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난 어스의 몸 상태는 몹시 좋았다.
영약이라도 복용한 것처럼 가뿐했다.
“내가 주인님 지켰다!”
펫은 자신의 짧은 목을 최대한 길게 뽑았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 몸짓이었다.
그래도 나름 쓸모가 있다 보니 어스는 녀석이 원하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게 좋은 것인지 사족보행을 하던 녀석이 돌연 이족보행 동물처럼 벌떡 일어나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덕분에 웃었다.
“주인님 웃었다. 주인님 나 이름 있으면 좋겠다. 부탁한다. 주인님 내게 이름을 다오.”
이 또한 딱히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기에 어스는 즉석에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좋아, 앞으로 넌 시쿠다, 시쿠.”
“시쿠? 시쿠 좋다. 앞으로 난 주인님의 시쿠다. 주인님 존경한다. 이름 멋지다!”
솔직히 깊이 생각하고 지은 이름이 아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 기르던 개의 이름이 바로 시쿠였다.
시쿠는 주인을 위해 제 한 몸 불사른 멋진 녀석이다.
어스는 매직 애로우를 모두 마나로 치환했다.
잘 먹고 잘 잤으니 사냥을 개시할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푼 어스는 여전히 덩실덩실 춤추는 시쿠를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나 일해야 하니까 넌 들어가서 쉬어.”
“주인님, 시쿠도 주인님과 함께 일하겠다. 시쿠는 강하다. 나를 믿어 달라.”
검은 사슬 나가에게 던져주면 한입거리도 되지 않으리라.
그런데 펫은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인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야.”
“주인님, 나는 야가 아니라 시쿠다. 방금 주인님이 이름 지어줬다.”
“시쿠, 너 죽으면 어떻게 돼?”
“시쿠는 죽지 않는다. 나는 주인님의 동반자다. 주인님이 살아 있는 한 나도 산다.”
“오! 불사?”
끄덕끄덕.
들쥐나 두더지는 식용이 가능하다.
자신에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녀석 덕분에 굶어 죽는 비참한 일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템을 먹고도 고작 이런 용도로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니 그렇게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쿡쿡.
“주인님 웃는 거 멋지다. 헤헤.”
녀석의 해맑은 웃음에 순간 양심이 쩌릿했다.
“자식 아부는. 아무튼 네가 불사란 말이지? 좋아, 그럼 나랑 같이 사냥한번 해보자.”
같이 사냥하자는 말에 시쿠는 두 발로 일어서서 또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쿠를 귀환시킨 어스는 곧장 움직였다.
그렇게 십수 번 블링크를 사용하자 소수로 움직이는 검은 사슬 나가 무리를 발견했다.
놈들의 이동경로 전방으로 이동한 어스는 시쿠를 소환했다.
“주인님이 금방 찾아줘서 기쁘다.”
“곧 몬스터가 올 거야. 네가 놈들을 상대해봐.”
녀석의 사냥 실력을 보고자 함이 아니다.
녀석이 말한 것처럼 진짜 불사인지 아닌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다.
검은 사슬 나가 무리는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쿠는 놈들을 냄새로 단숨에 알아차렸다.
‘여기서도 놈들이 접근하는 걸 알아채다니…… 저 녀석 의외로 쓸모가 좀 있네.’
10여 분이 흐르자 드디어 검은 사슬 나가들이 보였다.
놈들을 보자 시쿠는 입술에 가려 보이지 않던 이빨을 드러냈다.
눈만큼이나 작은 입이었지만 그 입이 무색하게 이빨은 맹수를 닮았다.
“주인님을 괴롭히는 녀석은 시쿠가 용서하지 않는다.”
거북이 등껍질에 돌연 돌기가 생기나 싶더니 이 돌기 모두 촉수가 되었다.
시쿠의 덩치가 고작 성인 팔뚝만하다보니 촉수 역시 가늘었다.
