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푸리엘의 개인사정으로 인해 애던 마을의 던전 원정은 며칠 유보했다.
짐승이 그러하듯 몬스터 역시 피 냄새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며칠이란 시간이 비게 되자 어스는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여동생의 요청을 받아들여 1띠 던전에 들어갈 원정대를 꾸렸다.
루시, 시에라, 조나단 외 이종족 노예중에서 가장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는 병사 10명을 뽑았다.
‘이만하면 전력은 차고 넘치지.’
아니, 오히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쥐여 준 꼴이다.
하물며 거기에 초이까지 합류시켰다.
그렇게 루시는 이들과 함께 원하던 던전 원정에 나설 수 있었다.
부모님이 크게 걱정했지만 던전에 대해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기에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원정대의 실력을 직접 볼 수 있게 조치했다.
루시가 이끄는 원정대가 던전에 들어간 이후에도 어스의 야간 활동은 쉬지 않았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어느 날, 어스의 영지로 대규모 군대가 들어왔다.
“군대?”
“예.”
“어이가 없네, 내가 병자 행세를 하고 있어서 날 만만히 본 건가?”
“그게 아니라 모두 이종족입니다.”
“이종족? 아! 레이몬드 주교가 말한 그들이 도착한 거로구나! 그렇지?”
영지전인가 싶어 놀라 잠이 확 달아났던 어스는 마법 통신구를 꺼내 레이몬드 주교에게 연락했다.
최근 신형 마법 통신구가 시중에 풀리면서 웬만한 자들은 모두 구형 마법 통신구를 버리고 문자수와 사용 대기 시간이 사라진 신형 마법 통신구로 교체한 지 오래다.
그래서 이전처럼 마법 통신구로 인한 스트레스는 겪지 않았다.
-주교님, 내 영지에 이종족들이 왔는데 주교님이 보내신 거 맞아요?
-오! 이제 도착했나 보군. 맞네, 맞아. 전에 말한 그들일세.
-제 수하 말로는 대규모라고 하던데 대체 몇이나 보낸 거죠?
-더 많이 보내고 싶었지만 이종족의 용도가 영지군이라고 해서 나름 추리고 추리다 보니 얼마 안 되네. 오백 명일세.
백 명만 보내 줘도 입이 떡 벌어질 일이다.
그런데 그 다섯 배를 보내줬으니 그들의 마음씀씀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스는 자신의 진심을 문자에 담아 레이몬드 주교에게 보냈다.
그렇게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어스는 활짝 웃으며 푸리엘을 보았다.
“오백 명이야. 내가 나서서 확인하긴 그러니까 푸리엘이 나 대신 인수해 줘. 마법 계약서는 내게 가져오고. 아! 그리고 식량과 그들이 쓸 무구도 함께 보냈다고 하니까 그것도 인수하고.”
“연합의 1년 치 성과네요. 오백 명이라니.”
이종족 노예는 돈이 있다고 무조건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소유자와의 까다로운 협상이 필요하다.
선호도가 다소 떨어지는 이종족 노예일 경우에는 협상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와 대장장이 종족이라 불리는 드워프의 경우에는 구입이 매우 어렵다.
그렇다고 무력을 동원할 수도 없다.
노예 계약서로 묶인 이상 그들의 생사는 주인의 뜻에 달렸으니까.
그러니 내키지 않아도 연합은 협상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 봐.”
“예.”
푸리엘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곧장 그의 방을 나섰다.
‘내 노옌데 지가 왜 더 기뻐하는 거야?’
좋았던 기분이 갑자기 식어 버렸다.
‘내가 뤼빅스에 발붙이고 살지 못할 날이 온다면 그땐 연합에 맡길 수밖에 없긴 하지.’
원하는 모든 걸, 아니 그 이상을 손에 넣었지만 그 미래까지 밝은 건 아니다.
교단과 적인 연합.
연합의 적인 교단과 이래저래 엮인 입장에선 두 세력이 딴마음을 품는 순간 영지는 순식간에 박살 나고 말 것이며, 자신은 내키지 않아도 연합의 손을 잡아야 한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푸리엘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그러니 이를 연합의 성과로 보는 시각이 아예 잘못되었다곤 볼 수 없었다.
