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상황이 닥쳤다.
던전 내부를 샅샅이 살펴봤음에도 불구하고 보스 몬스터의 머리털 한 올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다못해 놈이 있을 법한 특이한 형태의 장소역시 보이지 않았다.
보스를 찾지 못하면 당장 던전에서 나갈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이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새 던전의 해가 저물었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인 장엄한 노을이 회색 사막 아래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흐릿했던 달이 완연한 형태로 세상을 비추었다.
‘여긴 뭐지?’
이런 경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라 어스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방도를 강구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다 이내 답답한 듯 벌떡 일어나 서성거리고 앉길 반복했다.
그때 발밑에서 미약한 진동이 보였다.
주변 모양의 모래알갱이들이 일제히 움직인 것이다.
그의 뇌리로 사막 촉수 두더지의 촉수가 스쳤고, 이에 어스는 블링크를 시전하여 상공으로 피신했다.
고개를 숙이자 지표면은 촉수 서식지로 변해 있었다.
앞서 제대로 맞아봤기에 어스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불었다.
‘그때 봤을 때보다 더 많아.’
어쩜 이 던전의 주 몬스터는 호랑 무늬 사막 전갈이 아닌 사막 촉수 두더지이지 않을까 싶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던전 보스 또한 사막 촉수 두더지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니, 사막 촉수 두더지가 맞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에 띠지 않을 리 없을 테니.
‘곤란한데.’
보스를 찾느라 하루 종일 블링크를 사용하느라 다량의 마나 회복 포션을 마신 상태라 포션에 첨가한 딸기 맛 역시 지금은 냄새만 맡아도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포션을 마셔대고 있으니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어스는 자신의 스킬을 나열했다.
고작 아홉 개뿐인 스킬을 그리 말하기엔 대단히 어색했지만 당장은 땅속에 있는 놈들을 상대할 방법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
‘음…… 아이스 스피어와 콜 라이트닝을 섞으면 어떨까?’
어스가 가진 스킬 중 아이스 스피어는 가장 강력한 관통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한 주변에 냉기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스킬의 힘이 다하면 주변을 젖게도 한다.
번개는 물을 만나면 전파력이 발생한다던가? 소설에서 나온 내용으로 그것이 실제인지 아님 작가의 상상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그런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어차피 땅속에 있는 놈들을 제대로 상대할 방법이 없는 이상 이 방법을 시도해도 좋을 듯했다.
사막을 푹 적실 만큼 아이스 스피어를 시전하려면 대체 얼마나 쏟아부어야 할까? 4서클 아이스 스피어에 필요한 마나는 100, 여기에 추락사를 피하려면 블링크도 수시로 써 줘야 한다.
세 번의 아이스 스피어와 블링크의 조합에 필요한 마나는 총 485가 든다.
‘……하급 포션만 마셔대다간 죽을지도.’
그렇다고 중급 포션을 사용하자니 이는 엄청난 낭비다.
중급 마나 회복 포션은 마나 1천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포션을 통해 익사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기 싫다면 당장은 싸움이 아닌 제조부터 해야 한다.
한 병이라도 덜 마시려면.
‘승리의 노래 칭호만 활성화해도 좋을 텐데.’
아쉽다, 참으로.
공격할 대상을 찾지 못한 촉수는 땅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놈들이 제 자리에 있는지, 혹은 다른 장소로 이동 중인 지는 안타깝게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이곳에서 최대한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블링크, 블링크…….’
적당한 지물이 어스의 눈에 쏙 들어왔다.
그곳은 이 주변에서 가장 큰 모래 언덕이었다.
모래 알갱이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몬스터의 출현 여부를 미리 알 수 있음을 알게 된 귀중한 경험을 했다.
이를 확실하게 살려 줄 장소로 모래 언덕만 한 곳이 없었다.
더해 자신의 움직임이 땅속으로 퍼지는 것도 막아줄 테니 모래 언덕은 최적의 쉼터였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바닥에 앉은 어스는 인벤토리에서 공간 주머니와 경량화 배낭을 꺼냈다.
‘몬스터 부산물을 담으려고 샀는데…….’
25개에 이르는 경량화 배낭마다 마나 회복 포션으로 채웠다.
그것도 부족해 20킬로그램, 10킬로그램 공간 주머니에도 마나 회복 포션을 넣어 두었다.
던전 혹은 장거리 이동에 있어 마나 회복 포션의 소비가 매우 많다 보니 이리 되고 말았다.
