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던전 처리부의 사무실은 시국이 아닌 솔론 왕국 왕도에 개소했다.
이건 의외였다.
장소가 예상과 달랐으니까.
사실 어스 입장에선 교황청이던 솔론 왕국이던 상관없었다.
어디에 있건 연락만 닿으면 되니까.
교황청에서 돌아온 지 이틀, 어스는 중개인 한스의 요청으로 직접 걸음했다.
그 자리에서 어스는 위그드라실 조각 4개를 건네받았다.
이종족 노예 구입 건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볼일을 마쳤지만 한스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혹시, 요즘 은밀하게 퍼지고 있는 소문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아뇨.”
“모르십니까?”
“일단 뭔지 이야기나 들어 보죠. 무슨 소문이죠?”
“정말 모르시는군요. 실은 내전이 터질지 모른다는 소문이 조금씩 퍼지고 있습니다.”
“내전이요?”
“왕좌를 차치하기 위한 왕자들의 싸움이 터질 거라는 소문입니다.”
프레드릭 국왕은 노환으로 인해 자신의 큰 아들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이것만 보면 다음 대 왕은 1왕자가 될 공산이 농후했다.
현 국왕이 그를 선택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1왕자보단 2왕자, 2왕자보단 3왕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어스는 전날 왕궁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 아니라 그래서였나?’
내전이 터지면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모두 한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교단에 적을 두고 있는 어스에겐 사실 상관없는 일이다.
그를 건드리는 건 교단을 적으로 두겠다는 천명이나 다름없으니까.
하나 가족과 지인은 자칫 그 일에 휩쓸려 피해를 볼 수 있다.
칼엔 눈이 없으니까.
‘한스 씨가 뜬소문 따윌 내게 전할 위인은 아닌데.’
어스의 눈치를 살피던 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왕도를 떠날 생각입니다.”
“왕도를 떠난다고요?”
“그렇다고 당장 떠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종족 노예 구입 중개 건은 마무리하고 떠날 생각입니다. 그 점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열매 건은 당분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면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솔론으로 잠시 피해 있을 생각입니다.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한스의 말에 어스는 솔깃했다.
조국은 헥터지만 마음은 솔론에 더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부동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농장도 거기 있는데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지인들도 살고 있었으니까.
“이 소문, 루리아 영애에게도 말했습니까?”
한스야 가족을 챙겨서 짐만 싸면 된다.
반면 루리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비가 영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책임감이 강한 영주다.
“예.”
루리아의 반응을 한스에게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통신구로 연락하든 아님 직접 가면 그만이다.
교단이 운용하고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면 힘들이지 않고 만날 수 있으니까.
“소나기는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긴 하죠. 솔론으로 간다니 그럼 어디서 지낼 겁니까?”
“그곳에 지인이 있습니다.”
“이종족 노예건도 있으니 그전에 한 번 볼 수 있겠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솔론에 가서 일이 생기면 연락하세요. 힘닿는 대로 도와드리죠.”
그 말에 한스는 몹시 기뻐했다.
한스와 헤어진 어스는 위그드라실 조각을 단숨에 흡수한 뒤 집으로 곧장 이동했다.
집에 도착한 어스는 푸리엘, 거너, 아그네스, 조쉬 그리고 아버지만 따로 불렀다.
“조만간 내전이 터질지 모른다고 합니다.”
어스는 한스에게 전해들은 내용을 말하였다.
그에 다들 크게 걱정했다.
“던전 브레이크로 집과 직장을 잃고 노숙자로 전락한 자들이 지천인데 이런 와중에 내전이라니.”
아들의 말에 행크는 혀를 찼다.
어스와 그는 부자지간이었지만 두 사람이 활동하는 주 영역이 다르다보니 서로가 체감하는 온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푸리엘을 제외한 다른 이들 역시 매한가지다.
“그래서 말인데 이참에 우리도 이사하는 건 어떨까요? 솔론으로.”
“그건 이민이잖아?”
“싫으세요?”
“루시는?”
“솔론에도 아카데미는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요. 다들 반대하지 않는다면 진행할까 생각하는데.”
이 집안의 가장은 행크였지만 이는 명목상이고 실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이는 어스였다.
행크는 어스의 뜻을 좇았다.
