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던전 내부는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에선 오랫동안 방치한 다락방에서 나는 마른 먼지 냄새가 물씬했다.
물기 없는 흙은 살짝만 비벼도 모래알갱이 흘러내리듯 손에서 흘러내렸다.
‘막막했겠네.’
원정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서 자발적으로 던전에 들어오면 모를까 부지불식간에 휩쓸린 경우라면 몸에 걸친 것이 전부다.
던전 내부에서 식수와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여건이 성립되면 걱정해야 할 것은 오직 몬스터뿐이겠지만 이런 자연환경에선 원초적인 걱정이 더 앞설 것이다.
그 걱정이란 바로 식량과 식수다.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이 던전에 휩쓸린 건 3일 전이다.
그러니 지금쯤 탈진 상태일 확률이 높다.
‘서둘러야겠군.’
콧속으로 들어오는 먼지를 차단하기 위해 코와 입을 천으로 가린 어스는 블링크를 시전했다.
지상처럼 하늘 역시 메마른 것인지 조금의 물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사막형 던전보다 여기가 더 메마른 것 같네.’
3일이 아니라 첫날부터 탈진자가 속출하지 않았을까 싶다.
로엘과 푸리엘에게 마음의 빚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생존자를 최대한 확보하고 싶은 어스에게 있어 이는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블링크를 연거푸 시전하던 어스의 눈에 처음으로 움직이는 물체가 포착됐다.
생존자들인가 싶어 냉큼 고도를 낮추었다.
가만히 있어도 고도는 자연스럽게 낮춰지지만 마음이 급한 탓에 블링크까지 사용했다.
‘언데드?’
어스로 하여금 기대를 품게 만든 존재는 생존자가 아닌 던전 몬스터였다.
놈들은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닌 구울이었다.
동토의 던전에서의 서리 구울을 시작하여, 헥터 왕국 왕도를 휩쓴 구울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서리 구울급인가?’
구울은 일반인이 상대하기 벅찬 상대다.
6띠 던전의 구울이건, 4띠 던전의 구울이건 적어도 일반인들에겐 그런 존재다.
하물며 이 던전은 6띠다.
놈들을 처리하려던 어스는 마음을 접었다.
지금은 하나만 생각해야 한다.
생존자 확보 혹은 던전 보스 처치가 바로 그것이다.
어스는 놈들을 무시하고 다시 블링크를 시전했다.
그렇게 몇 번 블링크를 시전하여 이동하던 그의 눈에 이번엔 5백에 가까운 구울 무리가 들어왔다.
‘아깝네.’
저게 다 코인이고 경험치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안위를 우선해야 하다 보니 어스는 이번에도 놈들을 지나칠 생각이었다.
저 중에 보스가 있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아쉽게도 저 무리엔 보스가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동하려 할 때였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구울 무리가 돌연 괴성을 지르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어스는 놈들이 달려가고 있는 방향을 살폈다.
놈들을 자극할 만한 요인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놈들의 행동이 심상치 않았기에 어스는 좀 더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어스는 생존자를 볼 수 있었다.
‘평범한 바위가 아니었구나!’
구울 무리가 접근하자 바위는 신기루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한 십수 명의 이종족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어스는 곧장 손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이종족들의 반응이 더 빨랐다.
“체인 라이트닝!”
체인 라이트닝을 시작으로 파이어 볼이 그 뒤를 따랐다.
파츠츠.
쾅쾅-!
파이어 볼의 연이은 폭발로 인해 일대는 마른 먼지로 뒤덮였다.
구울을 공격하는 건 비단 마법 하나만이 아니다.
불과 바람 그리고 땅의 정령이 공격에 가세했다.
원거리 공격은 엘프들의 몫이었다.
수인족들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 근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프들의 공격은 강력했지만 일격 필살의 효과를 내는 공격 수단은 고작 체인 라이트닝 하나에 불과했다.
나머지 공격 수단은 적의 진군속도만 늦출 뿐이다.
신체의 일부가 잘리고, 꿰뚫리고, 불탔음에도 구울의 진군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흉흉한 기세를 피어 올리며 진군에 박차를 가하였다.
놈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혔던 체인 라이트닝 공격도 네 번을 끝으로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마나 부족이 원인이었다.
