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루리아와 함께한 시간은 좋았다.
하나 예전처럼 구김 없이 온전히 좋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면 기울수록 미래에 대한 걱정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리시아 영지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루리아의 아버지와 아침을 먹고 나머지 시간은 루리아와 함께 보냈다.
다행히 어제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법 통신구로 레이몬드 교주에게 자신의 불쾌감을 격렬하게 표현한 덕분인지는 몰라도.
-아이템 철옹성의 강화 작업이 끝이 났습니다.
루리아와 점심을 먹고 한적한 강가로 왔다.
그때 알림이 울렸다.
곧장 철옹성의 기능을 확인했다.
추가된 기능은 없고, 기존 기능중 하나에 변화가 있었다.
무형 방벽의 재사용 시간이 기존 12시간에서 1시간 줄어 11시간이 되어 있었다.
무형 방벽의 범위는 기존 반경 2미터에서 1미터 증가하여 3미터가 되었고, 유지 시간의 경우 5분이었던 것이 6분이 되어 있었다.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언젠가는 재사용 시간 없이 무형 방벽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이 얼마나 고무적인 일인가.
“어스는 수영 잘해?”
물놀이 복장으로 갈아입은 루리아가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었다.
피식.
웃음이 절로 나왔다.
부끄러워하는 루리아의 모습에.
그러나 무심코 시선을 내린 순간 어스 역시 사과가 되고 말았다.
어스의 나이 열여섯.
루리아의 나이 열여덟.
손끝만 스쳐도 활활 타오를 물오른 나이다.
그런 남녀가 반라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역사가 이뤄지고도 남을 순간이다.
더구나 주변은 인적하나 없는 장소가 아닌가.
이참에 확 결혼해 버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내 제동이 걸렸다.
교단과 이종족 해방 연합이란 두 단체의 이름이 떠오른 순간.
애국가보다 더 약빨(?)이 좋다.
시무룩.
뻗힌 혈기는 순식간에 죽었다.
그래도 남은 불씨가 만만치 않았기에 어스는 강물로 몸을 던졌다.
곧 후회했다.
깊어도 더럽게 깊었다.
꼬르르.
가라앉는 그를 루리아가 구해줬다.
또 한 번 빚을 졌다.
“수영 못해?”
“분명 우리 마을 냇가에선 잘했는데. 아무래도 강물이랑 냇가는 다른가 봐요.”
이후 어스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더 물을 마셨다간 체할 것이기에.
그래서 루리아와 함께 일광욕만 즐겼다.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고서.
두근두근.
다행히 손만 잡았다.
중간에 수문장이 퇴근하는 바람에 큰일(?)이 일어날 뻔했지만 애국가보다 더 강한 교단이, 이종족 해방 연합이 그의 위세를 단숨에 죽여 버렸다.
* * *
늦은 저녁이 되어 다시 솔론의 왕도로 돌아왔다.
숯검댕이가 되어.
사무실에 잠깐 들렀지만 레이몬드 주교는 퇴근하고 잡무를 보는 서무만 둘 남아 있었다.
‘이 시간까지 일하는 건가?’
던전 처리부에 사무 업무가 그렇게 많았던가?
원정을 제외한 다른 일은 일체 하지 않다보니 사무 쪽은 젬병이었다.
신전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번화가가 나왔다.
거리는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 냄새와 그 냄새에 이끌려 자리 잡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저녁은 루리아와 그 부친과 함께 먹고 왔기에 딱히 배고프진 않았지만 간식은 이와 상관없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라 몇 개 사먹었다.
오물오물.
시대의 영웅, 룬의 사자, 던전 파괴자, 괴물 마법사라는 거창한 이명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어스였지만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로브라도 입고 있었다면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을 테지만 지금 입고있는 건 평상복이라 관심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삼거리가 나왔다.
우측으로 빠지면 집으로 가는 길이다.
삼거리에서 잠시 고민하던 어스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페어몬트가 있으려나.’
20분을 걷자 페어몬트의 집 앞에 도착했다.
페어몬트는 부유했지만 저택이 아닌 중산층 거주지의 평범한 집에 살았다.
대문을 두드리자 페어몬트가 나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식사는 했어요?”
“시간이 몇 신데. 넌?”
“먹었죠. 간식까지 든든하게.”
“안으로 들어가자.”
창문을 활짝 열어둔 응접실에 들어간 어스는 소파에 앉았다.
작은 정원과 그에 맞는 크기의 분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페어몬트 어깨너머 그 풍경을 눈에 잠시 담고 다시 페어몬트에게 눈길을 주었다.
