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푸리엘을 쫓아서 도착한 곳은 인적이 없는 교내 작은 정원이었다.
색색의 꽃들이 만개하여 짙은 향을 뿌렸고, 그 향기에 넘어간 벌과 나비들이 수시로 이 꽃 저 꽃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정원 한쪽에는 터줏대감처럼 자리한 커다란 나무는 사방으로 가지를 길게 뻗고 있었다.
나무를 중심으로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벤치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벤치 하나를 등지고선 푸리엘이 어스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길게 늘어진 덩굴이 5월 하순의 따듯한 버들강아지 몸짓처럼 그 몸을 흔들고 있었다.
당연히 어스의 눈엔 이 모든 것들이 단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푸리엘은 순순히 시인했고, 그건 어스의 경각심을 높이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상대는 그의 인생에 파국을 선사할 열쇠를 가진 증인이었으니까.
성기사들에게 쫓기는 입장이라 이를 대놓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사람 일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보니 어스는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내 입장에선 불쾌한 일이네요. 더구나 다 죽어가는 당신을 살려주기까지 한 내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군요. 그래, 날 찾아온 용건은 뭐죠? 분명 이유가 있으니 날 감시했을 테고, 목적이 있으니 내 앞에 나타났겠죠. 자, 말해 보세요. 내게 무엇을 원합니까?”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고 있으나 아직은 그 선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딱히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도 없고, 불쾌하고 불안하게 만들 생각 역시 없습니다. 만약 내게 그러한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쁜 의도가 아니다?”
“그 증거로 이걸 드리죠.”
푸리엘은 어스의 반응을 촉발시켰던 위그드라실 조각을 던졌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철옹성을 꺼낸 상태가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손밖에 없었다.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 아닌지라 느리게 날아오는 조각을 놓치고 말았다.
조각은 그의 뒤에 떨어졌고, 이를 본 푸리엘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뒤에 떨어진 조각과 그를 번갈아 보았고, 이에 어스는 너무 부끄러워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내가 오른손잡이라…… 흠흠.”
막상 말하고 보니 구차하단 생각이 들었다.
헛기침으로 자신의 민망함을 감춘 어스는 뒤로 걸었다.
시선은 상대를 주시했다.
조각이 발 옆에 위치하자 어스는 이번에도 헛기침을 하며 조각을 슬쩍 주웠다.
100개의 조각을 모두 모으지 않으면 칭호의 활성화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조각의 수배를 풀지 않은 건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비오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당신을 부끄럽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앞서도 말했다시피 내가 오른손잡이라서 그런 거니…… 하아. 이건 됐고. 이걸 내게 준 건 내가 이 열매를 모으고 있다는 것도 안다는 말이겠지요?”
끄덕.
“어떻게 알죠?”
“꼭 대답해야 하나요?”
“강제로 입을 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일단 나쁜 의도는 없다고 없습니다.”
“그럴 의도가 없는 사람이 성기사에게 쫓기고, 이걸 들고 날 찾아온 겁니까?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푸리엘의 표정을 살폈다.
루리아를 통해 나름 단련한 눈이었지만 푸리엘에겐 통하지 않았다.
낯설어서인가?
여하튼 어스 입장에선 퍽 곤란한 상대였다.
눈앞의 여자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기 때문이었다.
장사건 전쟁이건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반은 접고 들어간다던데, 자신이 딱 그 짝이다.
“그들을 죽인 건 제가 아니죠.”
철옹성을 쥔 어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은 여자를 제압하라고 소리쳤지만 상대의 의도는 물론 혹시 모를 상대의 배후까지 고려하여 인내심을 발휘했다.
“협박…… 입니까?”
“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협박범도 있던가요?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자면 현장에서 당신의 흔적을 지운 건 나예요.”
“그래서 이게 순수한 선물이다? 이건가요?”
“마냥 순수한 선물은 아니겠군요. 당신에게 요구사항이 있으니까.”
“차라리 이편이 낫네요. 그래, 내게 뭘 바라죠? 그래 뭘 원하죠? 일단 들어는 볼게요.”
어스는 바짝 긴장했다.
만에 하나 상대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손속에 인정을 버릴 생각이다.
“날 고용해 주었으면 합니다. 근접 경호원으로.”