체인 라이트닝을 시전했던 엘프는 이번엔 등에서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탕탕탕-!
시위를 떠난 화살은 유도 마법이라도 부여된 것처럼 정확하게 구울 머리에 명중했다.
좀비의 약점이 머리 듯 구울의 약점 역시 머리라 머리에 화살이 박힌 구울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파이어볼을 날리던 엘프들도 곧 활을 빼들었다.
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의 숫자는 크게 늘어났지만 적의 수가 워낙 많다보니 커다란 연못에서 물 한바가지 뜨는 수준에 불과했다.
화력도 부족하고 머리수에서도 확연히 밀리는 이종족들의 미래는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나름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그건 막다른 길에 내몰린 자의 저항에 불과했다.
더는 지켜 볼 수 없었기에 어스는 곧장 개입했다.
상공에서 지상까지 찰나에 이동한 어스는 구울을 향해 체인 라이트닝을 연속으로 날려 보냈다.
번쩍.
번쩍.
번쩍.
섬광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앞서 엘프 마법사가 시전한 체인 라이트닝에 비해 어스가 시전중인 체인 라이트닝의 위력이 훨씬 강력했다.
이를 증명하듯 어스가 날린 체인 라이트닝에 당한 구울의 몸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 인간?”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엘프를 비롯한 수인족들은 어스의 출현과 활약에 크게 놀랐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그들을 놀래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
“마, 맙소사! 마법을 숨 쉬듯 내뱉고 있었다.”
“체인 라이트닝의 위력이 콜 라이트닝과 동급 수준이라니 마, 말도 안 돼!”
콜 라이트닝과 체인 라이트닝은 동급의 마법이다.
그러나 파괴력에선 콜 라이트닝이 체인 라이트닝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콜 라이트닝은 단일 대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고, 체인 라이트닝은 다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체인 라이트닝의 파괴력이 단일 대상을 상대로 만들어진 콜 라이트닝급의 위력을 내고 있었으니 이 차이를 알고 있는 이들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괴, 괴물 마법사!”
* * *
무려 5백에 이르는 구울이 쓰러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도 되지 않았다.
다수의 마법사가 힘을 모은 상황이라면 모를까 고작 한 명의 마법사에 의해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스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본 이종족들이었지만 다들 소문을 믿지 않았다.
과장과 허풍은 인간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꿀꺽.
‘소, 소문이 사실이라니.’
‘오히려 소문이 실제보다 덜 하다니. 인간들이 그새 겸손을 배운 건가?’
자신들을 위협하던 구울은 모조리 사라졌지만 이종족들은 더 큰 적을 만난 피식자처럼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어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종족에게 있어 인간은 적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까 허튼 생각은 하지 말아요.”
어스 역시 그걸 잘 알기에 여차하면 무형 방벽을 생성할 생각을 하고서 말하였다.
“인간인 당신이 어떻게 연합의 비밀 거점을 알고 있는 거지?”
“로엘 씨의 요청으로 온 거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말아요.”
“로엘 님이 당신을 불렀다고?”
“아니면 내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왔겠어요. 그보다 여기 있는 분들이 전분가요?”
“우리가 어떻게 당신 말을 믿지?”
“구해줘도 믿지 못하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죠. 어차피 던전 보스를 처치하면 모두 밖으로 나가게 될 테니까 로엘 씨를 만나면 그때 의구심을 풀도록 해요. 난 보스를 찾으러 가야 하니까 지금처럼 버티고 있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저들과 입씨름할 동안 보스를 찾아 처치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 어스는 몸을 돌렸다.
그가 막 블링크를 시전하려 할 때였다.
“정말, 로엘 님이 당신을 불렀나? 혹시…… 혼혈인가?”
이종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혼혈 역시 인간 사회에선 차별받고 있다.
그럼 이종족에게도 혼혈은 차별받고 있을까?
농장의 혼혈들을 보며 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눈빛이 조금 달라졌네. 저들은 혼혈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건가?’
그런 면은 인간이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싶었다.
‘인간에 대한 적대감으로 볼 때 로엘이나 푸리엘은 혼혈일 확률이 높겠네.’