이쑤시개 세 개를 합쳐 놓은 굵기였다.
이방인을 발견한 검은 사슬 나가들이 괴성을 지르며 접근했다.
빙판 위를 달리는 썰매처럼.
상공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 장난 아니게 빨랐다.
전투를 위해 길러진 말과 필적할 속도였다.
만일 저런 녀석들이 현실에 쏟아진다면 도주는 시도조차 못하고 잡아먹히지 싶다.
시쿠는 자신보다 훨씬 큰 덩치의 검은 사슬 나가 무리를 향해 주저 없이 달려들었다.
‘조그만 게 겁도 없네.’
전투에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주인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은 없을 것 같아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녀석의 불사 여부를 확인하려던 생각이 조금 흔들렸다.
양측은 곧 격돌했다.
시쿠가 빨라서가 아니라 놈들이 빨라서였다.
시쿠는 촉수를 부챗살처럼 퍼트려 놈들을 공격했다.
검은 사슬 나가들은 이에 콧방귀를 꼈다.
놈들은 시쿠를 무시했다.
그래서 촉수가 다가와도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놈들은 오직 어스만 노리고 있었다.
그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검은 사슬 나가도 놀라고, 지켜보던 어스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가냘프고 연약하게만 보였던 시쿠의 촉수가 단단한 검은 사슬 나가의 몸뚱이를 달궈진 바늘이 치즈를 파고 들어가듯 막힘없이 파고들어갔다.
아무리 얇은 바늘이라도 심장이나 뇌를 찌르며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놈들은 흡사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렇게 두 마리가 시쿠의 촉수에 당했다.
순식간에 당한 동족의 모습에 나머지는 순간 깜짝 놀랐다가 이내 격분하여 시쿠의 몸통보다 굵은 사슬로 후려쳤다.
드디어 시쿠의 불사 여부를 확인할 절호의 기회였다.
‘귀환시킬까?’
막상 시쿠에게 위기가 닥치자 마음이 약해졌다.
하나 시쿠가 당하는 일은 없었다.
시쿠의 몸이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졌다.
검은 사슬 나가의 사슬은 지면만 때렸다.
위력이 상당했기에 지면에 깊은 흔적이 남았다.
‘대체 얼마나 깊이 들어간 거야?’
어스만큼이나 검은 사슬 나가들도 깜짝 놀랐다.
시쿠의 촉수에 당한 두 마리는 바닥에 쓰러진 채 힘겨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놈들은 발밑을 살폈다.
그때, 놈들의 발밑이 아래로 푹 꺼졌다.
검은 사슬 나가들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졌다.
어스 역시 깜짝 놀랐다.
그 큰 덩치의 나가들이 모두 눈앞에서 사라졌기에.
접근하여 무슨 상황인지 살필 순 없었다.
접근했다가 공격 받을 수 있으니까.
어스는 놈들이 사라진 상공으로 블링크를 시전했다.
그렇게 이동하고 나서야 어스는 검은 사슬 나가 무리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 쪼그만 녀석이 단숨에 저런 깊은 구덩이를 팠다고?’
보지 않았다면 결코 믿지 않았으리라.
시쿠의 덩치는 고작 성인 팔뚝 길이, 그런데 나가 무리를 삼킨 구덩이의 깊이는 못해도 20미터는 된다.
검은 사슬 나가의 체고는 2미터, 하지만 바닥을 기는 역할을 하는 하체는 대략 7미터다.
꼬리 끝의 힘만으로 몸을 세워도 구덩이의 깊이는 놈들의 체고 두 배 이상이다.
놈들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노력은 결실로 이어지지 못했다.
구덩이가 다시 깊어진 것이다.
그것이 몇 차례 거듭되자 검은 사슬 나가의 모습은 더 이상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놈들의 괴성만 들을 수 있었다.
멍.
놀라웠다.
