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꿀잠을 자고 있던 어스의 방문이 온 몸으로 울었다.
수면을 방해받은 사람은 안다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어스는 이를 꾹꾹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 파이어 애로우 한 대가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들어와.”
어스의 잠을 깨운 이는 시에라였다.
시에라는 원정으로 인해 자리를 비운 푸리엘의 업무를 대신 맡아 보고 있었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 영주님.”
자신을 깨운 대상이 여동생이었다면 짜증을 쏟아냈겠지만 상대가 시에라였기에 어스의 태도는 상냥했다.
“괜찮아. 일이 있으면 깨우라고 한건 나잖아. 그래, 무슨 일이야?”
“베로니카 단장이란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베로니카?”
“이름을 전하면 영주님이 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어스가 아는 베로니카는 단 한 명이다.
교단 제일검.
‘웬만한 일로 교황의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지 않나?’
그간 교단에서 보낸 자들이 몇 있었지만 그중 베로니카 단장과 같은 무게를 가진 인사는 없었다.
어스는 심상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어디 있지?”
“초소 앞에 있습니다.”
“초소? 설마, 그 정문 초소를 말하는 거야?”
“예.”
“마찰은 없었어?”
“문자엔 그런 내용이 없었습니다. 지금 확인할까요?”
어스는 십부장들에게도 일괄적으로 마법 통신구를 지급했다.
다른 영지의 경우 백부장에게도 지급되지 않는 것이 바로 마법 통신구다 그런 통신구를 십부장에게 모두 지급한 것은 돈지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스는 그 지랄(?)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 지랄이 제 주머니를 털어 산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스터 추기경의 지시를 받은 레이몬드 주교가 보낸 물품 중에서 최신형 마법 통신구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아끼지 않고 풀어버렸다.
이러한 그의 결정 덕분에 명령과 보고는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돌려보내자니 베로니카의 이름값이 가볍지 않았다.
“영주님?”
“잠시만 기다려.”
어스는 인벤토리에서 마법 통신구를 꺼내 레이몬드 주교에게 문자를 보냈다.
마법 통신구를 손에 쥐고 있기라도 한 듯 레이몬드 주교에서 즉시 답신이 왔다.
-베로니카 단장이 왔다고? 설마, 그 베로니카 단장을 말하는 건가?
-교단 제일검 맞아요.
-자네 괜찮겠나?
-괜찮지 않을게 뭐 있어요.
-아무래도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느낌이…… 느낌이 안 좋아.
-뭔가 있었어요?
-실은, 얼마 전에 베로니카 단장이 추기경님을 찾아왔다네. 추기경님은 교황께서 항복한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셨지. 다른 이도 아닌 베로니카 단장이 왔으니까.
-그게 아니었군요.
-협상이 목적이었어.
-일이 잘 안됐나 보군요.
-맞네, 협상은 결렬됐지. 하필 왜 이때 그녀가 자넬 찾아간 건지 모르겠네. 추기경님과도 연락이 닿지 않는데.
-추기경님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요? 지금 왕도에 계신 거 아니에요?
-어제 저녁에 자리를 비우시곤 아직 오지 않으셨네. 연락도 없고.
레이몬드 주교의 답신에 어스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문자를 받자마자 바로 답신을 보낸 거였구나. 추기경님의 연락이 올까 봐.’
-자네, 베로니카 단장을 만날 건가?
-그냥 돌려보내기엔 꺼림칙한 신분이잖아요.
-그렇지. 그럼…… 단장에게 넌지시 에스터 추기경님에 대해 물어봐 줄 수 있겠나?
-설마, 교단에서 추기경님께 손을 썼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아니지만 이런 일이 없던 분이라 혹시나 싶어서.
-일단 만나보고 나서 연락드릴게요.
-조심하게. 베로니카 단장이 나섰다면 이는 교황께서 작정하신 게 틀림없으니까.
