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교황 아딜레스의 성전 선포 이후 교단은 그간 드러내지 않던 힘을 온전히 드러냈다.
지금까지 말만 무성했던 디콘(세속 사제)의 숫자가 드러났다.
그 수는 물경 백만에 달했다.
뤼빅스 대륙의 모든 왕국의 병사를 모으더라도 그 숫자엔 이르지 못한다.
더구나 디콘이 사용하는 장비는 예전부터 부러움을 샀을 정도로 좋다.
그러한 좋은 장비를 착용한 병력이 백만에 달하였으니 교단이야말로 뤼빅스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여기던 자들마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교단이 가진 힘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마나 소드를 사용하는 수만 명의 성기사를 교단은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투 사제라 불리지만 실제는 마법사인 그들의 숫자 역시 대단히 많았다.
그들이 가진 실력 역시.
또한 교단 직속의 비밀 연구 기관에서 연구하고 개발에 성공한 물품들이 성전 선포를 계기로 세상에 선을 보였으니, 이를 본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교단의 마도학은 우리보다 한 세대를 앞서가고 있었구나!
이러한 말들이 공통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러한 교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고초를 겪고 있던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민심은 오직 교단을 향해 흘렀다.
반면 대륙의 모든 왕들과 귀족들 입장에선 속이 쓰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륙을 뒤덮은 암운이 거치고 새날이 온다면 교단의 위상은 전보다 한층 더 높고 빛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추기경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교황의 성전 선포 이후 교단 내에서 추기경들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했다.
전시 상황에서 지휘권 단일화는 기본 중의 기본이기에.
하지만 모든 추기경들의 영향력이 줄어든 건 아니다.
일부 추기경들, 특히 성기사와 전투 사제 출신의 추기경들의 경우에는 보다 강력한 권한을 쥐게 되었다.
반면 평범한 사제 출신의 사제들은 성전에 필요한 물품의 수급과 보급 따위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 권한 또한 적지 않았지만 기존에 누리던 권한에 비하면 이는 그들 입장에선 나락이나 다름없었다.
“곧 가겠다.”
밖에 있는 사제에게 대답한 에스터 추기경은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레이몬드 주교가 앉아 있었다.
초조한 표정을 하고서.
“추, 추기경님. 베로니카 단장이 방문한 이유가 뭘까요?”
“어스 경에 관해서겠지.”
교단은 수천 년간 축적된 힘을 개방했다.
그럼에도 단숨에 대륙에 드리운 암운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지에서 비롯된 던전 브레이크의 영향으로 인한 당장의 거센 불길은 잡을 수 있었지만 던전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 싸움의 종착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지금 인류는 바로 그러한 전쟁을 하고 있었고, 교단은 수천 년 전 이종족과의 종족 전쟁 당시처럼 선두에 있었다.
인류의 유일한 등불이던 시절처럼.
하지만 종족 전쟁 당시와 달리 현재의 상황은 딴판이었다.
이종족의 숫자는 한정적인 반면 던전은 그와 같지 않았으며, 인류의 승리를 안겨주었던 데릭 가이어스란 초월자 역시 없었다.
‘과거엔 교단에 데릭 가이어스가 있었지만, 현재 그의 자리를 대신할 자는 어스 테리우스 백작 그 하나뿐일 것이다.’
에스터 추기경은 이러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던전에서 구해주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쭉.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에 에스터 추기경은 어스라는 카드를 쥐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어스가 자신의 편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사퇴라는 이름으로.
이는 에스터 추기경에겐 매우 유용한 카드였다.
“교황의 복심이자 그림자인 그녀가 직접 찾아온 이유가 그 말고 또 무엇이겠나? 참, 이종족 노예는 어찌 되었나?”
“조만간 테리우스 영지에 도착할 겁니다.”
“백작이 만족하겠군.”
“추기경님의 통 큰 지출에 어스 백작도 깜짝 놀랄 겁니다.”
“일간 테리우스로 내려가서 백작을 만나 그를 잘 다독이게. 그럼, 난 베로니카 단장을 만나러 가겠네.”
에스터 추기경은 만면에 자신감을 드러내며 걸음을 옮겼다.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그 모습에 레이몬드 주교는 활짝 웃었다.
꽉 막혔던 상황이 지금부터 술술 잘 풀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 * *
똑똑.
“오빠? 자?”
밤낮이 바뀐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요즘, 밤에 자는 것보다 낮에 자는 것이 더 편해진 어스는 여동생 루시의 방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깼다.