“얼굴이 많이 탔네. 물놀이라도 하고 왔어?”
지금은 한창 더운 7월 중순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물놀이를 즐기기 딱 좋은 날씨다.
때문에 어스처럼 얼굴이 탄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었다.
반면 페어몬트는 집에서만 생활하고 있는지 건강미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생기도 없어 보인다.
“글리시아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다녀온 거야?”
“그렇죠.”
“세상에 너만큼 텔레포트 마법진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더구나 공무도 아니고 사적인 용도로 말이야. 하하.”
“부러워요?”
“모험가 시절에 너처럼 이동할 수 있었다면 대륙의 모든 유적지를 다 돌아봤을 거야.”
“그 시절이 그리워요?”
“평생 모험가로 살아왔어. 당연히 그립지.”
“지금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동료가 없잖아, 동료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프라이스 형은 빈둥…….”
오우거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탕탕.
“페어몬트, 저예요, 문 열어요!”
프라이스가 왔다.
짧고 굵은 다리를 교차하며 페어몬트가 프라이스를 대동하고 왔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러는 형은.”
“나? 나야 백수잖아. 돈 많은.”
“연애나 할 것이지 노인네 집은 왜 왔어요? 이 시간에.”
“그러는 너야말로…… 어라, 얼굴은 왜 그래? 물놀이라도 하고 온 거야?”
“글리시아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루리아 영애는 잘 있어?”
“잘 있죠. 고개 아프니까 앉아요.”
자리가 많음에도 프라이스는 굳이 어스의 옆에 앉았다.
날도 더운데.
“술 마셨어요?”
“한정판 와인이 경매에 나왔더라고 그래서 사자말자 바로 한잔 했지.”
세상 편한 팔자다.
젊지, 돈 많지, 거기다 중급 정령사다.
프라이스의 인생이 진정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런 건 두고두고 음미하는 거 아닌가?”
“또 사면 돼. 돈이 없냐? 시간이 없냐? 페어몬트는 다 늙었으니 시간이 아쉽겠지만 나야 고작 열여덟이라고. 앞으로 70년은 거뜬해. 하하.”
페어몬트의 주먹이 프라이스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다.
하나 그 손은 이내 중간에서 멈추었다.
“선물. 구입하는 김에 페어몬트 것도 구입했어.”
“오! 한정판! 누군 빈손으로 왔는데 말이야.”
그 누군가는 바로 어스였다.
“우리 사이에 선물은 무슨.”
“친밀할수록 잘해야지. 나 죽으면 내 재산 너 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사회에 기부해야겠어.”
“나? 날 왜 줘요?”
“내가 형제가 있냐? 부모가 있냐? 그렇다고 처자식이 있냐?”
“프라이스 형도 있잖아요.”
“저 녀석? 지금 가진 것도 차고 넘쳐. 거기에 더 얹어줘 봐야 그딴 걸 왜 주냐는 소리 나 들을걸.”
설마.
그런데 프라이스의 심드렁한 표정을 보니 진짜일 것 같았다.
대체 저 형의 재산이 얼마기에.
“뭘 봐?”
“형 재산이 그렇게 많아요? 대체 그 많은 재산은 어디서 얻은 거죠? 혹시, 유산?”
“뭔 소리야. 내가 피땀 흘려서 번거야.”
“프라이스 말은 바로 해라. 네가 벌었냐? 노임 덕분에 대박 터져서 갑부 된 거지.”
뭔가 사연이 있는 듯했다.
“노임과 나는 한 몸인 걸 잊었어요? 그보다 어스 넌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페어몬트만 있으면 모를까 프라이스도 있다 보니 말 꺼내기가 꺼려졌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그래서 대충 둘러댔다.
다행히 이를 물고 늘어질 사람은 여기 없었다.
“간만에 좋은 술이 들어왔는데 어때? 한잔할래?”
“카멜 형을 부를까요?”
명색이 왕잔데 부른다고 달려오면 그게 어디 왕자냐? 동네 백수…….
“곧 온데요.”
마법 통신구로 연락하자마자 바로 연락이 오는 카멜, 왕자는 신분 높은 백수인가?
카멜이 곧 도착했다.
공간 주머니에 안주가득 담아서.
어스도 그에 뒤지지 않는 음식이 인벤토리에 곱게 모셔진 공간 주머니에 가득 있었다.
그중 일부를 꺼내놓자 중대급 인원이 모여 파티를 해도 될 만큼의 양이 차려졌다.
술도 있고, 안주거리도 있고, 좋은 사람들도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래서 어스는 과음했다.
아니, 폭주했다.
