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어스는 자다 깨기를 수시로 반복하며 긴긴밤을 간신히 떠나보낼 수 있었다.
머리털 나고 이번처럼 길었던 밤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수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우드드.
잔뜩 움츠렸던 몸을 펴자 온 관절이 죄다 비명을 내질렀다.
어떤 곳은 시원하고 또 어떤 곳은 바늘로 찌른 것처럼 아프기까지 했다.
마법사로 각성한 이후 통증과 담쌓고 지냈던 그로선 신선하기 그지없는 경험이었다.
‘설마, 생명력이 깎인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태창을 열어본 어스는 자신의 눈을 연방 비비기 시작했다.
생명력 대신 다른 것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칭호 : 승리의 노래(10/12).
‘……이게 왜 변했지?’
마나 회복 포션의 과도한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잊기 위해 어스는 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연공법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운 좋게 그는 또 한 번의 무아경을 맛보았다.
그 상태에서 알림이 울리는 바람에 미처 듣지 못했다가 이번에 알게 된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칭호도 경험치를 먹은 건가?’
당연히 그럴 리는 없다.
그랬다면 진작 활성화 단계인 12단계까지 올랐어야 한다.
남은 단계는 앞으로 2단계.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나쁜 일이 아니었기에 원인에 대한 궁금증은 있을망정 이 자체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마나 회복률 10퍼센트 추가 상승.
마나 +150 증가.
생명력 +200 증가.
‘한 번 더 과다 복용을 해 봐?’
마나와 생명력 총합 350이면 117번의 레벨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후유증 한번 거하게 앓고 나서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도 이런 장사가 없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어스는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또 하나의 알림이 있었지만 그 역시 기억하지 못하고서.
어스는 곧장 블링크를 시전했다.
갑작스러운 외박(?)에 걱정하고 있을 일행을 안심시키기 위해.
* * *
어스가 캠프에 모습을 드러내자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처럼 흐렸던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맑게 개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그가 잘못되면 던전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확률이 100퍼센트에 근접한다는 걸.
그러니 다들 생사를 알지 못해 마음 끓이던 가족이 돌아온 것처럼 반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라.
“어스 경이 돌아오셨다!”
“어스 경이 무사하시다!”
“와아아.”
이런 이유가 저변에 깔려 있었지만 환대 받는 입장에선 기분 좋은 일이다.
더욱이 생각지도 못했던 칭호도 자그마치 3단계나 오른 상황이다.
소란을 듣고 선임 기사 매튜를 필두로 네 명의 기사와 두 명의 마법사가 속속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스를 발견한 매튜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스 경, 대체 어찌된 영문입니까? 다들 어스 경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 컸습니다. 혹시, 부상이라도 당하신 겁니까?”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하하.”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도리아와 푸리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의아한 마음을 품었을 때 푸리엘이 장내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리아 영애는 어디 갔나? 그런데 표정이 왜 저래? 화났나?’
입장 바꿔 생각하면 푸리엘 입장에선 충분히 화날 일은 맞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못 왔어. 걱정 많이 했지?”
“일단 장소를 옮기시죠.”
“그, 그래.”
두 사람은 곧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푸리엘 씨, 아가씬 아직 주무십니까?”
“예.”
“어스 경 때문에 밤을 설쳤나 보군요. 하긴 저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긴 했죠.”
매튜를 뒤로한 어스와 푸리엘은 이글루로 들어갔다.
푸리엘과 도리아가 거처로 삼고 있는 이글루였다.
매튜의 지시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오직 한 사람, 용병 막스만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 * *
푸리엘을 따라 이글루도 들어온 어스는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도리아를 볼 수 있었다.
어스가 알고 있는 도리아는 부지런함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이 여태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건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으로 인해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걸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도 수척해졌어. 몸이라도 아픈 건가? 설마, 나 때문인가?’
갸웃.