못생기고 쪼그만 놈이 이런 잔재주, 아니 어마어마하나 재주를 갖고 있을 줄이야.
이건 땅의 중급 정령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수준이다.
‘오히려 정령보다 더 낫다고 봐야해.’
정령은 정령사의 마나를 기반으로 힘을 발휘한다.
반면 시쿠는 주인의 마나를 기반으로 힘을 발휘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구덩이는 순식간에 메워졌다.
구덩이를 메운 흙과 그 주변의 흙 색깔과 차이나지 않았다면 구덩이의 존재는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반 검은 사슬 나가를 처치했습니다. 70코인을 습득합니다.
.
.
.
시쿠 혼자 여섯 마리의 검은 사슬 나가를 단숨에 처치해 버렸다.
그리고 그 결실은 손 하나 보태지 않은 어스의 손에 들어왔다.
펫이란 거 알고 보니 제2의 스킬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엄청나게 강력한.
꿀꺽.
‘미안하다, 개똥으로 봐서.’
“주인님, 시쿠가 주인님에게 이빨 드러낸 건방진 놈들을 파묻었다.”
우리 시쿠 뭘 좋아할까? 녀석이 좋아하는 음식을 원 없이 먹게 해주리라.
어스는 활짝 웃으며 시쿠를 품에 안았다.
그런데 땅속에서 나온 놈이 어째서 흙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그 점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스템 자체가 사긴데 거기에 새로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중요한 건 백퍼센트 신뢰할 수 있는 든든한 동료의 등장이다.
이런 녀석을 도시락(?)으로 생각했으니.
‘사람이 말이야 외모만 보고 판단하고 말이야. 어스 너 나빴다. 알지? 앞으론 이러지 말자.’
깊이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어스는 알지 못했다.
이것이 시쿠가 가진 능력의 일부라는 사실을.
* * *
이번엔 제법 규모가 있는 검은 사슬 나가 무리를 발견했다.
울퉁불퉁한 지형이라 도보로 이동하기 영 불편한 지형이었다.
하물며 발이 없는 검은 사슬 나가에겐 더더욱 이동이 힘든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놈들에게 있어 그건 편견에 불과했다.
‘8, 90마리쯤 되네. 이번에도 시쿠가 처리할 수 있을까?’
앞서 시쿠가 처리한 검은 사슬 나가는 여섯 마리였다.
말이 여섯 이지 실제 놈들과 부딪쳐 보면 홀로 그 여섯을 감당하기 벅차다.
익스퍼트 역시.
그런데 그런 놈들을 어른 팔뚝만 한 녀석이 순식간에 매장시켜 버렸으니 시쿠의 강력함이야 말해 입만 아프다.
이번에도 시쿠는 어떤 기염을 보일까 내심 기대하며 시쿠를 소환했다.
시쿠는 금방 자신을 불러준 어스를 무척 고마워했다.
“주인님이 또 불러줬다. 시쿠는 그런 주인님이 너무 좋다.”
고작 불러준 것만으로도 이리 좋아하다니.
또 한 번 양심이 아파온다.
“시쿠 저 아래 봐봐.”
“발딱 선 까만 뱀이다. 주인님을 싫어하는 놈은 나쁜 놈이다. 시쿠가 다 잡아 준다. 시쿠 내려주면 그렇게 한다.”
사랑 중에 제일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던가? 자신을 향한 시쿠의 무조건적인 애정 공세에 가슴 한편이 충만해졌다.
‘정령사가 안 부러워, 정령사가. 흐흐.’
정령사인 프라이스를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정령보다 백배 천배 뛰어난 시쿠가 있기에.
이번엔 또 시쿠가 어떤 활약을 보일까 기대하며 냉큼 지상으로 이동했다.
어스의 품에서 훌쩍 뛰어내린 시쿠는 작고 깜찍한 까만 눈을 반짝거렸다.
작은 눈도 예쁠 수 있다니.
