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글리시아 남작 영지와 면한 페뉴 자작령지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
페뉴 자작령 남서쪽 숲에 있던 던전이 터진 것이다.
던전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로 인해 페뉴 자작령 남서 지역의 마을 두 곳이 삽시간에 파괴당했다.
두 마을의 인구는 700명에 달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십수 명에 지나지 않았다.
페뉴 자작은 급보를 전해 듣자마자 곧장 병력을 파견했다.
하나 그 결과는 처참했다.
병력의 70퍼센트가 전사하고 말았다. 사실상의 전멸이었다.
이에 사색이 된 페뉴 자작은 인근 영지와 신전에 도움을 요청했다.
글리시아 남작 영지 역시.
오스완드 남작은 즉시 간부들을 소집했다.
이웃 영지를 휩쓸고 있는 재앙이 언제든 자신들의 영지로 넘어올 수 있는 일이기에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페뉴의 군대는 약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군대가 대파되었습니다. 페뉴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우리도 지켜야 할 백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병력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 역시 행정 총관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지금은 페뉴를 걱정하기보다 우리 영지에 닥칠 위기에 대한 방비가 급선무입니다.”
모두가 지원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두 분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진정된 이후 페뉴와 주변 영지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면 훗날 우리가 그와 같은 사태에 직면했을 때 과연 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습니까?”
오스완드 남작은 말을 아꼈다.
지원 반대를 주장하는 쪽도, 찬성하는 쪽 역시 영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당장 오늘 어찌 될지 모를 상황입니다. 내일을 근심할 여유가 없습니다. 여유가. 설사 지원군을 보내더라도 과연 몇이나 보낼 것이며, 그들의 빈자리는 누가 채울 겁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우리가 보낸 그 성의가 고스란히 전력의 누수로 돌아온다는 걸 정말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언쟁이 점점 격화되어 가고 있다.
이에 오스완드 남작이 탁자를 두들기며 좌중을 이목을 모았다.
“반대도 찬성도 모두 일리가 있소. 향후의 외교를 생각하면 사실 지원군을 보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파병을 주장하던 신하들은 오스완드 남작이 자신들의 손을 들어줬음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저들도 잘 아는 것이다.
병력이 빠지면 그만큼 방어에 누수가 생긴다는 걸.
그러나 신전과 주변 영지들이 모두 지원군을 보내는 데 자신들만 쏙 빠질 경우를 생각하면 고립무원의 처지로 전락한다는 걸 알다 보니 파병을 건의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오스완드 남작 역시 이를 잘 알기에 어느 한쪽만 편들 수 없었다.
잠시 말을 끊었던 오스완드 남작이 다시 말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경비병이 루리아가 왔음을 알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 문 쪽으로 향했다.
침통하던 그들의 표정에 변화가 찾아왔다.
“어, 어스 경?”
“어스 경이 어떻게 여길.”
“오! 이건 기적입니다. 룬께서 글리시아에 내린 기적!”
어스를 향한 사람들의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글리시아는 던전 브레이크라는 재앙에서 한발 비켜날 수 있었다.
글리시아에 해가 될 던전 모두 그의 손에 작살났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그와 루리아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평소 글리시아를 얕잡아 보던 인근 영주들도 언제 그랬었냐는 듯 태도가 싹 바뀌었다.
이렇듯 그 존재만으로도 영지의 날개가 되어준 그가 시의적절하게 등장하였으니 다들 죽은 자식 보듯 볼 수밖에 없었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우연히 듣게 되었네요. 영주님이 허락하신다면 글리시아의 이름으로 페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나?”
“당연히 됩니다. 곧 좋은 소식이 도착할 겁니다.”
루리아를 향해 살짝 윙크를 보낸 어스는 몸을 돌려세웠다.
인벤토리에서 철옹성을 꺼냈다.
그의 시선에 활짝 열린 창문 너머 하늘이 들어온다.
이를 눈에 담은 순간 어스의 신형은 신기루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블링크를 연속으로 시전하여 단숨에 페뉴 자작령에 도착한 어스는 공성전이 한창인 요새에 도착했다.
요새를 공격하는 몬스터는 에이프(육식 고릴라)였다.