“그럼 가게랑 물건은?”
“정리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정리해야죠. 그래도 안 되면 그땐 두고 가야죠.”
“음, 네가 그렇게 결정한다면야 따라야지.”
행크에 이어 거너가 이를 받아들이자 다른 이들도 별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민은 결정되었다.
“전 잠시 나갔다 올게요. 오늘 중으로 못 올 수 있으니까 그렇게 아세요. 참, 노른 씨에게도 물어보세요. 함께 갈지, 남을지.”
말을 마친 어스는 블링크를 통해 곧장 신전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그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여 글리시아 인근 신전이 아닌 솔론 왕국으로 바로 넘어갔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주에 이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 * *
일국의 국왕도 약속을 정해야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추기경이다.
하나 어스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추기경에게 별다른 일이 없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 바로 어스였다.
역시나 어스는 곧장 추기경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엔 레이몬드 주교도 있었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고 싶다고?”
“예, 가능할까요?”
텔레포트 마법진을 구동하기 위해선 많은 재물이 들어간다.
때문에 공적인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방법은 두 가지네.”
“어떤 거죠?”
“첫째는 교황님의 허락.”
곤란하다, 교황과 친분이 깊은 것도 아니니까.
“두 번째는 어떻게 됩니까?”
“열 명 이상의 추기경이 동의해야만 이용할 수 있네.”
“열 분이나요?”
“그렇게 걱정하지 말게. 그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이래서 사람들이 인맥에 목을 매는 게 아닌가 싶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짐을 덜게 되었습니다.”
“천만에 나도 자네가 솔론으로 오는 게 무척 기쁘다네.”
“어스 경, 정말 잘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하하.”
옆에서 경청하고 있던 레이몬드 주교는 쌍수를 들고 그의 이주를 환영했다.
두 사람과 좀 더 대화를 나눈 이후 어스는 그길로 카멜 왕자를 찾았다.
이번에도 어려움 없이 바로 카멜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엔 반가운 얼굴이 둘이나 있었다.
“페어몬트! 프라이스 형.”
“연락도 없이 네가 웬일이냐?”
프라이스의 격한 포옹을 받으며 어스는 소파에 앉았다.
“실은 나 솔론으로 오려고, 가족들과 함께.”
“완전 이주?”
“응.”
“갑자기 왜?”
“오지 마?”
“무슨, 네가 오면 좋지. 안 그래요? 왕자님?”
“당연하지.”
다들 진심으로 그의 이주를 환영했다.
그건 말뿐인 환영에서 그치지 않았다.
“좋아, 이 형님이 저택 하나 쏜다.”
카멜이 호탕하게 웃으며 저택을 약속했다.
저택이면 한두 푼 하는 게 아니다.
더구나 왕도에 있는 저택이면, 그런데 그걸 선물로 주겠다고 하니 아무리 그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지만 어스 입장에선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돈이 없으면 모를까.
“저 예전의 그 어스 아니에요. 돈이라면 저도 넉넉해요. 물론, 왕자이신 카멜 형에게 비할 수 없겠지만.”
“부담 돼?”
“솔직히 말하면 그렇죠.”
“흠, 그러면 어쩔 수 없…… 가만, 너 일전에 프라이스가 준 농장은 그냥 받았잖아? 설마, 나 싫어해?”
“내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싫어하는 사람을 굳이 왜 찾겠어요. 아무튼 마음은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할 수 없지. 그렇다고 네가 이주하는데 아무것도 안하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가구는 내가 쏘마. 이건 사양하지 마. 만약 사양하면 두 번 다신 너 안 본다. 알았지?”
“그건 무섭네. 이러면 받을 수밖에 없겠네요. 하하.”
“그런데 왜 갑자기 이주를 결심한 거야?”
잠시 고민하던 어스는 알고 있는 내용 그대로 말하였다.
“내전?”
“확실한 건 아니고 소문이 그렇다는 거죠.”
“왕도에 던전 브레이크가 있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백성들의 삶이 걱정이군.”
자국도 아닌 타국 백성의 살림살이부터 걱정하는 카멜의 모습에서 그의 그릇이 남다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저런 모습이 성군의 자질일 텐데.
‘하긴 카멜 형이 지지하는 그분도 성군의 자질이 있어 보이긴 했어.’