졸졸졸.
붓고, 채우고 또다시 붓고 채우고를 쉴 새 없이 반복하며 개당 500마나 회복 포션 제작에 사막의 차가운 밤을 하얗게 불태우는 어스였다.
그렇게 모든 작업을 끝마친 어스는 스킬창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고민에 잠겼다.
‘콜 라이트닝을 강화해 볼까?’
콜 라이트닝 역시 다른 스킬들처럼 안전강화까지 해놓은 상태다.
지금부턴 실패가 존재한다.
5서클 스킬이다 보니 한 번 강화에 들어가는 비용은 자그마치 5만 코인으로 현재 보유한 코인으론 세 번의 도전이 가능하다.
앞서 100번이 넘는 강화 시도 끝에 겨우 2번 성공한 사례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매직 애로우다.
아무튼 그때의 사례를 감안하면 성공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희박한데도 자꾸 마음이 기우는 것은 이번 작전에서 콜 라이트닝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자, 해보자.’
어스는 두 눈 질끈 감고 도전을 외쳤다.
한판에 5만 코인!
심장이 덜덜 떨리는 게 단 세 번의 기회가 차라리 다행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강화!
꽝
강화!
꽝.
강화!
꽝.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어스는 탈탈 털린 코인만큼이나 멘탈도 탈탈 털리고 말았다.
“…….”
* * *
저벅저벅.
제자리걸음 20분째. 드디어 눈알이 빠져라 응시하던 모래알갱이가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놈들이 근접했음을 직감한 어스는 고개를 들어 블링크를 시전했다.
그의 육신은 순식간에 상공 백여 미터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파라라.
날개도 없고, 비행이나 부유, 하다 못해 낙하 속도를 줄여주는 스킬 하나 없다 보니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처음에야 실금할 정도로 놀랐지만 일상다반사가 된 지금은 무덤덤해졌다.
완전무결까진 아니어도.
예상대로 놈들이, 아니 촉수가 지표면을 뚫고 솟구쳤다.
쏜살처럼 튀어 올랐던 빳빳했던 촉수는 공격 대상이 없자 이내 힘이 빠졌다.
‘아이스 스피어! 아이스 스피어!’
사막은 어스의 아이스 스피어를 족족 집어 삼켰다.
공격할 대상을 잃고 힘이 빠졌던 놈들이 다시 원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놈들이 공격한 건 냉기를 잔뜩 품은 스킬인데다 땅속 깊이 파고들었기에 여전히 헛발짓만 했다.
간혹 오인하여 지들끼리 싸우기도 했다.
촉수에 눈이 없다 보니 스쳐도 일단 공격부터 하는 듯했다.
저딴 식으로 싸우다 공멸하면 좋겠지만 싸움이 붙기 무섭게 곧 오판임을 인식하곤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적을 찾아 움직였다.
‘아이스 스피어가 꽤 깊이 박혔을 텐데도 죽은 놈 하나 없는 건가?’
대체 저 촉수는 얼마나 긴 걸까?
도리도리.
일단 사막을 적시는 게 중요하기에 어스는 밤새 제조한 포션을 들이키며 아이스 스피어를 쏘아 보냈다.
혹시나 놈들이 모습을 감출까 싶어 이를 가장 크게 걱정했던 어스는 여전한 놈들을 보자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족히 수백 발의 아이스 스피어를 날리자 그제야 사막이 젖었다.
‘성공해야 할 텐데.’
이 방법이 실패하면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기에 콜 라이트닝을 시전하기 전 어스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번쩍! 쫘자자자자.
* * *
-사막 촉수 두더지를 처치했습니다. 50코인을 습득합니다.
……
……
……
-정예 사막 촉수 두더지를 처치했습니다. 100코인을 습득합니다.
-정예…….
……
……
아이스 스피어와 콜 라이트닝의 조합은 거대한 선물을 어스의 품에 안겼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알림에 결과에 대한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 있던 그의 마음을 단숨에 풀어냈다.
‘이래서 사람은 책을 가까이 해야 해.’
뜨거운 수증기가 걷히자 드러난 회색 대지는 전과 달리 까맣게 타버린 흉측한 몰골로 변해 있었다.
겉도 바싹 타고 안은 더더욱 바싹 탔으리라.
몬스터 도감에도 나와 있지 않은 신종 몬스터 사막 촉수 두더지를 박멸한 어스는 지상에 발을 디뎠다.