허공에 파이어 애로우 두 개를 띄워놓은 어스는 잠기운에 막힌 목을 푼 뒤 소리 냈다.
“들어와.”
방안으로 냉큼 들어온 루시는 허공에 뜬 파이어 애로우를 일별한 뒤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몸은 괜찮아?”
“나쁘지 않아.”
“뱀파이어가 따로 없네, 없어.”
“그보다 무슨 일이야?”
“애덤의 그 던전에 원정대를 보낼 거라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무, 무슨 상관이라니. 장차 테리우스 백작 영지의 기사가 될 사람인데 당연히 나도 상관있지.”
“설마, 원정대를 따라가겠다는 말은 하지 마라. 이번 원정은 확실한 실력을 갖춘 소수정예로 원정이 이뤄지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 없는 애 같아? 당연히 알지.”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그 표정은 뭐야?”
루시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어스의 눈치만 살폈다.
보아하니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미리 말하는데 지금은 수련이나 열심히 해.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부모님 잘 보살펴 드려.”
“누가 들으면 엄마아빠 모두 노인으로 알겠네. 우리 엄마아빠 젊거든. 그리고 두 분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내가 아니라 오빠지.”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자식이 아프다는데 편할 부모는 없다.
그러니 이 문제에 있어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 문제도 조만간 해결될 것이다.
레이몬드 주교의 자신만만한 문자가 바로 그 근거였다.
“그래서 찾아온 용건은 뭐야?”
“우리 영지에 1띠 던전 있는 거 알아?”
더 이상 들을 필요는 없다.
“거기 들어가겠다고?”
“실전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잖아.”
루시의 실력에 대해선 푸리엘로부터 얼마 전 보고받았다.
유저 중급은 충분히 된다는 내용이었다.
유저 중급이면 용병으로 따지면 은패 용병이다.
14살의 나이에 은패 용병이면 수재라는 말을 들어도 충분한 재능이다.
그렇다고 순수한 재능 하나로 루시가 유저 중급 수준에 이른 건 아니다.
몸에 좋은 영약을 비롯하여 실전경험이 풍부한 거너, 아그네스, 린다를 통해 기초를 다듬었으며, 이후 익스퍼트 검사가 보호도 해주고 곁에서 검술을 봐주고 있었다.
이러니 실력이 늘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것이다.
물론 지원이 능사는 아니다.
줘도 못 먹는 자들이 수두룩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재능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그래서 거기 들어가겠다고?”
“아, 안 될까?”
“현실과 이상은 달라.”
“고블린은 나도 잡아봤어. 고향 마을에서. 오빠도 알잖아? 나 그때랑 많이 달라졌어. 힘도 더 세졌고 무술도 배웠어.”
루시의 두 눈은 열정으로 끌어오르고 있었다.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어스는 만류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허락할게. 대신 이번 원정에서 초이가 돌아오면 그때 그녀와 함께 들어가는 게 내 조건이야.”
“초이랑?”
“거부는 없어.”
“초이랑 가라는 건 내 안전 때문에 그러는 거지?”
“알면 됐어.”
“그럼 초이만큼 강한 사람이랑 함께 가면 허락해 줄 거야?”
여동생의 모습에서 어스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어스는 기억을 되짚었다.
푸리엘, 알엘, 에리엘 그리고 연합에서 마법진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한 마법사 피구엘을 제외하면 초이와 견줄 수 있는 개인은 영지에 없었다.
그럼 녀석은 외부인을 초청하려는 걸까?
‘녀석에게 그런 인맥이 있을 리 없는데.’
일단 대화를 더 나눠보기로 했다.
여동생의 저 자신만만한 이유 역시 궁금했다.
“누구?”
“시에라와 조나단.”
“시에라? 지금 하녀장으로 있는 그 시에라를 말하는 거야?”
“맞아. 그 시에라.”
엘프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시에라는 혼혈이 아닌 순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외모가 엘프에 가까웠다.
고결한 기품에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밝은 백금발에 두 눈은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진한 녹색의 눈을 갖고 있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답게 행동이나 말투도 무척이나 고상한 편이었다.
그래서 처음 시에라를 봤을 때 어스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가끔 시에라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아름다워서.
“시에라가 강한지 네가 어떻게 알아?”
“초이가 그랬어, 자신은 시에라의 상대가 아니라고.”
시에라와 초이 사이에 모종의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니 초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시에라가 초이보다 강하다는 점이다.
“그건 당사자를 불러서 물어보면 되겠지. 그런데 조나단은 또 누구야? 그 사람도 농장에 있는 사람이야?”
“전 자경대 대장인 사람이야.”
