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다음 날, 어스는 왕궁에서 나온 인물과 함께 신전으로 향했다.
어스 입장에선 껄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에게 미운털이 박힌 처지였기 때문이다.
‘저저, 눈빛들 봐라.’
에스터 추기경이 사라진 이후 신전에서도 인사이동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낯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초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쌍심지가 서 있었으니,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윗선의 영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걸음걸음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담감이 정점을 찍은 건 지하 텔레포트 마법진 방에 도착해서였다.
거기서 어스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베로니카 단장과 거스티란 이름의 성기사였다.
“여기서 또 보는군요. 어스 백작.”
베로니카 단장의 싸늘한 태도에 어스는 잘게 몸을 떨었다.
마법사와 기사는 궁수와 검수라고 볼 수 있다.
원거리에선 궁수가 검수를 압도하지만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선 검수가 궁수를 압도한다.
하물며 눈앞의 저 여자가 어디 보통 검수인가.
기세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수다.
‘그래서 어쩌라고?’
대륙의 모든 왕국과 교단은 힘을 모아 던전에 대응하기로 앞서 합의했다.
한마디로 양측은 동맹이다.
그리고 그 동맹에 속한 인물이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 기죽을 필요 없다.
기세면 모를까 눈빛을 맞는다고 죽진 않으니까.
‘흠흠. 생명력은 그대로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어스는 남겨 둔 업적 포인트 5를 재빨리 체력 스탯에 분배했다.
사고가 터지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 터지기 전에 최선을 다해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지성인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자세인 것이다.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지, 결코 겁에 질려 놀란 마음에 허겁지겁 업적 포인트를 분배한 건 아니다.
체력 스탯에 분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베로니카 단장 앞에서 하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건 우연인 것이다, 우연!
“그러게요. 누가 보면 단장님이 절 쫓아다닌다고 오해하겠네요. 그럴 리 없는데. 하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전 공무상 급히 출장을 가야 해서요.”
베로니카 단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스는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베로니카 단장이 대동한 거스티 때문이었다.
“거스티 경, 이건 무슨 의미죠? 방금, 제 말을 못 들은 겁니까?”
베로니카 단장이야 사회적인 지위와 실력이 자신을 앞서지만 거스티 따위에게 꿀릴 어스가 아니었다.
어스는 포식자가 피식자를 바라보듯 거스티를 보았고, 그 눈에 담긴 어스의 의지를 읽은 거스티는 눈에 쌍심지를 세웠다.
아니, 횃불인가?
이래서야 교단이 운용하는 텔레포트 마법진은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생 중 가장 힘든 고생이 마음고생이라는 말을 절실히 깨달은 어스였다.
“단장님의 말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스 백작.”
“난 지금 공무 중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몬스터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솔론의 백성이자, 룬께서 아끼시는 종들입니다. 거스티 경의 행동은 바로 룬의 뜻을 어기는 행위 아닐까요?”
성기사 역시 성직자다. 고로 그들에게 룬을 팔면 백이면 백, 그 사유가 정당하면 물러설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곳엔 교단 측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왕국 관리도 있었다.
거스티도 자신이 어스를 막아설 명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뭐라 말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 얼굴을 보자 바닥을 쳤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거스티 경.”
“예, 단장님.”
“비켜서게.”
그제야 어스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다.
겉보기엔 당당한 걸음이었지만 실상 어스의 마음은 걱정이 가득했다.
‘엉뚱한 곳으로 보내는 거 아닐까?’
이를 배제할 수 없다.
교단이 폭주하면 대륙에서 이를 막을 세력이 없다.
그건 솔론 왕국도 마찬가지다.
불만을 표시할 수 있겠지만 거기서 끝이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안 되겠어. 도저히 저기에 발을 딛지 못하겠어.’
베로니카 단장을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보고 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은 정말 소중하니까.
그래서 어스는 마법진 바로 앞에서 몸을 홱 돌렸다.
우연인지 베로니카 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움찔.
베로니카 단장은 말이 없었다.
그 옆에 거스티는 히죽 웃었다.
‘진짜 마법진으로 장난질 치려 했던 게 아닐까?’
마법진 앞에서 돌아서긴 했지만 이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불안감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단순히 자신의 불안감이 원인은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어스는 두 사람을 외면하고 자신과 함께 온 왕실 근위대 부단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더글러스 경.”