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요구하거나, 혹은 자신의 힘을 빌리거나, 그도 아니면 교단과 척을 진 것 같으니 교단에 관한 정보를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근접 경호원으로 고용해 달라니,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 나더러 정체도 모르고 의도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 안전을 맡기라는 겁니까? 농담이라면 과하고 진담이라면 날 아주 우습게 보는 거군요. 내가…… 만만해 보여?”
어스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스킬을 시전했다.
그의 주변으로 40발이 넘는 마나 애로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푸리엘의 눈에 이채가 스친다.
짧은 순간이었다.
“당신을 곤란하게 할 생각이었다면 부상당한 몸으로 현장을 정리하는 수고까지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또한, 이런 식으로 모습을 보였을까요? 거기다 선물까지?”
“그래서 묻는 거잖아? 의도를 밝히라고.”
“전부는 말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게 밝힐 수 있어요.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 일은 없을 겁니다. 일단 이건 맹세할 수 있습니다.”
푸리엘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대단히 한심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선택을 내린 건 이 방법이 아니고선 도저히 그의 경호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스 입장에서 불편한 이 만남의 성사 이면엔 그의 지분도 적잖이 있는 것이다.
푸리엘의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어스로선 상대에 대한 경계심과 의심을 버리기 힘든 노릇이었다.
“더해 한 달에 하나씩 당신이 쥐고 있는 열매를 드리죠.”
“이걸 받는 대신 당신을 고용해 달라?”
“거듭 말하지만 당신을 해칠 의도는 없습니다.”
“이유는 말해줄 수 없고?”
“적어도 지금은 말해줄 수 없습니다.”
어스는 생각에 잠겼다.
이 자리에서 여자를 굴복시켜서 의도를 알아내는 게 좋을지, 아님 곁에 두고 천천히 파헤칠지를 놓고서.
‘십수 명의 성기사와 맞설 정도면 실력이 만만찮을 건데.’
싸운다면 패하진 않더라도 손쉽게 제압은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상대가 저 여자 하나면 모르겠는데 만에 하나 저 여자를 움직이는 배후가 있다면 싸움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어스였다.
“대신 마법 계약서를 작성합시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주변인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계약입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일단 당신을 고용하도록 하죠. 어떻게 할래요? 받아들일래요? 아님, 여기서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때까지 싸울래요?”
“원한다면 작성하죠.”
마법 계약서까지 작성하겠다는 상대의 말에 어스는 당혹감을 느꼈다.
마법 계약서를 작성하는 순간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은 반드시 시켜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목숨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이 위험한 계약서까지 승낙한 것으로 봐선 자신을 해하기 위한 접근은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어스는 위그드라실 조각을 달에 하나씩 받고 푸리엘을 경호원으로 고용했다.
‘이거 고용 맞아? 고용된 게 아니라?’
* * *
“혹시…… 여자 친구?”
어스에게 커다란 찝찝함을 안기며 고용된 푸리엘은 오직 자신의 이름만 밝혔다.
그 외 내용은 집으로 오는 동안 알아보려 노력했지만 끝까지 함구하여 어스로 하여금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당연히 기분 나쁘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자신의 여자 친구라고 단단히 오해하는 아버지를 보자 더 기분 나빴다.
더구나 자신에겐 푸리엘보다 백배, 아니 천배 멋진 여자 친구가 있다.
그걸 알…….
‘……모르시는구나.’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게 실수 아닌 실수가 되어버렸다.
“경호원이에요, 경호원.”
“경호원? 네가 저분을 경호하는 거냐?”
“아버지 술 드셨어요? 제가 왜 그런 일을 해요. 당연히 저쪽이 경호원이죠.”
“경호원이라고 보기엔…… 약해 보이는데.”
‘약해 보인다고요? 성기사 십수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여자라고요.’
이기진 못해도 그들을 상대한 실력자다.
만만한 여자가 아닌 것이다.
‘아버진 저 여자에겐 한 주먹거리도 안 돼요.’
그건 이 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제외하고 이 집에서 가장 강한 거너, 아그네스 역시.
말소리를 듣고 엘이나도 현관 앞으로 나왔다.
아들과 한걸음 뒤에 조용히 서 있는 푸리엘을 발견한 엘이나의 눈이 커졌다.
“여친?”