‘급 우울해지네.’
어스는 기분전환을 위해 상태창을 열었다.
91이었던 지력 스탯은 어제 100을 찍었다.
코인의 경우 1백만을 넘겼다.
거기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도 두 개나 남아 있었다.
‘던전 없었다면 어쩔 뻔했어.’
업적 포인트를 버는 방식이 레벨업 하나뿐이었다면 체력, 지력, 정신 스탯의 세 자리 수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스의 입장에서 던전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던전은 재앙이다.
‘에스터 추기경과 교단의 협상이 잘 해결되면 그땐 지금처럼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움직이지 않아도 될 텐데.’
던전과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교단은 성전을 선포했지만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건 교단의 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던전에선 정찰능력 부족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고, 현세에선 던전 브레이크 지역이 중구난방이었기 때문이다.
* * *
교황청 근위대 단장이자, 교단 제일검 베로니카.
에스터 추기경을 방문하여 그녀와 몇 차례 접촉하여 이야기를 나눈 그녀는 가슴에 실망을 안고 교황청으로 복귀했다.
“단장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고집은 여전한가 보군.”
“솔론, 헥터, 필리스에 대한 인사권과 동원령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 3개 왕국으로 자신의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의도인가?”
“성전 선포 이후 실권을 빼앗긴 에스터 추기경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현재 에스터 추기경 파벌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에 에스터 추기경이 솔론, 헥터, 필리스 왕국의 교권을 확보한다면 그녀가 이끌고 있는 파벌은 전보다 더 강한 힘과 결집력을 가질 게 자명했다.
아딜레스 교황 입장에선 몹시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성전까지 선포한 상황이라 에스터 추기경의 요구조건을 수용한다면 그땐 교단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공산이 컸다.
누군 해주고 누군 안 해준다는 말이 필시 나돌 것이기에.
“어스 경의 마음을 진정 돌릴 방법이 없을까?”
“병을 핑계로 외부와는 철저히 담을 쌓고 있습니다. 만남을 가져야 대화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마저도 어렵다 보니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어이가 없군. 고작 그 하나를 얻기 위해 3개 왕국을 내줘야 하다니.”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 아딜레스 교황이었지만 이번 일은 몹시 분개하고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올라오는 보고는 인류의 종말이 다가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피해가 심각했다.
거기다 대륙 서남 지역을 휩쓴 가뭄으로 인해 식량난까지 예고된 상황이다.
“성하,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슨 뜻인가?”
“에스터 추기경이 성하의 깊은 뜻을 무시하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배경엔 어스 경이 있습니다. 그녀에게서 그만 떼어내면 에스터 추기경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리적인 수단?”
“테리우스 영지로 이단 심판관을 보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하자는 건가?”
정치적인 목적, 혹은 교섭을 위해 간혹 교단이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아딜레스 교황은 이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교황에 오른 이후 용인되지 않는 방식이기도 했다.
교황은 자신의 신념과 현 상황을 저울질했다.
그 결과.
“솔론은 에스터 추기경의 영향력이 여전히 살아 있네.”
자신의 신념을 접기로 했다.
그만큼 사안이 심각했기에.
베로니카 단장은 교황을 향해 경의를 표하였다.
“제가 이단 심판관으로 테리우스 영지로 가겠습니다.”
“단장이 말인가?”
“저 역시 이단 심판관의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제가 나설 경우 성하의 명예입니다.”
“그건 내려놓았네.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룬의 수많은 종들을 생각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닐세. 다만, 이 문제는 추후 단장의 명예도 걸린 일일세.”
“어찌 감히 제 명예가 성하의 명예보다 높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에스터 추기경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 *
1띠 던전에 보냈던 원정대가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무사히 돌아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원정대와 함께 돌아온 루시는 던전에서 돌아온 뒤 곧장 수련에 집중했다. 실전을 경험하면서 무언가 얻은 게 있는 듯 기세가 전보다 더 버려진 느낌이었다.
어스로선 반가운 일이었다.
“내일 던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새롭게 추가된 5백 명의 이종족 노예는 푸리엘이 제 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에 편재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더해 농장을 요새처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막대한 재물이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든든한 물주를 물고 있는 어스에겐 제 돈 한 푼들이지 않고 이를 시행할 수 있었다.