“푸리엘 혹시 도리아 영애가 아픈 거야?”
그렇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나를 실체화할 수 있는 초인이 몸져누울 정도면 매우 위중한 상태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도리아 영애는 독에 당했습니다.”
“독! 방금 독이라고 했어?”
“예.”
“호, 혹시 죽은 건…… 아니지?”
“그건 아니에요. 해독했으니 독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은 지쳐서 잠이 든 것뿐이에요.”
“다, 다행이네. 그런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중독 경로는 경구일 가능성이 높아요. 이를 감안하면 독을 쓴 자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경구면…… 음식이나 물에 독을 탔다는 거야?”
“예.”
푸리엘의 말에 어스는 도리아와 입장을 바꿔 자신이 만약 그런 식으로 독을 당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생명력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으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몸을 해치는 독을 먹는다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한번 확인해야겠어.’
당장은 남의 일이지만 장차는 자신이 겪게 될지도 모르니까.
“확실한 거야?”
“혹시나 싶어 도리아 영애의 신체를 살펴봤습니다.”
“보면 알아?”
“예.”
“혹시, 독도 쓸 수 있어?”
푸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듣지 않았지만 그것이 부정이 아닌 긍정이란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푸리엘이 더 꺼림칙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감정은 거기서 더 나가지 않았다.
어스가 믿는 구석은 마법 계약서였다.
“취사를 담당한 자나, 당번병 둘 중 하나겠네.”
“제 생각도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배후는 따로 있을 겁니다.”
“혹시 간부들을 의심하는 거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객원인 우리가 나서기 애매하겠네. 하우든 가문 내부 문제니까. 확실히, 이 문제는 도리아 영애가 직접 나서는 게 맞는 것 같네. 그보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물론입니다.”
“다행이야, 영애 옆에 네가 있었어.”
어스가 이리 말해 줄지 몰랐기에 푸리엘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렇게 봐?”
“절 믿나요?”
“네가 영앨 해칠 이유는 없잖아.”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원정대의 부대장이자 하우든 가문의 선임 기사인 매튜가 찾아왔다.
도리아의 상태는 알려져선 안 된다고 생각한 어스는 밖으로 나갔다.
매튜 역시 용의선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 보니 안으로 들일 수 없었다.
“도리아 영애 곁을 지켜.”
푸리엘에게 도리아를 부탁한 어스는 마른세수를 한 뒤 이글루를 나섰다.
입구에 매튜가 서 있었다.
매튜는 의아한 표정으로 이글루 입구를 응시했다.
어스만 나오고 도리아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스 경, 아가씨는?”
“저 때문에 밤새 못 주무셨는지 주무시고 계시네요.”
“삼 일 밤을 안 주무셔도 멀쩡하신 분인데, 고작 하룻밤 주무시지 못했다고 늦잠을 주무신단 말입니까?”
“에이. 사람이 어떻게 매번 똑같을 수 있겠어요? 이런 날이 있으면 저런 날이 있는 거죠.”
매튜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사람 곤란하게.
“아가씨를 보아야겠습니다. 비켜주시지요. 어스 경.”
매튜의 손은 언제든 발검할 수 있는 위치에 가 있었다.
이에 어스는 바짝 긴장했다.
마나 소드를 맞아 본 적이 없다 보니 자신의 생명력이 버텨 줄지 덜컥 겁이 났다.
당연히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를 직접 봬야겠습니다. 이 무례는 아가씨를 직접 뵙고 난 뒤 사죄하겠습니다.”
도리아가 방문을 거절한 거면 모를까 매튜를 막아설 명분이 그에겐 없었다.
만약 끝까지 매튜를 막는다면 칼부림이 날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부딪친다면 자신이 불리하다.
미리 철옹성을 꺼내놨어야 했는데.
난처한 표정으로 매튜와 입구를 번갈아 보던 그때였다.
