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위그드라실 조각을 자신에게 선물한 노바에게 어스는 감사의 뜻으로 선물을 남긴 뒤 곧장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도리아에게서 연락을 받은 제프니 촌장은 그를 귀빈 대접했다.
일개 마을 촌장이 소유하기엔 너무 큰 집, 아니 저택은 제프니 개인 사병들로 지켜지고 있었다.
참고로 제프니는 자유 마을 촌장이자, 동시에 제법 큰 규모의 상회를 보유한 상회주다.
“도리아 님께 연락받았지만 이리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네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스 님.”
“오랜만이에요, 촌장님.”
“도리아 님을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료봉사도 아닌데 감사는 무슨, 그보다 하우든 가에서 자유 마을을 노린다면서요? 혹시, 영애의 오빠들이 손을 쓴 건가요?”
“도리아 님이 그런 말씀까지 하신 겁니까?”
제프니는 의외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하였다.
“아뇨, 여기 와서 들었어요. 궁금해서 그러는데 하우든 가문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아세요?”
“마을 자율권에 간섭하려는 분은 백작님이 아닌 홀튼 하우든 공잡니다.”
“홀튼이면…….”
“도리아 님의 큰오빠 되는 분이죠.”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죠?”
“도리아 님의 손발을 묶으려는 의도라는 게 저희 판단입니다.”
“이번 던전 시험 때문인가요?”
“그리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스는 홀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리아가 치러야 할 시험은 자그마치 6띠 던전이다.
용병들의 몸값이 높아진 지금 자유 마을은 전처럼 용병들이 많지 않다.
그들 모두를 도리아가 고용하더라도 원정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짐꾼이나 불침번 따위를 세우면 모를까.
‘이 마을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건가?’
설사 있더라도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자유 마을이 하우든 가에 편입되더라도 자신이 상관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나 거너가 자유 마을에서 용병으로 활동할 것도 아니니까.
어스가 마을의 일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자 제프니는 사람을 불러 그가 묵을 방으로 안내했다.
1년 전이라면 깜짝 놀랐을 테지만 이보다 더 좋은 거처를 갖고 있는 어스에겐 감흥조차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몰아쳤던 폭풍우가 말끔히 걷혔지만 그 여파로 인해 사람들은 불편을 겪고 있었지만 거기서 한 발짝 물러나서 보니 세상이 퍽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나 자자, 잠이나.’
멀미로 인한 정신적인 여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이를 녹여버리기 위해 어스는 침대에 몸을 구겨 넣었다.
적당히 서늘한 날씨, 매우 청량한 공기는 꿀잠을 원하는 이들이 바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쿨쿨.
* * *
루비오를 비롯한 십수 명의 단원들이 한날한시에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발칵 뒤집어진 성전단은 급히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실종 당일까지 그들이 성기사 어스의 자택을 은밀히 감시한 사실과 모종의 이유로 그들이 함께 움직인 정황을 찾아냈다.
이후 왕도 내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사건을 모두 확인한 조사대는 루비오를 비롯한 13대 대원들이 몰살당한 장소까지 확인했다.
흔적이 많이 훼손된 현장이었지만 그들은 각종 장비를 동원하여 끝내 그 현장에서 13대의 몰살된 정황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모든 자료가 총망라된 보고서는 헤롯 추기경 손에서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탁.
마지막장까지 모두 읽은 헤롯 추기경은 보고서를 덮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창가로 걸어갔다.
‘진정 그자의 짓일까?’
물증은 없으나 정황은 단 한 명을 지목하고 있었다.
어스 테리우스였다.
교단은 그간 심증만으로 많은 이들을 이단 재판정에 세웠다.
고작 의심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하물며 극단주의 성향이 유독 강한 성전단이다.
그런 그들이 칼을 뽑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헤롯 추기경이 이런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나름 이유가 있어서였다.
【지상에 불길한 문이 열릴지니, 그 문을 닫는 자로 인해 위대한 존재가 긴 잠에서 깨어나 룬의 참된 영광을 이룩할 것이다.】
공유가 금지된 오직 당대 성전단 수장만 알고 있어야 하는 이 예언이 루비오의 지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헤롯이 어스에 대한 일체의 움직임을 중단시킨 배경이었다.
