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대륙 동쪽에 위치한 헥터 왕국에서 단숨에 대륙 서쪽의 왕국인 테아노로 전송된 어스는 공간 이동의 여파에 잠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다행히 여파는 오래가지 않았다.
주변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앞으로 두 개의 원 안에 별이 수놓아진 새하얀 법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나이는 오십대 초반으로 보였고, 인상은 깐깐했다.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날 것 같다.
‘오긴 제대로 온 건가?’
어스는 일단 먼저 다가온 남자의 반응부터 기다렸다.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입도 벙긋하지 않는 어스의 반응에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비스듬히 기울였다.
자기소개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앞의 남자도 그렇고 주변의 사람들의 분위기를 봐서도.
“안녕하세요. 어스라고 합니다. 여기 교황청 맞나요? 장거리 공간 이동은 이번이 처음이라 많이 얼떨떨하네요. 하하.”
“가볍고 경박하군. 나이 때문인가?”
‘이 아저씨 뭐지? 지가 뭔데 초면인 사람을 그딴 식으로 매도하는 거지?’
고위 귀족은 물론 국왕이나 왕자들조차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웃는 낯으로 대하였다.
꼭 그런 모습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최소한의 예의, 바로 그 예의를 어스는 원하고 있을 뿐이다.
어스는 정색했다.
“그런 말을 하시는 분은 어떤 분인지 내게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제가 원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초대를 받아 왔으니까요.”
“초대?”
‘뭐지? 나 싫어하나? 혹시, 에스터 추기경의 파벌과 대치하는 파벌의 사람인가?’
그렇다면 남자의 태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 에스터 추기경도 교황청에선 언행을 함에 있어 세 번은 생각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다고 남자를 곱게 볼 수 없었다.
까짓 성기사 안 하면 그만이다.
그거 안 하더라도 솔론에선 백작, 헥터에선 남작이며 그 모든 걸 떠나 개인적으로 가진 역량만 해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무수한 패를 상기한 어스는 흡사 천군만마를 얻은 장군처럼 고개를 발딱 세웠다.
상대보다 키가 커서 내려다보면 카리스마 있어 보일 텐데, 아쉽게도 어스는 앞의 남자보다 머리하나 반 정도 작았다.
‘남자는 키가 품격을 만들지 않지, 남자의 품격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거야. 뿜뿜하고 말이야.’
이는 어스가 생각해낸 말이 아니다.
이전에 읽었던 연애 소설에서 여주가 남주에게 해준 말이었다.
어스는 처음 이 글을 보았을 때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짜릿한 느낌을 받았었다.
이 말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나?”
“마법삽니다.”
어스는 당당하게 말하였고, 그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이 호의적인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그들 역시 본질은 마법사이기에, 교황의 총애와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수석 보좌관 앞에서도 당당하기만 한 어스를 진심으로 대견하게 여겼다.
“쯧쯧. 자각이 없군, 없어. 이러니 특채 논란이 가시지 않는 거겠지만.”
일반적으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선 성직자 교육 기관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고 난 뒤 견습 성직자로 교단에 수년을 봉사해야만 비로소 서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성직자가 다 그런 식으로 뽑히는 건 아니다.
어스와 같은 사례도 드물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으니까.
“성기사 어스. 명심하라. 그대의 존재 의의는 교단을 지키는 거룩한 사명임을.”
헤르먼 수석 보좌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크게도 짖네.’
어스의 귀엔 개소리로 들렸다.
그래도 일단 태도로 봐선 자신보다 직급이 높아 보이는 데다, 에스터 추기경의 충고도 있고 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제야 헤르먼 수석 보좌관이 자신이 누군지 말해 주었고, 어스는 이에 깜짝 놀랐다.
대주교와 동급, 그리고 추기경 중 공석이 생기면 그 자리를 제일 먼저 차지할 권리를 가진 이가 바로 눈앞의 헤르먼 수석 보좌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대 교황중에서 수석 보좌관을 거쳐 추기경으로 오르고, 그 자리에서 다시 교황에 추대된 자들이 열에 다섯이나 된다.
한마디로 자신이 살짝 비볐던 저 남자는 미래 교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꿀꺽.
‘어쩐지 꼬장꼬장하더라니. 그런데 왜 이딴 사람이 마중 나온 거지?’
