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페뉴 자작령을 누비던 어스는 드디어 에이프 보스를 만났다.
한 무리의 정예 에이프를 거느린 놈의 위세는 대단했지만 어스 앞에서는 살아 있는 경험치에 지나지 않았다.
콰르릉, 번쩍!
하늘에서 연이어 떨어지는 콜 라이트닝 앞에 놈의 크고 단단한 몸뚱이는 먼지처럼 흩어졌다.
6,000코인과 보너스 업적 포인트 2가 손에 들어왔다.
‘4띠 던전이었군.’
보너스 업적 포인트는 언제나 꿀이다.
이전과 달리 레벨을 쉽게 올릴 수 없는 상황에선.
놈의 수하들 역시 곧 어스의 손에 정리되었다.
글리시아 남작 영지에서 페뉴로 넘어온 지 2시간 만에 페뉴 자작 영지에 닥친 불행은 걷혔다.
그러나 놈들이 남긴 발자취가 너무 깊어 이를 지우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확실히 브레이크 이전에 정리하는 게 상책이지.’
몬스터를 피해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몸을 숨긴 곳에서 하나둘 기어 나왔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번개와 불이 휩쓴 까만 대지 위에 홀로 서 있는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공포, 죄책감, 상실감 따위의 어두운 감정이 그들에게서 느껴졌다.
그중 공포는 지워졌으나 남은 그 감정들 역시 저들에겐 평생의 흉터로 남을 것이다.
“몬스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말한 뒤 어스는 그들의 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스는 공간을 거듭 돌파하며 자신의 연인이 기다리고 있는 글리시아 영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와 루리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레이몬드 주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원정 일정이 잡혔다며.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바쁘네.”
“앞으론 더 바빠질 것 같아요.”
“지금보다 더 자주 만나지 못하겠네.”
“그래서 말인데 솔론으로 오지 않을래요?”
루리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과 영지를 잇겠다는 생각은 진작 접은 루리아였지만, 가문과 영지에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를 상황이라 그녀는 고심 끝에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어스 역시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하고 있었다.
책임감이 강한 여자였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해요.”
어스는 루리아의 팔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루리아는 그 힘에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의 몸은 하나로 포개어져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둘은 아쉬움을 속에 꾹꾹 누르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마주잡은 손도 곧 떨어졌다.
손끝에 남은 서로의 온기를 놓지 않으려는 듯 둘은 손을 오므렸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리고 언제든 연락해요.”
“고마웠어.”
‘블링크.’
어스는 마음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의 그 음성이 끝나자마자 그의 신형 역시 먼 하늘로 사라졌다.
* * *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단숨에 솔론 왕국 왕도에 도착했다.
던전 처리부 사무실은 신전 내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법진을 관리하는 자들과는 이미 안면을 익혔기에 그들과 짧은 눈인사를 나눈 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밟았다.
곧 던전 처리부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크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기존의 집기를 싹 빼고 새로운 집기로 채워진 사무실의 외양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수고했어.”
“들었어요?”
“들었지.”
“역시, 마법 통신구.”
레이몬드 주교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무실은 세 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었다.
부서장인 레이몬드와 어스의 개인 사무실 두 개와 직원들이 업무를 보게 될 공간이다.
사무실은 남쪽으로 큰 창문을 갖고 있었다.
창문 너머는 관리가 잘된 정원이 자리했다.
던전 처리부의 위치는 신전 내에서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한 곳이었다.
대신 지하 텔레포트 마법진과는 가깝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 참 잠시만.”
레이몬드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캐비닛을 열었다.
청동으로 장식된 목함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딸깍 소리와 함께 목함의 입이 벌어졌다.
“마법 통신구네요.”
“구형 모델이 아닌 신형 모델이야. 조만간 구형 모델의 자리는 이 녀석으로 대체될 거야.”
마법 통신구가 시중에 나온 지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통신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성능에 있어 단 1의 변화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세월이 무색하게 바로 신형 모델이 출시되었다? 그것도 이 시국에? 세 살 먹은 아이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지?”
“형님은 아닌가요?”
사적인 자리에선 친밀감 있는 호칭이 좋다.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모이고 모여 공고한 연대감이 되는 것이다.
“맞아. 실은 이 마법 통신구가 나온 지 꽤 됐다고 들었어. 실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고.”
“던전 브레이크 사태 때문이죠?”
