레 또 다른 사고를 촉발시켰다.
‘내가 교단을 망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쩌릿해졌다.
희열감은 잠깐이었다.
어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의 눈치를 살폈다.
신의 심판이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가 보인 이 반응은 일종의 조건반사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반발심이 생겼다.
강자는 순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자신의 뜻에 순응하게 만든다.
이 말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힘을 가진 자들의 공통적인 변화를 함축한 명언으로 오래전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어스는 이 말을 몰랐지만 강자의 반열에 들자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응하기보단 순응하게 만드는 일에 눈뜬 것이다.
그랬기에 교단을 망하게 만들 수 없을까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일을 지금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이었다.
홧김에 내지르는 게 아니었다.
어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교단과 싸워 이기더라도 문제가 영구히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단은 신을 따르는 자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다.
다시 말해 뤼빅스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박멸하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교단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자신의 주변은 신앙에 모든 걸 건 인간들의 무한 테러에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다.
‘신전이 싫으면 사제가 떠나야지, 신전 보고 떠나라 할 순 없겠지.’
그리 한발 물러섰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인간을 싹 사라지게 만드는 상상이 순간 들었다.
이에 어스는 화들짝 놀랐다.
방금 자신이 한 상상은 마왕이나 할 법한 상상이었으니까.
‘시스템의 본래 목적은 마법사 양성이 아니라 혹시 마왕 양성 목적으로 만들어진 건가?’
어스는 이 생각을 밀어냈다.
떨떠름한 기분도.
분위기 전환을 위해 그는 인벤토리에서 위그드라실 조각을 꺼내 들었다.
마음이 급격하게 차분해졌다.
-위그드라실의 계승자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활성화한다!’
칭호 활성화는 어스의 인생에 두 번째로 찾아온 혁명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거대한 환희를 선사했다.
그곳에 집을 짓고 영원히 들어앉아 살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특별한 성장은 영원하지 않았다.
칭호 활성화가 적용된 자신의 신체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힘을 음미하며 어스의 눈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넘쳐나는 힘에 전율했다.
* * *
칭호가 워낙 대단한 기능을 담고 있다 보니 혹시나 하는 심정에 어스는 영지 내 산속으로 들어가서 칭호를 활성화시켰다.
신변 보호를 위해 시쿠를 보초로 세웠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던 활성화 작업은 이틀이나 걸렸다.
그리고 이에 적응하기 위해 산속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
그렇게 삼 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아들?”
아버지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칭호활성화로 인해 어스는 육체적으로도 큰 성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그 특징이 외부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옷을 벗으면 확연히 드러나지만 적어도 옷을 입고 있는 지금의 그에게선 그 차이는 확연하지 않았다.
키가 커지긴 했지만 그래 봐야 손가락 한 마디 정도다.
이는 신발만 바꿔 신어도 가능한 성장이었다.
그랬기에 겉으로 드러난 그에게선 변화를 찾기 힘들었다.
알몸이 된다면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그가 미치지 않고서야 벌거벗고 돌아다닐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후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스의 아버지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특히.
“영주님?”
푸리엘은 선뜻 다가오지 못한 채 당황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를 보자 어스는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그건 바로.
“푸리엘, 나랑 대련 한번 하자.”
자신은 마법사다. 그래서 참 좋다.
하지만 때론 원거리에서 스킬만 펑펑 쓰는 것보다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젠 그게 가능해졌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70).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100/100). 승리의 노래(12/12).
생명력 : 1,500/1,500.
마나 : 1,270/1,270.
인벤토리 : 1(+6).
스탯 : 힘(102.6). 체력(223). 민첩(102.6). 지력(204). 정신(200).
직업 스킬(9/12) : 매직 애로우(+5/12). 파이어 애로우(+3/12). 파이어 볼(+3/12). 파이어 버스트(+3/12). 아이스 스피어(+3/12). 일루젼(+3/12).
콜 라이트닝(+5/12). 블링크(+3/12). 체인 라이트닝(+4/12).
업적 포인트 : 10.
코인 : 1,876,287.
상태창이 미쳤으니까.
‘어쩜 푸리엘을 꺾을지도.’
의기양양하게 제안했지만 돌아온 푸리엘의 반응은 짙은 의구심이었다.
“영주님, 지난 3일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많은 일이 있었지, 약골이 강골이 되었으니까.
어디 그뿐이랴 이젠 스킬도 세 개나 더 구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스킬 위력도 전에 없이 강력해졌다.
당연한 결과다. 지력이 2배나 늘어났으니.
그러나 지금은 오직 하나, 무술로 푸리엘을 꺾을 수 있느냐가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대련이나 하러 가자.”
마음이 급했던 어스는 푸리엘의 손목을 붙잡고 곧장 내달렸다.
푸리엘은 달라진 어스의 힘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힘을 주어 버텼지만 조금 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푸리엘을 당황시킨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어스에 대한 친밀감이 주체하기 힘든 만큼 샘솟는다는 점이었다.
신체를 접촉한 지금은 더욱더 그랬다.
이는 비단 푸리엘 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모든 엘프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