교황이 자신의 기를 죽이기 위해 저 작자를 보낸 게 아닐까? 점점 그쪽으로 생각이 치우치는 어스였다.
“따라오라.”
“아, 예예. 가야죠, 가고말고요. 하하.”
이건 헤르먼 수석의 기세에 눌러서가 아니다, 어른에 대한 일종의…… 배려? 그래 배려인 것이다.
그렇게 어스는 대륙의 진정한 주인, 신의 대리자로 불리는 교황을 만나기 위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 * *
헤르먼 수석과 달리 교황 아딜레스는 탐스럽고 긴 백미로 인해 흡사 성서를 찢고 나온 성자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성서 찢으면 곧장 이단 심판관과 몇 마디 대화한 뒤 곧장 화형대에 서게 될 것이다.
“성기사 어스, 교황님의 명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룬께 영광을, 교황께 충성을. 충!”
교황을 만나기 전 주입식 예법 교육을 받았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기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병사도 아닌데, 마법산데 마법사에게 이딴 멘트를 강요하는 게 어디 말이 되느냔 말이다.
“보기와 달리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군. 역시, 젊음이 좋군.”
어스가 서 있는 이곳은 교황이 외부의 주요 인사를 만날 때 이용하는 평화의 방이었다.
그래서인지 방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따뜻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었다.
교황과 대면한 순간 어스는 갑자기 긴장감이 몰려와서 봐도 보이지 않고, 앉아도 앉았는지 모를 상태에 빠졌다.
그러니 방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나마 교황이 헤르먼 수석과 달리 부드럽게 대해주어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어낼 수 있었다.
이것이 만약 교황이 의도한 것이라면 제대로 효과를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헤르먼 수석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만큼 교황에겐 호감을 갖게 되었으니까.
“내 경을 부른 건 경의 쓸모가 시대에 걸맞기 때문일세.”
“감사합니다. 교황님.”
“이 모든 게 룬의 안배가 아닌가 싶어. 허허.”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분명 어스는 콧방귀를 꼈을 것이다.
하지만 대상이 교황이다 보니 흘러들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갖게 된 힘의 배경이 룬 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하나 곧 이종족을 향한 교단의 가차 없는 태도를 떠올린 어스는 순간 혹했던 감정을 지워 버렸다.
엘프들이 섬겼던, 어쩜 지금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은 위그드라실을 시스템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30/100).
교단의 역사가 이종족에 대한 공격과 배척에서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교황의 말은 습관적인 말장난이 아닐까?
활성화까지 70퍼센트나 남은 칭호를 떠올린 어스는 더는 교황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교황 아딜레스의 눈에, 헤르먼 수석의 눈에 이채를 머금게 만들었다.
아무튼 교황이 어스를 부른 건 던전과 연관 된 문제가 맞았다.
“……그래서 교황청 직속의 던전 부서를 만들었네. 난 그대가 참여해주길 바라고 있네.”
교황이 선택지를 던졌다.
하나 그건 선택지가 없는 일방적인 명령이나 다름없다.
괜히 교황을 왕중의 왕이라 부르겠는가.
아무튼 어스 역시 교황의 명령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던전 정복은 그 개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에.
그런데 거기에 힘까지 보태준다고 하니 어찌 마다 하랴.
“던전 처리부의 일원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참, 부서장은 자네도 익히 아는 인물일세.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누구?”
“레이몬드 사제. 아, 이젠 레이몬드 주교로군.”
레이몬드 사제의 직급을 정정하는 교황의 말에 한 옆에 석상처럼 서 있던 헤르먼 수석의 얼굴에 노골적인 불쾌감이 스쳐지나갔다.
우연히 이를 보게 된 어스는 레이몬드가 헤르먼 수석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 설마, 레이몬드의 영향으로 자신도 저 사람에게 찍힌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레이몬드가 과연 남의 미움을 살 정도의 행동을 했을지 의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교황의 복심이라 불리는 남자의 미움을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어스는 교황청에 새롭게 신설된 최초의 부서에 일원으로 임명받았다.
의무는 없고 권리만 누렸던 이전과 달리 이젠 막중한 의무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의무의 반대급부는 어스의 입을 순간 함지박으로 만들었다.
