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하우든 백작 영지.
도리아가 이끄는 원정대가 던전에 입장한 이후, 주변은 백작가의 병사를 비롯해 중앙 정부와 교단에서 나온 사람들로 지켜지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오 일째에 접어들기 10분을 남겨두고서 검은 소용돌이가 돌연 이지러지며 증발했다.
이에 많은 이들이 크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를 비롯한 최정예 기사단으로 구성된 원정대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변변치 않은 전력의 원정대가 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원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어스의 명성은 사람들의 뇌리에 재차 각인 됐다.
전날 솔론 왕국 왕도의 6띠 던전의 경우와 비교해 이번 원정대는 당시완 질적으로 너무 큰 차이를 보이다 보니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고위 던전이 언제 터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각국은 교황청으로 특사를 파견했다.
어스의 조국인 헥터 왕국 역시 다른 나라와 다름없이 교황청에 특사를 보냈다.
이건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스의 조국은 헥터 왕국이었고, 헥터 왕국 입장에선 자국민인 그를 동원할 명분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헥터 왕국이 이런 태도를 보인 건 그가 교단 소속의 성기사였기 때문이었다.
이 덕분에 어스는 헥터 왕국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본인은 알지 못했지만.
똑똑.
“푸리엘 입니다.”
“들어와.”
어스는 하우든 가문에서 귀빈으로 머물러 있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대접이었다.
참고로 도리아는 그녀를 내켜하지 않던 제 아버지로부터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더해 그녀의 이복 오빠들을 영자에서 아예 추방시켰다.
큰 반발 없이 이 일이 무난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건, 평소 도리아에 대한 영지 내 평판도 작용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어스와의 친분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내실로 들어선 푸리엘은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창가로 향했다.
당연하다는 듯.
어스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무기력한 얼굴을 하고서.
“교단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냥 보내.”
“주교가 직접 왔습니다.”
“주교?”
축 쳐져 있던 어스는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의 표정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
“다들 왜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그걸 모르셔서 하는 질문은 아니죠?”
“알지, 알아. 잘 나도 너무 잘난 내 탓이잖아.”
“풋.”
“웃지 마. 난 심각하다고.”
던전에서 나온 이후 어스는 귀빈실에 꿀단지라도 숨겨둔 곰처럼 칩거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에 관한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삐딱한 말도 있었고, 긍정적인 말도 있었지만 지금의 어스에겐 다 남의 일이었다.
서리 구울 보스 카라치, 놈을 처치하고 던전에서 나올 때만 해도 좋았다.
레벨도 올렸고, 코인 주머니도 빵빵했으니까.
하나 그의 그런 들뜬 기분은 하룻밤 새 나라 잃은 백성처럼 무기력에 빠지고 말았다.
강화 탓이다.
던전 정복 성공 기념으로, 그 기운을 받아 50만에 이르는 코인을 강화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는 비참, 아니 참혹했다.
체인 라이트닝 하나만 간신히 성공했다.
고작 한 단계, 3에서 4로 만들었다.
50만에 이르는 코인을 쏟아붓고서 6도 아니고 5도 아닌 고작 4에서 끝났다.
이러니 어찌 그가 무기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 재산을 날려먹었는데.
“대체 왜 심각한지 이유라도 말해주던가요.”
말할 수 있다면 이미 말했을 것이다.
위로 받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상태창이나 스킬 강화는 가족은 물론 연인에게도 함구하고 있는 비밀이다.
하물며 정체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여자에게 말한다는 건 당연히 어불성설이다.
‘콜 라이트닝 강화에 평생 운을 다 갉아 넣었던 것일까? 과연 그랬던 것일까?’
아마 그랬지 않나 싶다.
살짝 들었던 어스의 고개가, 잠시 꼿꼿했던 척추가 상한 연체동물처럼 힘을 잃었다.
“됐어. 주교는 어디 있어?”
“1층 응접실에 있어요.”
“싫다, 진짜 싫어.”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어스는 곧 쓰러질 듯 비척거렸다.
보다 못한 푸리엘이 그를 부축했다.
잠시 그녀를 쳐다보고, 그리고 그 너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 어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가 어떻게 번 코인인데, 그걸 한 방에…… 크흑.’
또 한 번 눈물이 앞을 가린다.
* * *
“오! 어스 경, 반갑네. 반가워. 하하. 경의 업적이 또 한 번 교단을 위대하게 만들었어.”