“조심해. 그리고 시쿠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해. 쓸모가 클 거야. 다방면으로.”
“예, 참 이건 이번에 들어온 자들에 대한 보고섭니다.”
이번에 들어온 이종족 노예는 나름 전사로 길러진 자들이라 그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덕분에 영지에 몇 없던 익스퍼트의 숫자는 75명이 증가하여 총 78명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법사와 정령사도 얻었다.
마법사는 총 34명, 정령사는 9명이었다.
어느 하나 쉽게 구할 수 없는 그런 귀한 인력이다.
이들에 비해 부족할 뿐이지 다른 이들 또한 꽤 쓸 만하다.
“수고 많았어. 내일 던전에 들어가 봐야 할 테니까 오늘은 일찍 쉬어.”
“그럼, 편히 쉬세요.”
“참, 나 배웅 못 해. 알지?”
“물론이죠.”
푸리엘을 돌려보낸 어스는 한쪽으로 밀어두었던 보고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에스터 추기경이 지금 하고 있는 협상만 잘 마무리되면 이 생활도 이젠 끝일 텐데.’
수면을 위해 쳐 놓은 커튼을 흘낏 본 어스는 생성한 파이어 애로우를 흩뜨린 뒤 다시 누웠다.
‘루리아 보고 싶네.’
꿈속에서라도 그녀를 볼 수 있길 바라며 잠을 청하는 어스였다.
* * *
애덤 마을에 출현한 5띠 던전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애덤 마을 주민들은 영주의 명령을 받아 던전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우려 가득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정대 인원이 고작 넷뿐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중 셋은 이종족.
교단의 지속적인 세뇌로 인해 이종족에 대한 차별의식이 깊은 사람들에게 있어 이는 못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일까? 주민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스 백작님이 우리 영주님이 되셨다는 말을 들었을 땐 던전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될 줄 알았더니. 이게 뭐람.”
“영주님을 원망할 일은 아니지. 아프셔서 활동을 못 하시는 건데.”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불안하니까 그렇지, 불안하니까.”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안 좋은 소식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솔론 왕국은 다른 왕국에 비해 사정이 낫지만 그것도 언제 바뀔지 모르기에 큰 숲과 산을 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고 있었다.
어스의 영지민들도 그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고향을 떠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그래도 다른 영지에 비하면 세금이 낮잖아.”
“자넨 목숨보다 그깟 세금 적게 내는 게 좋단 말인가?”
불안감을 표출하는 주민들을 낯선 무리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공손한 태도로.
“베로니카 단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과연 원정에 성공할 것 같습니까?”
낯선 무리는 이단 심판관의 자격으로 테리우스 백작 영지를 찾은 교단 제일검 베로니카와 그녀의 수행을 맡은 성기사들이었다.
“넷 모두 실력이 만만치 않더군.”
베로니카 단장의 말에 질문한 성기사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다른 이도 아닌 교단 제일검의 말이었기에.
“단장님이 인정할 정도면 예사로운 실력이 아니겠군요. 그럼 그들이 원정에 성공하리라 보십니까?”
“원정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뭐라 답하긴 어렵군.”
“단장님이 인정할 정도의 인재면 어스 백작에게도 중요하겠군요.”
“쉽게 버릴 패는 아니지.”
“그렇다면 어스 백작이 몰래 저 던전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 말에 베로니카 단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으니까.
“거스티 경.”
“예, 단장님.”
“몇 명을 붙여 줄 테니, 거스티 경이 저 던전을 지켜보게.”
“제가 말씀입니까?”
처음에 의견을 제시했던 거스티는 당황스런 목소리로 반문했다.
하지만 돌아온 베로니카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래 주게.”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럼 단장님은 곧장 어스 백작을 만나러 가시렵니까?”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한 베로니카는 남은 수행원들을 이끌고 말을 몰았다.
두두두두두.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베로니카 단장 일행을 쳐다보던 거스티는 괜한 말로 제 발목을 잡았다며 몹시 아쉬워했다.
‘내 그놈의 뻔뻔한 면상을 보려 했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