‘교황님 인간성 참하네, 참해.’
* * *
어스의 입을 함지박으로 만들어 준 아딜레스 교황의 반대급부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대륙에 흩어진 일정 이상의 규모면 어김없이 설치된 텔레포트 마법진의 상시 이용.
둘째는 던전 원정 업무에 한정하여 해당 지역 내에서의 징발권 행사 허용.
셋째는 교황청 보물 창고에서 하나의 물품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의 부여가 바로 그것이었다.
앞서 두 가지는 업무와 관련된 것이지만 머리를 잘 굴리면 성 몇 채를 지어도 부족하지 않을 재물을 축재하는 것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어스의 눈을 사로잡은 건 역시 교황청 보물 창고에서 보물 하나를 가질 수 있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닌 의무의 반대급부라는 점이다.
교황청 보물 창고는 교황과의 조촐한 알현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루어졌다.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라 불리는 교황청의 보물창고라니…… 뭘, 가져야 하지?’
헤르먼 수석이 재촉만 하지 않았다면 에스터 추기경이나 혹은 레이몬드 주교에게 도움을 구할 텐데 그 점이 못내 아쉬웠고, 그만큼 헤르먼 수석이 못마땅했다.
문자 보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재촉하는 깐깐한 중늙은이의 만행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인간이 질투로 눈이 돌아갈 정도의 물건을 반드시 얻고 말겠어.’
직접 복수할 수 없으니 보물 창고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얻어 이를 대신하기로 단단히 작심한 어스는 엄중한 경비를 지나 드디어 보물 창고 앞에 도착했다.
헤르먼 수석과 함께 보물 창고로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내일 이맘때 다시 오지.”
* * *
어스가 교황청 보물 창고로 발을 디딘 그 시간, 대륙 모처에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교황이라도 언제든 암살할 수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성전단의 당대 당장인 헤롯 추기경과 위그드라실 서커스단 공연장에서 습격을 지휘했던 성전단 제7대 대장 거스티가 바로 그들이었다.
“모든 정황은 놈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추기경님. 아니, 단장님. 그런데 어찌 그런 자에게 보물 창고까지 개방한 것입니까? 이건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이를 막아야 합니다.”
교단에서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하나 교단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보물 창고의 물품이 개인 소유가 된 경우는 그 긴 세월 동안 고작 네 번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 극우 성향이 강한 당대 그리고 전대 성전단마저 경외하던 인물들이었다.
결점은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진정한 성직자들이었다.
반면 거스티로 하여금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이번 다섯 번째 인물은 물증만 없을 뿐 오점이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결코 보물 창고의 보물을 내줘선 안 될 그런 자였다.
해당 보물의 가치를 떠나서 말이다.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피해는 거스티 사제도 알고 있지 않나?”
헤롯 추기경이라고 교황의 결정을 납득한 건 아니다.
그러나 일국의 수도마저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해 버리자 교황의 결정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교황의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기관, 즉 추기경 회의에서도 이런 교황의 뜻을 지지하고 있었다.
지지파의 대표는 에스터 추기경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대외적으로 어스는 에스터 추기경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어스가 에스터 추기경에게 도움만 받는 건 아니다.
어스가 지닌 그간의 성과 그리고 향후의 가치는 에스터 추기경의 날개로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교단 내에 이렇다 할 세력이 없고,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헤롯 추기경 처지에선 반대 여론은 애초 형성하기 힘들었다.
성전단의 당대 단장, 그 직위를 이어받는 자로서 지켜야 할 오랜 규칙은 매번 이번과 같은 상황에서 항상 헤롯의 발목을 잡곤 했다.
“이단을 제거하는 것은 성전단의 고유 사명입니다.”
“당장은 인류에 필요한 사냥개일세. 그러니 당장은 그자에 대한 조사만 조용히 진행하도록 하게. 때가 되면 교단을 좀 먹는 탐욕스러운 무리를 일거에 박멸할 수 있는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을 테니.”
거스티는 헤롯 추기경이 먼 장래까지 내다보고 말하였기에 더는 반발할 수 없었다.
“사냥개의 눈이 어둡길 바라야겠군요.”
보물 창고의 보물을 두고 한 말이었다.
헤롯 추기경 역시 그에 동의하는 지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