“자경대?”
“응.”
“그럼 조나단에 대해서 말한 사람도 초이인가?”
“아니, 내가 우연히 봤어. 조나단이 수련하는 걸.”
이종족에 비할 순 없지만 혼혈 역시 차별 대상이다.
그러다 보니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을 제대로 써먹을 곳이 없다.
아니, 오히려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어 일상생활이 더 힘들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오빠?”
“왜?”
“안 될까?”
“일단 두 사람을 만나보고 나서 말해 줄 테니까. 시에라와 조나단을 내 방으로 올려 보내. 가는 김에 푸리엘과 초이도 올려 보내고.”
어스의 태도를 반승낙이라고 여긴 루시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내 집에 그런 능력자들이 있었다니.’
종족이 달라도, 순수한 인간이 아니더라도 실력만 있으면 중용할 마음이 있었다.
문제는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시에라와 조나단의 처지에서 내 영지 이외에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어. 그러니 싫든 좋든 날 배신할 여지는 적어.’
그렇다면 둘을 제대로 써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 * *
어스는 푸리엘, 초이, 시에라, 조나단 네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스가 농장주이던 시절 그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점, 혼혈에 대한 차별이 없다는 점에서 시에라와 조나단을 비롯해 농장에서 일하던 혼혈들은 어스에게 이미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영주가 되었다.
농장의 주인일 때의 그와 영주가 된 그를 대함에 있어 혼혈 모두가 조심스러워했다.
농장을 잠시 쉬다 가는 별장 용도로 여긴 전과 달리 지금은 농장을 포함하여 인근 12개 마을의 다스리는 영주였기에.
그래서 시에라와 조나단을 비롯한 혼혈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랬던 그들은 곧 안심했다.
노예의 신분이긴 해도 이종족들이 대거 농장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주인 어스가 그들을 어찌 대하는지도 곁에서 보았기에.
이러한 시간이 있었기에 시에라와 조나단은 자신의 힘에 대해 숨기지 않고 이실직고했다.
어스는 두 사람의 실력을 푸리엘을 통해 검증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이 자신에 대해 가진 생각 역시.
“좋은 인재를 거뒀네요.”
“그러게. 참 원정에 데려갈 녀석이 있어.”
“누굴?”
“직접 봐.”
어스는 푸리엘이 보는 앞에서 시쿠를 소환했다.
“주인님이 시쿠 불러줬다. 시쿠는 주인님께 감사한다. 응?”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하던 시쿠는 낯선 인영을 보곤 멈칫했다.
푸리엘 역시 시쿠의 등장에 깜작 놀라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시쿠와 푸리엘은 서로를 빤히 응시하다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스를 향해.
“주인님, 저 여자의 몸에서 피 냄새 많이 난다.”
‘피 냄새? 선을 넘은 감시자라도 벤 것인가?’
전엔 각 세력이 보낸 감시자들이 어스가 머물고 있는 농장 내 저택 주변을 감시했다면 지금은 교단이 보낸 감시자들에 의해 모두 물러가고 오직 교단에서 보낸 자들이 있었다.
교단의 지시가 있었는지 아직 감시는 농장 외곽에서만 이뤄질 뿐 농장 내부로 침입한 경우는 아직 없었다.
이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약속을 깼다면?
‘죽여 마땅할 짓이긴 한데.’
교단이 이를 문제 삼아서 자신의 신병을 구속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땐 솔론 왕국도 힘을 쓰지 못한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에스터 추기경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
지금의 추기경은.
‘어차피 놈들은 신분을 위장하고 있어, 그러니 교단이 이를 문제 삼는다면 역으로 내가 따져 물어도 될 거야.’
만약 교단이 비상식적으로 나온다면 그땐 가족을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피신시킨 뒤 교단을 향해 선전 포고를 날려도 된다.
‘내가 작정하고 미친놈처럼 날뛴다면 제아무리 교단이라도 손쓸 방법은 없지.’
이는 교만도 아니고 오만도 아니다.
실력에 근거한 자신감의 발로이다.
어스는 각오를 다지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런데.
“푸리…… 엘?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 빨개. 어디 아파?”
얼굴만 빨갛게 물든 게 아니다.
푸리엘답지 않게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느낌이 왔다, 번쩍하고.
‘시, 시쿠 저 녀석이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어떻게, 어떻게 그런 해괴망측한 말을…….’
하긴 녀석이니 가능한 말이지 싶긴 하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할 기본적인 교육조차 녀석은 받지 못했으니까.
거기다 녀석은 인간도 아니지 않는가.
‘그나마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