마법 통신구를 인벤토리에 던진 어스는 시에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응접실로 모셔. 그리고 경비 수준을 최고로 올려.”
마법 통신구를 사용하는 어스의 표정과 그 명령이 매우 심각했기에 시에라도 덩달아 긴장한 듯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곤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힌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신경이 예민해진 어스는 그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리곤 그런 자신의 반응에 기분이 상했다.
‘내가 죄인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지만 어쩌랴.
아도니스 대륙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손에 쥐기까지는 최대한 버텨야 한다.
이주가 혼자만의 문제면 모르겠지만 가족들의 장래도 달렸으니까.
‘젠장 남은 조각은 대체 언제 주려는 건지.’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61/100).
칭호 활성화까지 남은 조각의 숫자는 39개다.
이것만, 딱 이것만 손에 넣는다면 베로니카 단장이 아니라 교황이 직접 방문해도 이처럼 쫄리지 않을 텐데.
1. 차원 이동(재사용 30일).
2. 모든 스탯 +100.
3. 스킬 슬롯 +3.
‘조금만, 조금만 참자. 로엘 씨가 빈말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 * *
마음을 단단히 추스른 어스는 응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엔 크고 잘 벼린 검 한 자루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순간 이에 당황한 어스는 뒷걸음질 치며 눈을 비볐다.
그의 행동에 베로니카 단장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 이채와 함께 베로니카 단장이 의도적으로 뿜었던 기세가 갈무리되었다.
‘뭐지? 정신계 마법에라도 당한 건가?’
다시 눈을 떠 바라보니 당장이라도 자신을 벨 것처럼 보였던 검은 오간 데 없고 그 자리에 베로니카 단장만이 앉아 있었다.
대체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꿀꺽.
“오랜만이군요. 어스 경. 아! 이젠 어스 테리우스 백작님이라고 해야겠군요.”
“오랜만입니다, 단장님. 성하는 무탈하신가요?”
“무탈하십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군요.”
대답을 미소로 대신한 어스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몸은 어떤가요?”
“모든 짐을 내려놓으니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
“안색이 창백하군요.”
어스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남들처럼 두툼한 남자다운 몸을 갖는 게 일생 소원인 어스에게 있어 이는 말 못 할 고민이었다.
아니, 저주였다.
아무튼 그런 저주받은 체질 덕분에 햇빛을 받지 못해 하얘진 얼굴은 그를 병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던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몹시 마음이 아프더군요. 룬께서 제게 큰 재능을 주셨는데, 재능을 담은 이 그릇이 변변치 않아 내내 슬펐습니다. 그래도 성하께서 큰 결단을 내린 덕분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생업을 잇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 몸이 보다시피 부실하여 성기사의 직분을 내려놓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성하와 교단을 경애하고 있습니다.”
어스는 목소리에 힘을 쫙 뺀 채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말하였다.
‘마법사가 아니라 연극배우를 해도 출세했겠어.’
베로니카 단장의 어깨너머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에 어스는 내심 감탄했다.
그렇게 자화자찬하던 어스의 표정은 베로니카 단장의 말 한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경직되고 말았다.
“맥박이 힘차군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어스 백작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백작의 심장 박동이 들립니다. 야생마처럼 건강한 심장이군요. 제가 여러 병자를 보아왔지만 그중 어스 백작 같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되도 않는 연기는 그만두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스는 심장이 철렁했다.
이건 그로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어스는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 숙였다.
“어스 백작.”
베로니카 단장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어스의 고막을 푹 찔렀다.
움찔.
‘철옹성이라도 쥐고 있었어야 했어.’
베로니카 단장이 자신을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이런 식의 방문은 애초 없었을 테니까.
“하아. 이건 생각 못 했네요. 심장 박동으로 건강까지 체크할 줄이야.”
“인정하는 겁니까?”
“그전에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듣죠.”
“제가…… 아니, 날 왜 귀찮게 하는 거죠? 성기사 직도 내려놓고 내 영지나 돌보며 조용히 살겠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더라고요.”