놈들의 힘은 오크 전사 둘도 어린아이 다루듯 쉽게 상대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무나 절벽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한마디로 놈들은 살아 있는 공성 병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무려 수백이나 된다.
조그만 요새가 감당할 수준의 숫자가 아닌 것이다.
“쏴! 쏴라! 성벽에 접근시켜선 안 된다!”
에이프는 흔히 볼 수 있는 몬스터는 아니지만 제법 알려진 몬스터다 보니 요새의 사령관은 목이 터져라 궁수들을 닦달했다.
하지만 궁수에 비해 몬스터의 숫자가 더 많았다.
또한 놈들의 억센 털과 질긴 가죽과 두꺼운 근육은 설사 화살이 박히더라도 치명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러니 다들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요새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든 놈들이 하나둘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도, 돌을 던져!”
“기름을 부어라!”
요새의 병력은 고작 80명 남짓이다.
나머진 몬스터를 피해 요새로 들어온 민간인들이다.
이들 역시 병사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아이들이 성벽 위로 돌을 날랐다.
끓는 기름을 덮어쓰고 온몸에 불이 붙은 에이프가 성벽에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발에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일반 병사 서넛이 달라붙어도 상대할 수 없는 놈이 에이프다.
더구나 성벽 위의 폭이 좁다 보니 대형조차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저 중 단 한 마리라도 성벽에 오른다면 그 순간 주변은 피바다가 될 것이다.
요새 사령관은 눈앞이 캄캄했다.
마법 통신구로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장은 지원이 어렵다는 말만 들었다.
버티라는 말만 들었다.
설사 지금 지원군이 출발하더라도 상황이 종료된 후일 것이다.
부릅뜬 요새 사령관의 눈에 거대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그림자의 정체는 에이프였다.
“캬오오오오오-!”
무사 등반을 자축하는지 놈의 입에서 괴성이 터졌다.
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죄다 얼어붙었다.
민간인이건 병사건 예외 없이.
그 순간 사람들은 주마등을 경험했다.
곧 닥쳐올 녀석의 공격에 그저 죽음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만 간신히 공격을 피한 건가 싶었지만 또 그건 아니다.
주위에서 비명이 들리지 않았으니까.
“아!”
“노, 놈이 얼음덩어리가 됐어!”
“어, 어떻게 된 일이야?”
사람들을 덮치기 위해 에이프가 몸을 날리려던 순간 하늘에서 은백색의 창이 떨어졌다.
그것은 아이스 스피어였다.
그것에 맞은 에이프는 그 즉시 동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이곳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성벽에 발을 디딘 에이프 모두 아이스 스피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상공으로 향한다.
아이스 스피어가 날아온 방향이 그쪽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바라본 곳은 텅 비어 있었다.
* * *
‘엄청 편해. 천국이 따로 없구나!’
철옹성을 움켜쥔 어스는 마나 걱정 없이 블링크와 아이스 스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교황청 보물 창고에서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벽에 기어오른 에이프들을 모두 정리한 어스는 이젠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놈들을 공격했다.
그가 선택한 스킬은 이번에도 아이스 스피어였다.
아이스 스피어에 등짝에 꿰뚫린 놈들은 이내 추락했다.
냉기의 영향으로 성벽은 서리로 뒤덮었다.
요새를 위성처럼 돌며 쉴 새 없이 아이스 스피어를 난사하였기에 서리는 빠르게 두터워졌다.
이로 인해 에이프는 더 이상 성벽을 기어오를 수 없었다.
‘됐어.’
이를 확인한 어스는 그제야 성벽에 착지했다.
진한 연두색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한 손엔 창을 들고서.
그를 본 사람들이 다들 제 눈을 비볐다.
“누, 누구지?”
“요새 사람은 아닌데.”
“아까 그 얼음 창을 날리던 마법사님 아닐까? 로브를 보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짧게 일별한 어스는 파이어 버스터를 날렸다.
화염의 정도와 폭발력, 그리고 범위가 파이어 볼의 두 배에 달하는 4서클 스킬 앞에 에이프의 육신은 마른 장작처럼 타올랐다.
‘파이어 버스터, 파이어 버스터…….’
기계처럼 스킬을 찍어 내는 그 모습에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법에 문외한이 보더라도 지금 어스가 벌이고 있는 일이 비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마법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떠오른 이 단어.