하나 루비오를 비롯한 13대의 일부가 전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은 제아무리 헤롯 추기경일지라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아니, 묵과하고 싶어도 다른 단원들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공산이 매우 높았다.
자칫 잘못하면 제2, 제3의 루비오와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예언을 무시한다? 이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큼직한 제물이 필요하겠군.’
창가에서 책상으로 돌아간 헤롯 추기경은 서랍 안쪽에 들어 있는 오래된 보고서를 빼들었다.
이종족 해방 연합!
보고서의 첫머리를 장식한 단어였다.
* * *
도리아와 푸리엘이 도착하려면 3일은 더 남았다.
길이 좋지 않으니 어쩜 그보다 더 걸릴지 모른다.
제프니 촌장이 편의를 봐주고 있어 몸은 편했지만 대신 시간이 아까웠다.
‘3일이면 던전 두 개는 돌 수 있는데.’
마침 자유 마을로 오는 길에 던전 서너 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생각이 던전에 꽂힌 어스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촌장이 붙여준 전담 하녀에게 외출을 알린 어스는 상공을 향해 이동했다.
침묵의 숲을 가로지르는 코스로 블링크를 연속 시전 하던 그는 곧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던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가깝다는 건 블링크 내지 비행을 통한 이동 방식이 가능한 자들에 한해서지 이곳까지 도보로 오려면 못해도 최소 보름이다.
그것도 짧게 잡은 것이다.
던전 주변은 크고 작은 바위와 듬성듬성 자란 야생화와 잡초가 전부다.
나무도 몇 보였지만 제대로 자라지 못해 하나 같이 여위고 작았다.
하루 전 폭우로 인해 어떤 나무는 뿌리의 반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몬스터도 외면하겠군.’
이곳에 정착하려고 온 것도 아니기에 풍경은 잊고 던전 중심부로 눈길을 돌렸다.
불그스름한 띠 4개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먹기 좋은 등급이네.’
4띠 던전이면 보너스 업적 포인트 2개는 확보한 상태.
인벤토리에서 철옹성을 꺼내 움켜쥔 어스는 곧장 던전 안으로 걸음 했다.
시야가 삽시간에 반전하다 어느 순간 막힌 구멍이 뚫리듯 뻥 뚫리더니 사방이 탁 트인 사막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막이란 지형은 끔찍한 곳이다.
일교차가 극단적인 것도 문제지만 이동이 무척 불편하다.
그러나 어스에게 날씨나 지형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동굴이나 울창한 숲만 아니면 된다.
어스는 보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상공으로 이동했다.
일곱 병의 마나 회복 포션을 마실 때쯤 던전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송아지만 한 크기의 전갈 무리였다.
‘파이어 볼, 파이어…….’
서전은 파이어 볼로 끊었다.
상공에서 곧장 내리꽂힌 응축된 불의 기운이 곧 폭발을 일으켰다.
쾅쾅쾅-!
원거리 공격 수단을 갖추지 못한 놈들은 어스 입장에선 움직이는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놈들은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나 잡아 잡수라는 듯 뭉치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나 회복 포션을 아낄 수 있었다.
2개 마실 걸 1개만 마실 수 있었다.
-호랑 무늬 사막 전갈을 처치했습니다. 35코인을 습득합니다.
……
……
……
‘거저먹기군.’
남들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전투도 블링크를 기반으로 한 그에겐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어렵지 않은.
-레벨업.
-업적 포인트 3을 획득합니다.
55레벨 이후 제법 많은 수의 던전을 돌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던 레벨이 오늘 드디어 움직였다.
대체 얼마 만에 맛보는 레벨업인지.
남은 놈들을 모조리 정리한 어스는 전장에서 떨어진 장소에 착지했다.
‘상태창.’
56으로 변한 레벨, 내내 0으로 기록되어 있던 업적 포인트 칸은 숫자 3이 자신을 얼른 써 달라며 반짝이고 있었다.
업적 포인트는 묵혀 봐야 새끼 치는 게 아니기에 곧장 분배했다.
정신 2, 지력 1.
정신 스탯에 2를 투자하여 기존 490이던 마나는 드디어 500으로 만들었다.
보스를 처치하고 받는 보너스 업적 포인트로 500을 채우려고 했는데.