“실시간 정보 공유가 중요한 시대로 돌변했잖아.”
“사용법은 어떻게 돼요?”
“구 모델과 다를 바 없어.”
“이거 더 없어요?”
“말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으니까.”
“이건 어느 마탑이 내놓은 거죠?”
“마탑은 아냐.”
“설마…… 교단?”
“맞아. 정말 다행이지 않나? 난 주교, 자넨 성기사잖아.”
“앞으로 신기한 마법 물품이 속속 등장할지 모르겠네요. 인류의 위기에 영웅이나 용사가 나오듯이 말이죠.”
“그야 모르지. 윗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어. 참, 원정 리스트네. 위에선 하루빨리 정리해주길 바라고 있어.”
“며칠 뒤라고 하지 않았어요?”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페뉴 자작령과 같은 일들이 곳곳에서 터지고 있나 봐.”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이다.
덩치만큼이나 움직임도 느린 교단이 이처럼 재빨리 움직이는 것으로 봐선.
어스는 리스트를 살폈다.
“큰 도시네요.”
“사람과 물류가 모인 중요한 곳이잖아. 일단 리스트에 있는 것들만 처리해주면 여유가 있을 거야. 보상 역시.”
“그런데 우선순위는 누가 정하는 거죠?”
레이몬드는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육사가 챙긴다더니, 내가 곰이네요.”
“사육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자네 몫은 확실하게 챙겨줄 테니까 나만 믿으라고. 추기경님도 허락한 부분이니까.”
레이몬드 주교의 입에 흡사 고래처럼 커 보이는 건 자신의 착각일까? 그래도 레이몬드의 성격을 고려하면 혼자 먹진 않을 것이다.
자신을 섭섭하게 만들면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뻔히 알 테니까.
“마나 포션이나 준비해 주세요.”
“당연히 준비했지. 앞으로 마나 회복 포션 따윈 물처럼 막 쓰게. 하하하.”
드래곤 하트를 얻기 전이었다면 사람 죽일 일 있냐며 눈을 부라리겠지만 지금은 부작용 따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마주 보며 웃었다.
* * *
규모가 큰 도시의 경우에 국가 차원에서 던전 원정이 이뤄진다.
고위 던전의 경우에는 소드 마스터나 고위 마법사가 맡았다.
그 외 등급이 낮은 던전의 경우 그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던전에 들어갔다.
하나 그 어느 던전 원정대도 단신으로 움직이는 어스의 원정 속도를 따르지 못했다.
“오! 경의 명성은 내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네. 이리 보게 되어 정말 반갑네.”
던전 처리부에 배당된 던전 원정의 첫 번째를 차지한 도시는 파리스 왕국 남부의 대도시 하밀이었다.
레이몬드 주교의 연락을 받은 신전 입구에는 하밀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나와 있었다.
신전의 대주교가 직접 어스의 안내를 자청했다.
참고로 교단의 계급은 교황부터 디콘(세속 사제)까지 총 10단계가 존재한다.
그중에서 대주교는 추기경 바로 아래인 고위 성직자로, 성기사인 어스보다 위계가 3단계 높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스는 교황으로부터 해당 던전이 위치한 지역에 한해 필요한 인력과 물자에 대한 징발권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실제 그가 이 권한을 쓸 일은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 마나 회복 포션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당초 어스는 이 권한을 남발할 생각이 없었다.
뒷말이 나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레이몬드 주교가 알아서 할 테니까.’
뒷구멍으로 챙기는 건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 바로 레이몬드였으니, 그를 통해 세탁된 재물만 챙겨도 충분하다.
굳이 제 손에 오물을 묻힐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위해 연회를 마련했지만 어스는 이를 거절했다.
“바로 가겠습니다.”
세상 그 누가 성실한 사람을 싫어할까.
다들 그의 태도에 감탄사만 연발했다.
어스는 도심 중앙 광장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던전 앞에 섰다.
소문을 듣고 많은 이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저분이 소문의 그 성기사님이래.”
“스물도 안 돼 보이는데 괜찮을까? 더구나 혼자 들어간다니.”
“소문의 절반만 사실이면 문제없을 거야. 마법을 물 쓰듯 펑펑 쓴다잖아.”