“괴, 괴물 마법사다!”
“마법사 어스님이다!”
“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모두 살았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어스를 직접 본 사람들은 여기 없었지만 그에 관한 소문은 이미 파다했기에 다들 확신했다.
“글리시아 영지의 요청으로 지원 온 마법사 어스입니다.”
어스는 글리시아 영지를 유독 강조했다.
이를 어필하는 중에도 어스의 손에선 쉴 새 없이 파이어 버스터가 쏘아지고 있었다.
에이프도 더는 버틸 수 없었던지 요새에서 등을 돌렸다.
어스는 놈들의 뒤통수에 냉소를 날리며 블링크를 시전했다.
‘체인 라이트닝! 체인 라이트닝!’
번쩍.
“끄아아아아아-!”
“꾸아아아아-!”
놈들이 제아무리 빨라도 어찌 블링크를 따돌릴 수 있을 것이며, 어찌 번개를 피할 수 있겠는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블링크를 통해 공간을 넘어 다니는 어스의 손에 펼쳐진 체인 라이트닝에 의해 요새를 공격했던 에이프는 단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조리 쓰러졌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지켜본 사람들은 함성도 잊고 턱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마나 충전(4,800/10,000).
스킬을 그리 남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나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이제 이를 채울 시간이다.
마나 : 690/690.
철옹성에 충전된 마나를 사용하였기에 그의 마나는 그대로였다.
어스는 이를 철옹성에 불어 넣었다.
그러자 5,490으로 변하였다.
열 병도 안 되는 마나 포션을 복용하여 단숨에 마나를 가득 채웠다.
마나 충전(10,000/10,000).
‘꿀이네, 꿀이야.’
앞으로 포션에 체할 일은 없지 싶다.
경험치와 코인을 잔뜩 번 어스는 성벽 난간에 기대어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다시 움직였다.
‘블링크.’
역시 마법사는 첫째도, 둘째도 마나 통이 크고 볼 일이다.
* * *
페뉴 자작령의 주도.
몬스터 침공에 대비하여 주도의 성문은 일찌감치 입을 굳게 다물었다.
주도 인근 마을의 주민들은 빠짐없이 주도로 피신했다.
앞서 병력에 큰 피해를 입은 페뉴 자작은 이를 대체하기 위해 주도의 시민들과 피난민들을 대거 징집하여 성벽에 세웠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페뉴 자작은 마법 통신구를 쥔 문관들을 닦달했다.
“신전은? 이웃 영지들은? 중앙군은?”
“빠른 조치를 취하겠다는 연락이 왔으니 늦어도 내일이나 모레면 도착할 것입니다.”
“내일? 모레? 지금 그게 말이냐! 몬스터 놈들의 이동 속도면 당장 오늘 밤도 위험해! 다시 연락해. 병사들은 제쳐두고 기사와 마법사만 먼저 보내달라고 해.”
“바로 보내겠습니다.”
페뉴 자작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반대편에 앉아 있는 문관들을 향해 소리쳤다.
“칸힐과 로힌에선 연락이 왔느냐?”
자작이 언급한 두 곳은 몬스터 이동 경로에 위치한 요새였다.
그리고 이 두 요새가 함락되면 다음은 바로 주도였다.
그랬기에 그곳의 안위는 매우 중요했다.
“로, 로힌과 연락은 한참 전에 끊어졌습니다.”
“카, 칸힐은?”
자작이 반문하는 사이 문관 중 하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여, 영주님 칸힐 요새 사령관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글리시아의 지원군이 요새를 공격하던 몬스터를 모두 격파했답니다.”
“글리시아의 지원군? 대체 얼마나 몰려왔기에? 규모는?”
“하, 한 명이라고 합니다.”
페뉴 자작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다들 자작이 심정을 이해했다.
어찌 단 한 명의 힘으로 위기에 처한 요새를 구한단 말인가.
이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스 경이라도 왔단 건가?”
누군가 어스의 이름을 언급했다.
칸힐 요새에서 온 소식을 전한 자는 이에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마법 통신구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지원군, 성기사 어스.
“마, 맞습니다. 성기사 어스 경입니다!”
그 말에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말았다.
하나 침묵은 이내 기쁨의 함성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