더 이상 어스에게선 주눅 든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다.
“삐딱한 태도로군요.”
“이해해 주세요. 전 아직 십 대인 걸요. 아무튼 난 내 영지에서 쭉 지금처럼 살 생각입니다. 그러니 교단에서 더는 절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룬께서 주신 생명과 재능을 헛되이 쓰겠다는 말이군요.”
어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음일까? 베로니카 단장의 전신에서 매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무형의 그 기운은 삽시간에 넓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탁자 위의 꽃병의 물이 누군가 쥐고 흔드는 것처럼 심하게 출렁거렸고, 그 병에 꽂힌 꽃은 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바닥처럼 갈라져 파르르 떨었다.
그럼 어스는 괜찮을까?
아니, 괜찮지 않았다.
생명력 : 640/795.
‘미, 미친. 지금 날 죽이려는 건가?’
이처럼 어스는 크게 놀랐지만 베로니카 단장이 보기엔 아니었나 보다.
베로니카 단장의 기세가 더 세차게 끓어올랐다.
그러자 그 기세를 감당 못 한 꽃병의 꽃이 끝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꽃병 역시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와작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그, 그만두지 못하겠습니까!”
그새 생명력이 또 떨어졌다.
생명력 : 410/795.
어스가 버럭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어스의 신형은 응접실 끝에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손에 철옹성이 쥐어져 있었다.
이를 본 베로니카 단장의 두 눈엔 의혹이 가득했다.
전투 영역에 가둔 마법사가 아무런 제한 없이 마법을 쓴 때문이었다.
“놀랍군요. 백작을 직접 노린 건 아니지만 여파도 상당했을 텐데 그걸 받고도 멀쩡할 수 있다니.”
‘저거 완전 미친년이네. 미친년이었어!’
다년간 기른 포션 빨리 먹기 신공을 발휘한 어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생명력을 풀로 채웠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저 베로니카 단장과 충돌하면 그 순간 교단과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그리된 것일지도.
‘곤란한데.’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한 그 순간 베로니카 단장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서.
“오늘은 손님으로 찾아왔지만 내일은 이단 심판관의 자격으로 찾아 올 겁니다. 그러니 내일까지 잘 생각하세요. 룬께서 주신 재능에 책임을 다할 것인지 아니면, 세속적인 권력을 탐하는 파렴치한 자의 뒤를 쫓을 것인지 말입니다. 참고로 난 어스 백작이 전자의 길을 걸었으면 합니다. 룬께서 당신에게 주신 재능은 참으로 귀하니까요.”
일방적인 통보를 날린 베로니카 단장은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탁!
문이 닫히는 그 소리에 어스의 기분은 더 이상 구겨질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
‘저 자식…… 에스터 추기경을 죽인 거야. 죽인 게 확실해.’
때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다.
* * *
“단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어스를 몰아붙였던 베로니카 단장의 표정은 유쾌하지 않았다.
특출한 마법사인 건 알았지만 그래 봐야 고작 5서클 마법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펼친 전투 영역에서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사용하였으며,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자신의 기운을 받고도 상처 하나 없다는 점이었다.
‘……괴물 마법사라더니 진짜 괴물이군.’
우뚝 멈춘 베로니카 단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저택을 응시했다.
서늘한 눈빛을 하고서.
“단장님?”
“하루의 말미를 줬으니 생각이 있는 자라면 자신의 처치를 깨닫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 것이다. 그리고 감시 수위를 높이도록 지시해.”
“예? 설마 그가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가족이 있는 이상 저 혼자 살겠다고 달아나는 일은 없을 거야. 지금까지 놈의 동향을 보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진심인 녀석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말에 올라탄 베로니카 단장은 말허리를 박찼다.
두두두두.
그녀의 수행원들도 황급히 말에 올라 그 두를 쫓았다.
‘단장님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보지 않고, 듣지 않으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일은 오늘 같지 않으리라는 걸.
“이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