고위 사제들은 왜들 저럴까? 어쩜 저리 몸이 후덕할까? 비대할 대로 비대한 교단을 보는 듯했다.
그 덕분에 큰 소리 탕탕 치며 살 수 있지만.
“먼저 찾아뵀어야 하는데 제 몸이 좋지 않아 무례했습니다.”
“아닐세, 아니야. 그래 몸은 괜찮은가? 일전에 최상급 성수랑 최상급 치료 포션에 영약도 몇 가지 첨가해서 보냈는데 잘 받았는가?”
주교쯤 되는 사람이 자신보다 직위가 낮은 이에게 개인적으로 선물을 보내는 경우는 드물다.
아니, 아예 없다.
오히려 하나라도 더 뜯어내면 냈지 절대 제 호주머니를 열지 않는 이들이 바로 고위 사제들이다.
물론 모든 고위 사제들이 다 그와 같지 않겠지만 그런 자들은 극소수라고 보는 것이 맞다.
제아무리 깊은 웅덩이도 고여 있는 이상 썩을 수밖에 없으니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오! 도움이 됐다니 정말 기쁘군, 기뻐. 하하.”
폴링턴 주교가 어스에게 이처럼 살갑게 구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스가 가진 개인적인 역량도 역량이지만 그보단 그의 후견인을 자청하는 에스터 추기경의 영향이 컸다.
교단 내에서 에스터 추기경의 입지는 전에도 작지 않았지만, 어스로 인해 에스터의 영향력은 전보다 두 배 이상 커졌다.
이번 하우든 백작 영지에서의 사건 이후, 해서 일각에선 차기 교황에까지 그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이러니 폴링턴 주교가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한 식구끼리 감사는 무슨,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 몸을 찾으시게 내 자네 일이라면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겠네. 하하. 피곤할 텐데 이만 돌아가야겠군.”
폴링턴 주교가 가자 이번엔 기다렸다는 듯 도리아가 그를 찾아 왔다.
하우든 가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면서 이복 오빠들의 잔재를 정리하기 바빠 지난 며칠 그녀와 얼굴을 맞댄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녀의 얼굴은 꽤나 피곤해보였다.
“폴링턴 주교는 무슨 일로 왔대요?”
도리아는 폴링턴 주교를 내켜하지 않았다.
그녀 입장에선 당연했다.
이복 오라비인 홀튼의 편에서 자신을 견제한 핵심 인사 중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 바로 폴링턴 주교였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이젠 옛말이다.
폴링턴 주교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성기사가 자신의 편이었으니까.
“별일 아니에요. 그보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가지가 많다보니 솎아내는 게 쉽진 않네요.”
재산이 많으면 관리가 힘들고, 지위가 높으면 그에 따른 책임도 가중된다.
최근 도리아를 통해 이에 대해 눈뜬 어스였다.
“도리아 영애라면 잘 할 거라 생각해요.”
“노력해야죠.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공간 주머니는 왜?”
전엔 하나만 구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공간 주머니였지만 이젠 감당이 힘들 정도로 많아졌다.
다들 공간 주머니에 담아 선물(?)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제 개인적으로 드리는 감사 선물이에요.”
“개인적으로 지출할 일이 많을 텐데 마음만 받을 게요.”
도리아와는 계속 친분을 이어 나갈 생각이다.
그녀 개인의 능력도 차고 넘치지만 수년 이내에 하우든 가의 주인이 될 인물에게 마음에 빚을 남겨 놓으면 당장은 몰라도 훗날, 만에 하나 자신에게 곤란한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바랄 수 있으니까.
어스가 한사코 거절하자 도리아는 공간 주머니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도리아와 짧게 환담을 나눈 어스는 또다시 무기력한 모습으로 돌아와선 약에 쩐 슬라임 움직이듯 흔들의자로 돌아갔다.
* * *
던전 정복 이후 일주일 동안 실의(?)에 빠져 지내던 어스는 루리아의 여동생 소피 글리시아에게서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글리시아 영지를 도와달라는 내용의 문자였다.
다른 곳도 아닌 루리아가 현재 머물고 있는 영지에서 그와 같은 사건이 터진 이상 이를 좌시할 어스가 아니었다.
“푸리엘, 난 지금 즉시 글리시아로 가야해.”