혼혈이라고 해서 그들 모두 이종족의 특징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다.
외향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없는 혼혈도 존재한다.
이 경우 그들은 신분을 감추고 생활하고 있다.
혼혈들 사이에서 그들은 축복받은 자라고까지 불리었다.
그러나 가족과 지인을 외면하고 살아야 하는 입장에선 그게 과연 축복일지는 의문이다.
만약 자신이 혼혈이라면 가족들과 함께 아도니스로 탈출하는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쉽진 않겠지만 고통 받는 가족을 외면하고 사느니 어렵더러도 그 편을 택하는 게 마음 편할 테니까.
‘저자가 내게 혼혈이라고 묻는 순간 다른 이들의 표정도 많이 부드러워진 것으로 봐선 혼혈에 대한 이종족의 거부감은 없나보네.’
물론 저들만 놓고 전체를 단정할 수 없으나 인간과 비교하면 그나마 이종족의 마인드가 더 낫지 싶었다.
“내가 아는 한 내 조상 중에 이종족은 없어요.”
“그럼 어째서 우릴 돕는 거지?”
약점이 잡혀 서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비밀은 아는 자들이 적을수록 그나마 더 지켜지는 법이니까.
“모든 인간이 이종족을 노예처럼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아무튼 되도록 빨리 보스를 처리할 테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버티고 있어요. 조만간 나가게 해줄 테니까.”
떠나기 전 어스는 인벤토리에 든 공간 주머니 중 하나의 내용물을 털어 이종족들에게 건넨 뒤 곧장 블링크를 시전했다.
* * *
보스를 찾아 이동하던 중에 어스는 또 다른 무리의 이종족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서와 달리 그들은 남녀노소가 섞인 무리였다.
어스가 접근하자 그를 본 이종족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앞서 본 자들은 구조대고, 저들은 노예 출신인가 보네.’
인간들에게 당한 게 많으니 인간을 보자마자 적개심부터 드러내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달려드는 이들은 없었다.
다들 탈수 상태였기에.
그래도 허기와 갈증을 제외하면 저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도 받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떠난 뒤 구울이 나타날 수 있는 노릇이라 어스는 시쿠를 소환하여 그들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저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해.’
‘주인님의 말을 시쿠는 복종한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안배까지 마친 어스는 곧장 이동했고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던전의 보스를 찾을 수 있었다.
6띠 던전 보스는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 정도 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6띠 던전 원정에 난항을 겪고 있는 건 그들에겐 어스처럼 사기에 가까운 이동 기술이 없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블링크를 배운 건 신의 한 수였어.’
새삼 블링크의 소중함에 찬사를 날린 어스는 단일 대상에게 큰 위력을 발휘하는 콜 라이트닝을 시전했다.
줄기차게.
콰르르릉, 번쩍!
보스는 매우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번개보단 느렸다.
몸뚱이 역시 그 못지않게 무척이나 튼튼했다.
하지만 계속 되는 공격 앞에선 그 튼튼한 몸도 버텨낼 수 없었다.
번쩍!
“크아아아아아아-!”
놈의 육신은 이내 잿더미가 되었다.
내내 처 맞다가.
-황야의 구울 보스 프라츠를 처치했습니다.
-1만 코인을 습득합니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 4를 습득합니다.
전투의 난이도에 비해 보상은 후했다.
비행 능력과 원거리 능력이 없는 보스란 어스에겐 움직일 수 있는 튼튼한 샌드백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템이 발견되었습니다.
‘아이템?’
귀가 솔깃했다.
하지만 앞서도 습득할 수 없었기에 이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까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이템을 습득하시겠습니까?
‘습득.’
-아이템 강화석을 습득하였습니다.
-아이템 철옹성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 철옹성에 강화석을 적용하시겠습니까?
아이템을 강화할 수 있는 아이템의 출현은 이번이 처음이라 어스는 크게 놀랐다.
그러나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수 없었다.
곧 던전은 사라질 테니까.
‘적용!’
-아이템 철옹성에 강화석을 사용합니다.
-강화 내용은 24시간 후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체 얼마나 좋게 변하려고 24시간이나 걸린단 말인가? 아이템을 처음 얻었을 때처럼 어스의 심장은 기쁨으로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