어스의 명성은 헥터와 솔론 이외에도 여러 나라에 이미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소문이 평민들에게도 퍼진 건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는 출처는 기껏해야 입소문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평민들이 그에 대해 아는 건 교단이 손을 썼기에 가능했다.
사람들의 찬탄과 경외심을 한 몸을 받으며 어스는 던전으로 걸음했다.
던전의 띠는 5개로 소드 마스터나 다수의 고위 마법사가 아니고선 해결할 수 없는 등급의 던전이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 혼자 들어갔으니 이곳에 모인 사람들 입장에선 소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 * *
이번 던전의 몬스터는 블러드 하피였다.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독수리인 이 몬스터는 절벽에 둥지를 틀고 산다.
때문에 비행 능력이 없는 이상 놈들이 공격하기 전까진 손쓸 방법이 없다.
‘소드 마스터 할아버지가 와도 여긴 한 세월이겠네.’
이 던전은 앞서 두 번의 원정이 시행됐다.
던전이 출현한 위치가 대도시의 중앙 광장이다 보니 탄탄한 실력을 갖춘 원정대가 꾸려졌었다.
던전 등급이 높다 보니 두 번의 원정 모두 다수의 고위 마법사와 익스퍼트가 동원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보조하기 위해 정예 병사와 베테랑 용병들 또한 대거 투입되었다.
어스는 굳이 앞서 들어온 원정대를 찾지 않았다.
보스만 처리하면 그들이 어디에 있건, 살아만 있으면 던전 밖으로 무사히 배출될 테니까.
‘업그레이드된 철옹성이 없다면 나도 애먹을 거야.’
들어오자마자 어찌 알았는지 찾아온 블러드 하피 무리를 모두 정리한 어스는 곧장 블링크를 시전했다.
하늘을 제집 앞마당처럼 이용할 수 있는 블러드 하피라곤 하나 공간 이동으로 움직이는 어스는 그들을 눈뜬장님으로 만들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놈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경험치고 코인이다 보니 보이는 족족 그의 손에 생을 마감했다.
-블러디 하피를 처치했습니다. 40코인을 습득합니다.
.
.
.
.
.
-블러드 하피를…….
또 한 무리의 블리드 하피를 처치하자 조만간 레벨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재 어스의 레벨은 62.
미사용 업적 포인트는 2가 남아 있었다.
이건 페뉴 자작 영지에서 날뛰고 있던 보스를 처치하여 받은 것이다.
당시 바로 쓰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냥 남겨두었다.
마나, 생명력 모두 현재 딱히 부족한 걸 느끼지 못하였기에 차후 스킬 위력을 좀 더 높여야 할 상황에 직면할 경우를 대비하여 남겨둔 것이다.
‘뭐지? 놈들이 왜 저기 가득 모여 있는 거지?’
지금까지 자신을 공격했던 블러드 하피보다 더 많은 수의 몬스터가 모여 있는 곳을 발견한 어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장 블링크를 시전했다.
단숨에 현장에 도착한 어스는 블러드 하피 무리의 공격 앞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앞서 들어온 원정대군.’
어스는 곧장 손을 썼다.
체인 라이트닝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블러디 하피를 처치했습니다. 40코인을 습득합니다.
.
.
.
.
.
블러디 하피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던 사람들은 하늘을 내달리는 번개 다발을 보곤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누구지?”
“대마법사님이라도 들어오신 건가?”
“저건 체인 라이트닝이요. 대마법사쯤 되는 분이 굳이 저런 식으로 마나를 낭비할 이유가 없어요.”
“대마법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마법을 저리 쉴 새 없이 쏟아낼 수 있습니까?”
“저런 방식의 마법은 대마법사라도 어려울 것…… 아! 한 사람이면 가능하겠군요. 괴물 마법사로 불리는 성기사 어스 경이라면.”
마법사의 말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리고 곧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한 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등장과 동시에 하늘에 촘촘한 번개의 그물망을 쳤던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성기사 어스라고 합니다. 다들 괜찮으세요?”
“아!”
“여, 역시!”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진짜 이런 마법사가 있다니.”
만인의 응원을 받으며 당당하게 던전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그사이 거리를 배회하는 노숙자도 눈살 찌푸릴 만큼 형색이 엉망이었다.
어디 형색만 그러랴, 그 마음은 이미 절망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사, 살았다. 우린 살았어!”
“우와아아아.”
자연 안도의 한숨이, 안도의 함성이 쏟아질 수밖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