카멜은 물론 페어몬트, 프라이스는 헥터 왕국의 백성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하나 이도 잠시 카멜은 하녀들에게 명령하여 정원에 술상을 차리게 했다.
곧 자리를 옮긴 네 사람은 옛 일을 추억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언제 한번 다시 모험가로 뭉쳐야지. 아도니스도 가고 말이야. 허허.”
“우리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문제는 어스죠.”
페어몬트의 말을 프라이스가 받으며 히죽 웃었다.
빈 술병이 하나둘 늘어나고, 밤은 점점 깊었지만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다.
새벽까지.
* * *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의 즐거운 자리를 끝낸 어스는 다음 날 루리아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글리시아 영지엔 텔레포트 마법진이 설치된 신전이 없었기에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서부턴 블링크를 사용했다.
포션은 단 한 병도 마시지 않았다.
철옹성에 내장된 마나로 충분했다.
루리아의 방에 갔다가 그곳에 그녀가 없자 곧장 그녀의 개인 연무장으로 왔다.
구슬땀을 흘리며 수련 중인 루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수련에 방해될까봐 싶어 어스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마, 마나 소드!’
어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루리아는 벽을 깨고 새로운 경지에 발을 디뎠다.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가 되었다.
이는 카멜의 수족인 하커와 호커 형제의 예상보다 2년이나 빠른 성취였다.
무아지경에서 벗어난 루리아는 자신의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검면에 비친 낯익은 모습에 루리아는 재빨리 돌아섰다.
“어스?”
“축하해요.”
“언제 왔어?”
기뻐 날뛰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음에도 루리아는 금방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누가 루리아 글리시아 아니랄까봐.
“좀 전에 왔어요.”
“부르지.”
“그랬다면 두고두고 원망을 들었을 텐데 아닌가요?”
“그렇진 않았을 거야. 화는 조금 낫겠지만. 그보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나 안보고 싶었나 보네. 난 엄청 보고 싶었는데.”
“아, 아냐. 나도 그랬어. 참, 나 씻고 올게. 땀을 너무 흘렸거든. 기다려 줄 거지?”
당연한 이야길 왜 저리 진지하게 묻는 건지?
“정자에 있을 테니까 갔다 와요.”
“금방 올게.”
그 말처럼 루리아는 금방 돌아왔다.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머리를 하고서.
‘나처럼 루리아도 날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는 어스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웃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나 솔론에 가기로 했어요. 아주. 이 말 하려고 왔어요.”
솔직히 말하면 루리아도 같이 갔으면 싶다.
하지만 그녀와 자신의 처지가 다르기에 함께 가자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어스의 말이 충격인지 루리아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길어진 그녀의 침묵이 답답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어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헤어지자는 거야?”
“그럴 리가 있어요. 설마, 루리아는 나와 헤어지고 싶어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한다.
자주 듣던 말이다.
하지만 어스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속엔 항상 루리아가 있었으니까.
“아니.”
“다행이네. 진심 놀랐잖아요.”
“지금보다 더 자주 못 보겠네.”
“아뇨, 전보단 더 자주 볼 수 있을 걸요.”
어스는 교황을 만난 일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에 대해서도.
“텔레포트 마법진?”
“예, 그러니 앞으론 자주 볼 수 있어요.”
눈에 띄게 확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루리아의 미세한 표정 변화는 분명 안도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안도하는 그 모습에 어스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주변을 살피던 어스는 냉큼 루리아 입에 자신의 입을 포갰다.
순간 루리아의 눈은 지진을 만난 듯 흔들렸다.
그 눈은 이내 눈꺼풀에 덮였다.
그래서 어스는 좀 더 오래 그녀와 입을 맞출 수 있었다.
좋다, 참 좋다.
하지만 그것도 10분을 넘기자.
‘그런데 이걸 언제 떼지?’
도저히 타이밍을 잡지 못하겠다.
그녀가 눈을 뜨면 그땐 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요? 혹시 자는 건 아니죠?’
난감하다, 몹시.
사실 난감한 건 루리아도 그와 별 다르지 않았다.
어스가 눈이라면, 루리아는 그의 입술이 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때 구원자(?)가 등장했다.
“아가씨! 루리아 아가씨! 어디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