‘대체 몇 마리나 죽은 거야?’
상태창을 열어 습득한 코인을 본 그의 입꼬리가…… 힘없이 아래로 쳐지고 말았다.
3천 코인가량 벌었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15만 코인을 강화로 날려먹은 게 코인 칸을 보자 욕지기와 함께 생생하게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15만을 쓰고 3천을 벌어놓고 좋다니…… 하아.’
성질이 치민 그는 바닥을 힘껏 찍었다.
쿵쿵쿵.
가가가가각각각.
“…….”
쿵쿵.
그가가가가각.
쿵.
쩌저저적.
지표면이 쩍쩍 갈라지며 그 틈에서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지금껏 보지 못한 거대한 촉수 다발이 그 위용을 들어냈다.
육체를 단련한 전사의 가슴처럼 통 굵은 그 다발들은 유연한 허리를 가진 곡예사처럼 홱 꺾이더니 어스를 향해 곧장 떨어졌다.
‘보스?’
그토록 찾아 헤맨 보스를 이렇게 영접(?)하게 될 줄이야.
시야가 촉수로 인해 가려져 블링크에 제약이 따랐다.
번개와 같은 솜씨로 인벤토리에서 철옹성을 빼든 어스는 하루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무형 방벽을 발동했다.
왕도의 두꺼운 성벽도, 철문도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만큼 강력하고 빠른 촉수 다발은 무형 방벽을 뚫지 못하고 역으로 튕겨 나갔다.
드디어 보게 된 하늘, 그 하늘을 향해 냅다 블링크를 날렸다.
콰콱콱콱콱-!
그가 사라진 자리의 지면은 또 다른 촉수 다발에 의해 먼지가 되어 날렸다.
자욱한 그 먼지 구름을 뚫고서 거대한 동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수면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고래를 연상시켰다.
태양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거대 사막 촉수 두더지는 어스가 예상했듯 던전 보스였다.
놈의 몸 곳곳에는 터지고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꾸오오오오오-!”
‘미친!’
놈에게 정신을 빼앗긴 건 잠시였다.
놈이 잠수(?)하기 전에 결판을 봐야 한다.
‘콜 라이트닝! 콜 라이트닝!’
버번쩍!
두 번의 콜 라이트닝으로 보스를 죽일 수 없다.
마나 블레이드엔 6띠 던전 보스도 한 칼이던데 그때를 생각하면 던전 보스란 녀석들은 마법 한정 막대한 저항력을 갖춘 게 아닐까 싶었다.
쿠우웅-!
콜 라이트닝의 영향인지 던전 보스는 땅파기에 최적화된 앞발 대신 옆구리로 바닥에 떨어졌다.
쩌저적.
육중한 무게 탓에 주변에 균열이 길게 뻗어나갔다.
던전 보스가 저와 같이 넘어졌기에 등짝의 촉수 절반이 본체에 깔려 마른땅에 던져진 지렁이처럼 고통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었다.
‘콜 라이트닝…….’
이제부턴 물량전이다.
쉬지 않고 포션을 마시고 그렇게 채운 마나는 모조리 스킬로 치환하여 던전 보스의 옆구리를 치고 또 쳤다.
벼락만 맞으면 물릴까 봐 아이스 스피어, 파이어 버스터, 일루젼 등 가진 스킬을 모두 퍼부었다.
신들린 듯 그렇게 각종 스킬을 쏟아 붓기만 10분쯤 되자 드디어 그에게 휴식을 알리는 알림이 방문했다.
-던전 보스 라시라쿠를 처치했습니다.
-6,000코인을 습득합니다.
-보너스 업적 포인트 2를 습득합니다.
던전 보스 사냥 성공을 알리는 알림은 보통 여기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영문인지 한 줄 더 있었다.
-던전 보스 라시라쿠의 알을 습득합니다.
“알? 알을 왜죠?”
부화된 상태면 애완 몬스터로 기르기나 하지 이 상태면 프라이팬이나 솥에 넣어 삶아 먹는 것 외엔 딱히 쓸모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황당한 건 왜 하필 괴상망측하게 생겨먹은 두더지가 웬 말인가.
“잠깐, 이거 혹시 영약?”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진 못했다. 던전의 기운이 다하여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던전에서 나갈 시간이었다.
흔들!
일그러진 세상이 폭발을 일으키며 어스의 모습은 그 폭발과 함께 장내에서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