업적 포인트 분배를 끝낸 상태창을 바라보는 어스의 얼굴은 흐뭇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름(성별) : 어스(남).
직업(레벨) : 마법사(56).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29/100). 승리의 노래(7/12).
생명력 : 350/350.
마나 : 500/500.
인벤토리 : 1(+4).
스탯 : 힘(2.5). 체력(51). 민첩(2.5). 지력(36). 정신(81).
직업 스킬(9/9) : 매직 애로우(+5/12). 파이어 애로우(+3/12). 파이어 볼(+3/12). 파이어 버스트(+3/12). 아이스 스피어(+3/12). 일루젼(+3/12).
콜 라이트닝(+3/12). 블링크(+3/12). 체인 라이트닝(+3/12).
업적 포인트 : 0.
코인 : 172,134.
경계심을 풀고 자신의 상태창에 푹 빠진 어스의 발밑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이에 반응할 사이도 없이 지표면을 뚫고 쇄도한 날카로운 촉수에 복부를 내주고 말았다.
퍽!
생명력 : 230/350.
단 한 번의 공격으로 120의 생명력이 떨어졌다.
근래 이처럼 큰 수치의 생명력 하락은 처음이라 어스는 이에 몹시 당황했다.
급히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제2, 제3의 촉수가 지표면을 뚫고 날아와 어스의 허벅지와 등짝을 찔렀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하나 그 이상의 공격은 어스의 몸에 닿지 않았다.
무형 장벽이 모든 공격을 차단한 것이다.
생명력 : 84/350.
첫 공격을 받았을 때처럼 생명력이 120씩 쭉쭉 닳았다면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죽었으리라.
‘젠장.’
블링크를 시전하여 곧장 상공으로 이동한 어스는 치료 포션으로 생명력을 가득 채운 다음 자신의 심장을 일순간 쫀득하게 만든 몬스터를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다.
쾅쾅쾅-!
땅거죽이 터지고 화염이 모든 걸 뒤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스터의 죽음을 알리는 알림이 들리지 않았다.
‘땅속 깊이 있는 건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던전은 대체로 한 종류의 몬스터만 서식하고 있었다.
실력의 고하가 존재할지언정.
그런데 이 던전은 한 종류의 몬스터만 있는 게 아닌 듯했다.
앞서 처리한 호랑 무늬 사막 전갈의 신체 구조로 땅속 깊이 숨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어스를 공격했던 촉수가 파이어 볼에 당하자 나머지 촉수는 땅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어스는 자신을 식겁하게 만든 예의 그 촉수가 쏙 들어간 지면을 예의 주시하며 바삐 움직였다.
마나 회복 포션을 마시느라 죽을 맛이었지만 어떤 놈인지 꼭 확인하겠다는 각오로 버텼다.
그의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파이어 볼의 폭격이 있었던 장소에서 100미터가량 떨어진 지표면이 크게 들썩이며 다수의 몬스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건 몸의 일부였다.
사막의 모래 색과 동일한 피부를 가진 길쭉한 코를 가진 몬스터로 언뜻 보면 바위로 인식하여 지나쳤을 것이다.
지표 밖으로 나온 건 길쭉한 코였다.
반들거리는 그 코는 사냥감의 냄새를 맡으려는 것인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필시 자신을 찾는 것이리라.
‘뒤졌어. 콜 라이트닝!’
어스는 자신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스킬을 내리 꽂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막 촉수 두더지를 처치했습니다. 50코인을 습득합니다.
……
……
앞서 호랑 무늬 사막 전갈과보다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
‘50코인?’
어스는 깜짝 놀랐다.
4띠 던전 몬스터치고 너무 많은 코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들이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기에 더 이상의 사냥은 불가능했다.
만약 저런 놈들이 세상에 나온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을까 싶었다.
놈들의 몸값은 짭짤했지만 대신 마나 회복 포션의 지출이 심한데다, 사냥도 무척이나 어려웠기에 어스는 놈들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딴 곳은 빨리 나가는 게 좋겠어.’
보스를 찾아 이내 떠나버린 어스. 그를 식겁하게 만든 사막 촉수 두더지는 그가 사라지고 난 이후 한참 뒤에야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쑥쑥.
하나, 둘, 셋…… 그렇게 늘어나기 시작한 코가 사막을 뒤덮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