“아버지에게 들으세요. 전 피곤해서 올라갈게요.”
두 번 말하긴 싫어 어머니를 스쳐 지나갔고, 엘이나는 그런 어스를 잡으려다 도리어 행크에게 붙잡혔다.
하지만 입까지 붙잡힌 건 아니다.
“루시는?”
깜빡했다, 동생을.
“그, 글쎄요. 걔는 어디 있을까요? 아카데미?”
“이 녀석이 동생을 버리고 오면 어떡해!”
루시까지 챙길 정신이 없었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걔가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알아서 오겠죠. 아니면, 기숙사에서 자거나.”
“며칠 동안 기숙사 안 열어. 여보, 얼른 아카데미로 가요.”
엘이나는 남편을 재촉하여 집을 나섰고, 그 소리가 제법 컸는지 조쉬 내외가 아들 톰을 안고 나왔다.
“여자 친구분이세요?”
“대체, 왜 그래요? 어딜 봐서 푸리엘이 제 여자 친구로 보이냐고요? 내겐 루리아 누나가 있다고요!”
버럭 소리친 어스는 벙찐 조쉬 내외를 스쳐 지나가려다, 톰이 갑자기 우는 바람에 곧 몸을 돌려선 아기를 달래며 부부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서.”
부부에게 사과한 어스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푸리엘과 함께.
“부끄러우신가 봐요.”
“그보다 우리 톰이 많이 놀랐나 보네. 나온 김에 산책이나 하자고.”
조쉬는 예정에도 없던 산책을 핑계로 아내의 등을 떠밀며 어스가 올라간 입구를 보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 * *
어스는 도리아 하우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섰다.
푸리엘과 함게.
어스는 푸리엘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그녀의 입에선 아무 말도 듣지 못하였다.
대신 가족과 지인의 오해만 잔뜩 샀다.
내내.
그래서 집을 나선 순간 해방감마저 느꼈다.
‘집이 편해야 집이지 안 편하면 그게 집인가?’
차후 분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 같았다.
어스와 푸리엘을 태운 마차는 도리아 하우든이 묵고 있는 고급 여관 앞에 멈추었다.
“수고했어요, 노른.”
“제 일인걸요.”
노른을 보낸 어스는 곧장 여관으로 들어갔다.
로비엔 도리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움을 드러내고 다가오던 도리아는 어스에게 일행이 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분은?”
“제 경호원입니다. 던전도 함께 들어갈 겁니다.”
“어스 경 같은 분을 경호할 정도면 강한 분이겠군요. 반갑습니다. 도리아 하우든이라고 합니다.”
일개 경호원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아는 예의를 차렸다.
어스의 체면을 고려한 행동이다.
하나 곧 그 행동이 무색하게 도리아는 푸리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건 푸리엘도 마찬가지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연인으로 오해할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 어스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했다.
‘둘이 아는 사인가?’
그건 아니었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끌림 같은 게 있었을 뿐이다.
‘그게 뭔데?’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푸리엘도 그렇지만 도리아 영애와도 딱히 친분이 깊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스와 푸리엘은 도리아가 준비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다음 달 10일까지 던전에 들어가면 되는 일이기에 일정이 빠듯하진 않았다.
“이럇!”
마부의 힘찬 목소리가 무색하게 마차는 매우 부드럽게 출발했다.
복잡한 도로를 벗어나 왕도 성문을 지나치며 마차는 속도를 올렸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마차는 침묵만 감돌았다.
도리아와 푸리엘이 서로를 탐색하듯 쳐다보았고, 그 분위기가 무척이나 진지했기에 이에 짓눌려 어스는 입도 뗄 수 없었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로 하우든 백작령까지 가고 싶지 않았기에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도리아 영애, 왜 그러십니까? 제 경호원이 불편하십니까?”
“아뇨.”
“푸리엘은?”
“아닙니다.”
‘그래, 그렇군! 그런 거였어. 나만 불편한 거였어.’
어스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문제에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서로를 적대하는 건 아니니까.
어스는 아예 신경을 끄겠다는 듯 인벤토리에서 마법 통신구를 꺼내 만지작거리다 루리아에게 문자를 보내며 책을 꺼내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의도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이 휩싸인 마차, 그 마차를 누군가 뒤따르고 있었다.
왕도에서부터 붙은 미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