푸리엘과 함께 도리아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기사와 지근거리에서 싸우면 열에 아홉은 죽은 목숨이니까.
매튜의 표정이 풀렸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매튜 경, 지금 즉시 대원 전체를 집합시키세요.”
뜬금없는 명령이었음에도 매튜는 도리아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매튜 경이 범인이진 않을 것 같네.’
유심히 지켜본 결과 그리 보였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모르는 것이기에 어스는 인벤토리에서 철옹성을 빼들었다.
철옹성을 손에 쥐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 * *
영문도 모른 채 집합한 원정대는 숨죽이며 여느 날과 다른 날선 모습을 내보이고 있는 도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어스와 푸리엘은 도리아 양옆에 서서 일행을 예의 주시했다.
“매튜 경.”
“예, 아가씨.”
“취사를 담당한 자와 내 개인 당번병을 데려오세요.”
당번병은 나왔지만, 취사를 담당했던 용병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던전이다.
캠프를 벗어나도 갈 곳이 없다.
그런데 캠프를 벗어난다?
어스가 느낀 의문을 어찌 도리아가 모르랴.
“취사를 담당한 자는 누구죠?”
“막스라는 용병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매튜의 표정을 보니 그는 용의선상에서 제외해도 될 것 같았다.
자신만 그리 생각하나 싶어 도리와 푸리엘의 표정을 살폈다.
두 사람 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건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포기!
“내게 독을 쓴 자가 있었습니다.”
도리아가 단도직입적인 태도로 나오자 어스는 내심 깜짝 놀랐다.
독살을 사주한 배후는 일단 제쳐두더라도 하수인의 신병을 확보하고 나서 독살 시도를 밝혀도 밝히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람은 잠시였다.
지금까지 봐온 도리아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다.
멍청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도리아의 말에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웅성웅성.
그중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바로 매튜였다.
매튜는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용병들을 포위하라!”
그에 기사들과 하우든 가의 병사들이 용병들을 포위했다.
당황한 용병들이 자신들의 결백을 소리 높여 주장했다.
이에 매튜는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일갈했다.
“입 다물라! 지금부터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자는 양팔을 자를 것이다. 막스란 자가 속한 용병대는 우측, 그 외 용병은 좌측으로 가라.”
그 말에 일부는 안도하고, 일부는 두려워했다.
“우린 결백합니다! 매튜 경, 도리아 아가씨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마, 맞습니다. 저희가 아가씨를 해칠 이유가 없습니다. 이건 막스 그 개자식의 단독 범행입니다.”
“룬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마법 계약서도 작성하라면 작성하겠습니다!”
다른 일도 아닌 귀족을 독살하려 한 사건인지라 다들 필사적이다.
저들 입장에선 생사가 걸린 일이니까.
매튜는 용병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 후임 기사에게 막스의 신병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매튜의 후임 기사 넷 중 둘이 병사의 절반을 이끌고 막스를 찾아 나섰다.
“찾았습니다.”
막스를 발견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이 찾은 건 막스라는 이름의 시체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듯, 독살을 사주한 배후 역시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도리아는 이에 실망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도리아는 매튜에게 상황 정리를 지시한 뒤 어스와 푸리엘만 대동하고 자리를 옮겼다.
소란의 현장에서 벗어나자마자 어스가 먼저 입을 뗐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여기서 제2, 제3의 하수인을 찾아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예? 그게 무슨 말이죠?”
“누가 사주했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까요.”
“아, 알고 계시다고요?”
“분명, 제 오라비 중 하나일 겁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거든요.”
도리아의 말에 어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어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도리아를 보고, 그리고 푸리엘을 보았다.
그런데 두 여자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표정이 비슷했다.
도리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과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도리아의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 푸리엘은 대체 뭐란 말인가?
‘대체 저들은 어떤 세상을 살아온 거야?’
깰 수 없는 악몽을 꾸는 도리아가 어스는 처음으로 가엽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