“시쿠, 저 녀석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
“시쿠 문제없다. 주인님을 싫어하면 시쿠 무조건 혼내준다.”
“시, 시쿠야…….”
코끝이 시큰하다.
이런 놈을 그렇게 타박했었다니, 벼락을 맞아도 할 말 없다.
“무리할 필요 없어. 알았지?”
“시쿠는 주인님의 명령을 무조건 따른다. 절대 무리하지 않는다.”
자식을 낳으면 시쿠 같은 자식을 낳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스는 시쿠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가, 가서 마음껏 활약해.”
“주인님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다. 금방 갔다 온다.”
돌아선 시쿠는 놈들을 향해 짧은 다리를 열심히 교차했다.
속도가 제법 빠르다.
성인이 전력으로 달리는 정도다.
어떻게 저 다리로 저런 속도를 낼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검은 사슬 나가 무리가 시쿠를 발견했다.
놈들은 시쿠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놈들 입장에서 시쿠는 한입 거리도 안 되는 사냥감이기에.
어스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시쿠를 구할 준비를 했다.
녀석이 불사라곤 하지만 단말마를 겪을지 모르기에 그건 막아주고 싶었다.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는 주인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다.
이마저도 안 하면 그건 욕을 들어먹어도 싼 놈인 것이다.
놈들에게 접근한 시쿠는 땅속으로 쏙 들어갔다.
머리수로 놈들을 단숨에 압살할 수 있는 시쿠였지만 주인의 취향이 생매장인 것 같아 귀찮지만 이 방법을 선택했다.
시쿠가 사라지고 얼마 안 있어 검은 사슬 나가들의 뭉텅이로 차례차례 사라지기 시작했다.
상공으로 이동한 어스는 이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놀란 검은 사슬 나가들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탈출속도보다 땅이 꺼지는 속도가 더 빨랐기에 놈들 역시 모조리 생매장 당하고 말았다.
명색이 6띠 던전 몬스터인데 그런 놈들이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당해 버리니 지켜보는 입장에선 오히려 허탈감마저 느꼈다.
‘마나를 단 1도 안 들이고 저 많은 놈들을 이렇게 쉽게 잡다니. 앞으로 시쿠만 풀어놔도 되겠네.’
정예나 전사 혹은 그보다 상위의 보스에게도 먹힐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반 검은 사슬 나가쯤은 시쿠 혼자 상대해도 될 것 같았다.
어스는 지상으로 내려갔다.
때마침 지상으로 올라온 시쿠가 그를 향해 보무도 당당하게 달려왔다.
“주인님을 싫어하는 놈들 몽땅 땅에 묻었다. 주인님이 좋아하는 생매장이다!”
시쿠가 오해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앞으로 편하게 사냥할 수 있게 된 점이다.
‘앞으로 나 역시 다른 마법사들처럼 뒤에서 우아하게 스킬만 날리면 되는 건가?’
칭찬을 바라는 시쿠의 머리를 정성껏 쓰다듬어 준 어스는 다시 움직였다.
이후 계속된 시쿠의 활약.
팔짱만 끼고 지켜보기만 했던 어스.
그런 둘이 드디어 던전 보스 앞에 섰다.
“시쿠 자신 있어?”
“놈 강하다, 하지만 시쿠는 주인님을 위해 싸운다. 시쿠는 주인님의 적 앞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이 자식 생긴 건 조금 그런데 말은 진짜 예쁘게 한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시쿠를 관객으로 만들어 주기로 했다.
“시쿠 잘 봐라. 네 주인의 힘을!”
철옹성을 빼든 어스는 순식간에 상공으로 이동하여 검은 사슬 나가 보스를 향해 콜 라이트닝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번쩍, 번쩍.
멀찍이서 어스의 활약을 지켜본 시쿠의 툭 튀어나온 작은 주둥이는 전투가 종료되기까지 한 번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좁쌀처럼 작은 그 눈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