가시처럼 박힌 근심을 잠시 내려놓고자.
“히끅, 내가요…… 이종족을 아는데 글쎄 걔들이…….”
그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 * *
짹짹.
참새 한 쌍이 창문에 앉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에 깬 어스는 몰아치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처음엔 사람이 술을 마셨다.
거기까진 기분이 좋았다.
이후 술이 자신을 마시는지, 자신이 술을 마시는지 애매한 지경에 처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지만 다들 부어라 마셔라 옛 이야기까지 풀어 놓으며 왁자지껄 떠들자 그 분위기에 취해, 프라이스의 도발에 넘어가서 술 마시기 게임으로 넘어갔다.
술 빨리 마시기 게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어스는 아래층으로 걸음했다.
거기에 카멜, 프라이스 그리고 이 집의 주인인 페어몬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어스는 내부에서 불안감이 급격하게 피어올랐다.
해선 안 될 말, 왠지 그런 말을 취중에 한 것 같았다.
띄엄띄엄 떠오른 기억이.
‘마, 망했다!’
“깼냐? 깼으면 이리 와서 앉아.”
페어몬트의 말에 어스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흠흠, 어제 엄청 마셨죠? 하하. 기억이…….”
“어떻게 된 거야?”
“말해.”
“진짜냐?”
페어몬트를 시작으로 프라이스, 카멜이 말하였다.
“어, 어디까지?”
페어몬트와 카멜은 차마 제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인지 망설였다.
반면 프라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성기사들 제쳤다며?”
“내, 내가 그것도 말했……어?”
사고 쳤다.
그것도 대형 사고를.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하던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찰나에 든 생각을 털어냈다.
하지만 순간이나마 가졌던 그 마음이 죄책감을 선사했다.
“그래서 이종족 해방 연합에 협박을 받고 있는 거야?”
“그, 그것도 말한 거야?”
“그들의 수송선을 이용해서 페어몬트를 아도니스로 보낼 거라는 말도 했다. 거기 분위기 좋으면 가족들과 튈 거라고. 참, 생각해 보니 이 말도 했구나. 루리아 영애는 납치해서라도 반드시 데려갈 거라고. 질질 짜면서 그러더라.”
“형. 노임 좀 불러줘.”
“뭔 소리야?”
“그냥…… 하아, 날 이대로 파묻어 줘.”
“농담하지 말고 말해. 진짜냐?”
술김에 소설을 썼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프라이스, 페어몬트, 카멜을 차례차례 보았다.
진지했다, 다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했다.
그런 이들에게 술김에 소설 썼다라고 어찌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워낙 중차대한 문제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어제처럼 술을 마셔야하나?
“그래, 진짜야. 나 신고해도 돼. 내 실수니깐 신고해도 세 사람은 원망하지 않을게. 다만…….”
“다만?”
“복수는 할 거야.”
퍽.
페어몬트의 손이 어스의 뒤통수를 쳤다.
아프지 않다, 생명력 덕분에.
“아씨, 왜요!”
“헛소리한 대가다. 아니, 동료를 의심한 대가다.”
“신고…… 안 할 거예요?”
“그럴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진작 했지 다들 이러고 있었겠냐? 어쨌건 이제 우리도 너와 한 배에 탔어. 솔직히 말하자면 난 네 이야기 듣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아도니스로 가마.”
“나도 간다.”
“프라이스 형은 왜?”
“돈쓰며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지겨워서 못해먹겠더라고.”
흰소리도 세상 저런 흰소리가 없을 것이다.
배부른 자의 투정이지만 한편으론 각자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다른 걸 생각하면 마냥 비난할 순 없다.
“카멜 형은?”
공식 석상에선 왕자님, 사석에선 형 동생이다.
“나도 간다. 아도니스로. 그리고 확인할 거야. 던전의 여부를.”
페어몬트와 프라이스는 호기심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아도니스 행을 결정한 반면 카멜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던전의 여부라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흠흠, 그렇게 나오면 나야 고맙죠. 그런데 그 말 이외에 혹시 다른 말은 안 했어요?”
“또 있냐? 쪼그만 게 비밀은 특대형이야, 특대형.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로 우릴 놀라게 할 거냐?”
프라이스의 반응을 보니 시스템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다.
“혹시나 해서.”
“여하튼 그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봐. 아도니스로 넘어가려면 그 수송선을 타야 할 테니까.”
“그런데 다들 정말 괜찮겠어요? 이 일이 교단의 귀에 들어가면 뤼빅스에선 발도 못 붙일 텐데.”
“주선이나 해.”
그들의 태도는 확고했다.
고맙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