“루리아 영애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글리시아에서 던전이 터졌어.”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건 전쟁, 전염병 그리고 몬스터였다.
그랬던 인류에게 새로운 위협이 하나 더 추가됐다.
바로 던전이다.
던전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했다.
미지의 존재니까.
그랬던 분위기는 던전 원정이 이뤄지면서 이를 중요한 자원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던전 브레이크 현상이 알려지기 전까지.
“거긴 앞서 정리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푸리엘에게 그 말을 했던가?
순간 기억이 가물거린다.
“도시나 마을에만 던전이 있는 건 아니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도 있어.”
“던전 브레이크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 자주 일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한번 일어나면 강중약으로 나뉘는 몬스터 웨이브의 강에 해당하는 수준의 피해가 발생한다.
저등급 던전 브레이크임에도 말이다.
하물며 4띠 이상의 던전이 터진다면 역사에 거론될 수준의 몬스터 웨이브 급이라고 봐야 한다.
아직, 3띠 이상의 던전이 터졌다는 소문은 없었다.
“보다 정확한 건 가서 확인해야지.”
“먼저 가세요. 전 뒤따라가죠.”
“도리아 영애에겐 대신 말해줘.”
창문을 활짝 열고 테라스에 딛나 싶은 순간 어스의 신형은 꺼지듯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장면을 자주 보다보니 이에 완전히 적응한 푸리엘은 곧장 도리아 영애를 찾았다.
* * *
글리시아 남작 영지는 왕국 서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스가 출발한 하우든 영지에선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동한다면 마차로 2주일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시야가 닿는 곳까지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이동 스킬을 가진 어스에게 그쯤은 반나절 거리였다.
초 단위로 포션을 비울 경우다.
제아무리 어스라곤 하지만 사실 초 단위로 포션을 비우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긴박한 전투에 임하듯 포션을 들이켰다.
‘젠장, 포인트를 몽땅 정신 스탯에 줬어야 했는데.’
포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블링크 횟수는 두 번이다.
정신 스탯 5, 마나로 치환하면 25가 되는 그 수치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62).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29/100). 승리의 노래(10/12).
생명력 : 365/365.
마나 : 530/530.
인벤토리 : 1(+5).
스탯 : 힘(2.5). 체력(54). 민첩(2.5). 지력(50). 정신(87).
직업 스킬(9/9) : 매직 애로우(+5/12). 파이어 애로우(+3/12). 파이어 볼(+3/12). 파이어 버스트(+3/12). 아이스 스피어(+3/12). 일루젼(+3/12).
콜 라이트닝(+5/12). 블링크(+3/12). 체인 라이트닝(+4/12).
업적 포인트 : 0.
코인 : 8,064.
레벨 하나 올리기도 쉽지 않던 50대 구간에서 단숨에 60대 초반까지 레벨을 끌어 올렸다.
그에 따른 포인트도 상당했지만 균형을 생각해서 분배하다 보니 일이 이리되고 말았다.
‘체인 라이트닝이 아니라 블링크를 했어야 했나?’
터무니없는 소리다.
블링크를 4강 만들어도 여전히 마나는 20이 부족하니까.
그래서일까? 2단계 남은 승리의 노래가 유독 아쉬웠다.
저 멀리 글리시아 남작 영지의 주도가, 영주관이 그의 눈에 꽉 들어찼다.
‘블링크.’
영주관 정문에 내려서자마자 그를 발견한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창을 겨눈다.
하나 그 창은 겨눠지기 무섭게 제 위치로 이동했다.
“어, 어스 님!”
경비병들이 그를 알아보았기에.
“안에 기별을 넣어 주세요.”
병사는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 영주관의 집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스는 다그치듯 질문했다.
“루리아 영애는 안에 있습니까?”
“영주님과 함께 데린 마을에 가 계십니다. 그보다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소피 영애에게 연락 받았습니다.”
“오! 정말 다행이네요. 다행입니다.”
“데린 마을 방향이 어딥니까?”
루리아의 안전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마음 놓을 수 없었다.
그러니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집사 입장에서도 그가 서둘러 주면 좋은 일이었기에 즉시 방향을 가리켰고, 그 순간 어스의 신형은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데린 마을로 출병한 영주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집사는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불 수 있었다.
몇 달 전, 이 영지에서 어스가 보여 준 가공할 능력을 감안하면 던전 브레이크도 문제 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