“예, 백작님.”
“자력으로 노멜 후작 영지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더글러스 부단장 역시 장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어스를 만류하지 않았다.
“백작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더글러스 부단장이 반대하면 어쩌나 내심 조바심쳤던 어스는 그 말에 안도했다.
한편으론 더글러스 부단장 역시 자신이 느낀 불안감에 공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스는 자신의 선택에 더더욱 안도할 수 있었다.
“지금 동맹인 교단을 의심하는 것인가? 어스 백작.”
잠자코 있던 베로니카 단장이 말하였다.
그녀의 말이 어스의 귀엔 흡사 ‘작전 실패인가?’라는 말처럼 들렸다.
“의심이란 단어가 왜 여기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혹시, 제가 의심해야 할 점이 있었던 겁니까?”
“백작의 행동은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방금, 그대는 공무가 급하다고 한 것 같은데. 설마, 날 모욕하려는 것이었나?”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베로니카 단장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그 빌미는 자신에 국한된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솔론을 압박할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국왕과 왕세자가 난처해질 수 있음이다.
‘하츠 후작이 반길 상황이군.’
더해 국왕과 왕세자가 난처해진다면 어스 역시 입장이 곤란해진다.
우방은 없고 사방에 적이 깔리는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어스는 눈을 내리감았다.
감정이 아닌 냉철한 이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게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제가 몸이 아팠던 게 잦은 텔레포트 마법진 때문인가 싶네요. 베로니카 단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특이 체질이잖아요.”
마나 회복 포션을 통해 마나를 즉시 채울 수 있어 이 때문에 어스의 체질이 특이한 것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이런 이유를 들자 베로니카 단장도 더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어스가 자신을 스쳐 지나갈 때 베로니카 단장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너를 지켜볼 것이다.”
‘미친, 스토커가 되겠다는 거야?’
오싹했다.
어스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가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시쿠. 여기 폭삭 주저앉혀 버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패, 어스는 그 패를 사용했다.
‘시쿠, 주인님 말 듣는다. 큰 집 무너뜨린다. 확실하게.’
시쿠를 얻은 건 지금 생각하면 천운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어스는 왕도 신전에 큰 똥(?)을 싸지르며 유유히 신전을 나섰다.
* * *
신전을 나선 이후 어스는 노멜 후작 영지로 쾌속 이동 중에 있었다.
그렇게 한참 이동하던 중 시쿠에게서 의념이 날아들었다.
그 내용은 신전을 주저앉혔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어스는 시쿠를 냉큼 소환 해제시켰다.
‘흐흐, 이거야말로 완전 범죄지.’
임무를 마치고 왕도에 돌아올 날이 기대됐다.
* * *
하츠 노멜, 솔론 왕국의 소드 마스터이자 대영주인 그의 영지는 거대한 곡창지대를 끼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수의 광산도 보유하고 있어 하츠 후작의 부는 상당했다.
여기에 가문 대대로 내려온 부까지 합치면 측정할 수도 없다.
그러한 부를 통해 하츠 후작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다.
하나 그러한 강력한 군대도 고위급 던전 두 곳이 동시에 터지면서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
패퇴의 연속이었다.
영지의 3분의 1이 몬스터에 의해 잠식당하고 말았다.
교단과 인근 영지 그리고 중앙군이 속속 합류하여 몬스터의 확산을 틀어막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이 된 고위 던전의 몬스터들이 본격적으로 합류하자 상황은 다시 심각해졌다.
‘정반대에 위치한 던전 두 곳이 한날한시에 터진 것도 놀라운 일인데, 하필 둘 다 고위 던전이라니. 망조도 이런 망조가 또 있을까 싶네.’
하츠 후작 개인을 생각하면 이깟 영지 몬스터 밥이 되건 말건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왕국의 3대 곡창지대가 몬스터 손에 떨어진다면 그로 인해 발생할 후폭풍이 왕국 전역에 미칠 것이기에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왕세자가 약속한 상당량의 곡물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다.
“몬스터가 몰려온다!”
“빌어먹을 놈들 체력도 좋지. 하아.”
“기세가 만만치 않아.”
싸우기도 전이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땡땡땡땡-!
낙담한 병사들의 반응과 달리 경종은 힘차게 울었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이 주둔 중인 이 요새는 곡창지대를 지키는 중요한 거점이다.
만약 이곳이 무너진다면 병사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야전이 전부였다.
그러니 죽을 각오로, 아니 죽어서도 이 요새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병사들의 면면을 보면 그럴 의향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지원군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러다 우리 다 죽을 거야.”
“동부 전선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하다는 말 못 들었어?”
그러나 모든 병사들이 낙심한 건 아니다.
“룬께서 우릴 지켜 주실 것이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내라!”
교단에서 파견한 디콘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엔 저 말도 약발이 받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지금은 사기를 끌어올리지 못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사기지만 그래도 어쩌랴. 싸우지 않으면 죽을 판국이라 다들 이를 악물고 무기를 움켜잡는 모습이었다.
요새에서 가장 높은 건물 지붕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어스는 혀를 차며 블링크를 시전했다.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요새 성벽에 나타났다.
“헉! 뭐, 뭐야?”
“마, 마법사님 같은데?”
“마법사님들 모두 마나 없다고 내일이 돼야 전장에 투입된다고 들었는데.”
지휘관은 물론이거니와 병사들까지 어스의 출현에 어리둥절했다.
이에 어스는 어리둥절했다.
‘어라? 날 모른다고?’
사람들의 반응에 어스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보통 이런 식으로 짠하고 등장하면 다들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지휘관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어디 소속의 마법사십니까?”
말하기 전에 알아봐 주면 좋을 텐데.
그래도 먼저 떠드는 것보다 이편이 그나마 면은 살 수 있는 길이기에 어스는 자신의 아쉬움을 살짝 누르며 대답했다.
간결하게.
“어스 테리우스 백작이다.”
“백작님이요?”
지휘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그때 병사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괴, 괴물 마법사다!”
“뭐? 저 마법사님이 소문의 그 괴물 마법사라고?”
“소문엔 창을 들고…….”
‘아! 창을 빼먹었군.’
어스는 즉시 인벤토리에서 철옹성을 빼들었다.
“……창이다! 진짜, 괴물 마법사님이다!”
“헐.”
“이, 이러면 우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괴물 마법사님이 오셨는데 당연하지.”
어스가 한 것이라곤 창을 꺼냈을 뿐이다.
고작 그 행동 하나가 병사들의 사기를 미친 듯이 끌어올렸다.
“그런데 정말 소문이 사실일까?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잖아.”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혼자만 노를 외친 자.
어스는 그 병사를 흘겨본 뒤 요새를 향해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곤 보란 듯 몬스터를 향해 창을 쭉 뻗었다.
‘잘 봐라. 소문이 과장인지 아닌지 말이야. 파이어 볼!’
수십 개의 파이어 볼이 불꽃 궤적을 남기며 몬스터를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쾅쾅쾅쾅쾅-!
지력 스탯 100.
강화 수치 3.
이 두 힘이 합쳐진 파이어 볼은 단순한 파이어 볼이 아니었다.
3서클 수준을 넘어선 범위와 파괴력을 자랑한다.
그러한 파이어 볼이 무려 수십 개가 힘을 발휘하자 선봉에서 달려오던 하급 몬스터는 일순간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이 일은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니, 충격을 남겼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잠시 얼이 빠졌던 병사들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렁찬 함성이 터졌다.
“진짜다, 진짜 괴물 마법사가 우릴 돕기 위해 왔다!”
“우와아아아아아-!”
이런 유의 함성은 언제 들어도 나쁘지 않았다.
이에 힘입은 어스는 본격적으로 실력발휘에 나섰다.
아니, 그 전에.
‘존칭을 왜 빠트려. 내가 너희들 친구는 아니잖아.’
앞서 분명히 백작이라고 밝혔건만.
그래도 당장은 몬스터를 몰아내는 게 급선무였기에 어스는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 떨어진다!”
“마, 마법사님!”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성벽으로 다가와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엔 피딱지가 되어 있어야 할 마법사는 없었다.
“저기다! 저기에 마법사님이 계신다!”
성벽 아래가 아닌 저 멀리,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곳에 우뚝 서 있는 어스를 발견한 자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 순간 어스의 전면으로 스파크를 일으키는 거대한 백색의 번개가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꾸오아아악!”
그곳에선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