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동이 텄다.
새벽을 알리는 힘찬 닭 울음소리와 함께.
긴장감을 내려놓지 않고 꼬박 밤을 지새웠기 때문인지 어스는 늦은 새벽에 깜빡 졸고 말았다.
그러다 세상을 밝히는 햇빛이 방안으로 스며들어와 얼굴을 쓰다듬자 이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창을 휘두를 것처럼.
그런데 정작 손에 쥐가 날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철옹성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가구 아래에서 관객처럼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창촉이 흡사 이리 말하는 듯 했다.
님, 뭐 하세요? 그렇게.
흠흠.
멋쩍은 표정으로 철옹성을 주워든 어스는 벽걸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자랑할 것 없던 그 시절 유일한 장점이었던 잘생긴 얼굴이 고작 하룻밤 만에 퉁퉁 부어 있는 걸 발견한 때문이었다.
‘밤샘의 결과인가?’
실상은 과도한 야식 섭취가 원인이다.
거울에 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서 돌아선 그는 테라스로 향했다.
삼중 걸쇠를 풀고서.
털썩.
‘하루도 아니고 오늘도 이래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람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도 안자고 버텼다면 모를까 중간에 자버리기까지 했다.
남부끄러워서 말 할 수도 없는 명백한 실수다.
암살자가 그 타이밍에 왔다면 목이 잘리든, 심장에 칼이 박히든, 여하튼 죽고 말았을 것이다.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서.
‘굳이 놈들을 기다릴 필요가 있나? 인질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닌데?’
머리가 안 따라주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자신이 딱 그 짝이지 않은가.
어스는 한동안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기로 했다.
어차피 단독으로 원정에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참에 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중개인 한스가 거너에게 맡긴 위그드라실의 조각부터 회수해야 한다.
“시에라! 시에라!”
시에라가 아래서 그 모습을 보였다.
밤새 뭘 했는지 옷 곳곳에 풀떼기를 묻힌 모습을 하고서.
‘주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치열하게 버텼는데 관리인이란 작자는 밤새 놀았던 거야? 진정, 그런 거야?’
물론 그러라고 등 떠밀었지만 막상 밤새 잘 논 것 같은 시에라의 모습을 보자 섭섭함이 차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을 그녀에게 해소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치졸한 짓거리니까.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좋은 아침이야. 밤새 잘 놀았나봐.”
평범한 안부다 결코 섭섭해서 한 말이 아니다.
이 말에 저의가 있다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리라.
어스는 철옹성을 단단히 움켜쥐고서 당당하게 하늘을 보았다.
‘하늘도 인정해주는군.’
철옹성을 움켜 쥔 그의 손에 힘이 슬그머니 풀린다.
“예?”
“평범한 인사말인데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사람 민망하게. 그보다 나 떠날 테니까 일 생기면 문자해.”
“지금이요?”
어제만 해도 당분간 저택에서 지낼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던 그가 하룻밤 새 태도가 싹 바뀌자 시에라는 내심 당혹스러웠다.
서너 살 먹은 계집아이의 변덕도 아니고.
“응.”
그 말을 끝으로 어스는 블링크를 시전 했다.
테라스에서 순식간에 까마득한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어스는 그 길로 헥터 왕국 왕도를 향해 블링크를 연발했다.
유령이 사라지듯 그렇게 눈앞에서 감쪽같이 어스가 사라지자 시에라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 소리를 듣고 곳곳에서 농장 일꾼들이 튀어나왔다.
“시에라, 무슨 일이야?”
조나단의 물음에 시에라는 여전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경황이 없기는 비단 시에라만이 아니었다.
그녀처럼 눈앞에서 어스를 놓쳐 버린 푸리엘도 그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각했다.
임무의 대상이 종적을 감췄으니까.
* * *
쉬지 않고 곧장 이동한 어스는 헥터 왕국 왕도에 당도했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마법 로브와 부츠는 평범한 옷과 신발로 교체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인벤토리를 뒤적이던 그의 눈에 한 가지 물건이 눈에 쏙 들어왔다.
‘이런 모자도 있었나?’
언제 산 것인지 기억에도 없는 챙이 넓은 모자가 있어 이를 뒤집어썼다.
이러면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리라.
자신의 변장에 만족한 어스는 골목에서 나와 행인들 틈에 섞였다.
짐마차에서 물건을 내리는 거너와 니코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엔 물품 내역을 장부에 기록하는 아그네스가 있었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엔 빈둥거리는 린다를 볼 수 있었다.
‘의수라도 마련해 줘야겠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스는 수상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는지 살핀 다음에야 짐을 내리느라 어수선한 가게 앞으로 접근했다.
“어스?”
“……?”
“왕도엔 언제 온 거야?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운 모자는 뭐야?”
자신의 변장을 단숨에 간파한 니코의 눈썰미에 어스는 깜짝 놀랐다.
대체 어디를 보고 자신이 자신인 걸 안단 말인가?
“어떻게 알았어?”
“뭐?”
“변장했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그거 변장이야?”
거너, 아그네스, 그리고 팔이 하나뿐이라 짐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빈둥거리는 모습으로 미안함을 감추었던 린다가 다가왔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암살단이 혹여 지인들에게도 사람을 붙였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어스에게 있어 이는 매우 불편한 노릇이다.
“들어가 있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쓴 어스는 잰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에 모두가 황당한 표정으로 가게 안을 쳐다보던 네 사람은, 아니 세 사람은 하던 일을 계속했고 딱히 할 일이 없던 린다만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
벽에 딱 붙어 서서 바깥 동정을 살피는 어스의 모습에 린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이에 어스는 그녀의 팔을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감시자가 붙어 있을지 몰라서 그래.”
“감시자?”
“같은 말 반복하기 싫으니까. 다 모이면 이야기해 줄게.”
어스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기에 린다 역시 그와 같이 벽에 등을 기대고 가게 밖을 살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이 평범했다.
짐을 모두 내린 거너, 니코, 그리고 장부를 작성했던 아그네스가 줄줄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스는 다시 한 번도 바깥 동정을 살핀 뒤 가게 안쪽으로 이동했다.
“다들 잘 지냈어?”
“그보다 무슨 일이야? 너 죄짓고 도망 다니는 거야?”
“린다 누난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법 없이도 잘 사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네 행동이 그렇게 말했는데 성질은.”
“내가 언제 성질을 부렸다는 거야? 나 그런 적 없거든.”
“됐어. 그보다 무슨 일이야?”
어스는 국경 도시 헥시움에서 암살단을 방해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네 사람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헥터 왕국은 그렇다 쳐도 교단까지 적극 나섰는데도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면 확실히 대단한 조직이네.”
“그래서 제가 이러고 다니는 거잖아요? 린다 누난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튼 그 때문에 당분간 숨어 지내려고요. 그리고 당분간 집 주변이나 가게 주변에 이상한 놈들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어스의 말에 거너는 가게 밖으로 시선을 던진 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마. 그럼 어디서 지낼 거야? 은신처는 마련했어?”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참, 물건은?”
“너 그것 때문에 온 거야?”
“그것도 있고 형이나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겸사겸사 왔죠. 문자로 이야기하기엔 한계가 있으니까.”
“잘했다. 잠깐 기다려.”
거너는 창고로 들어간 뒤 작은 상자 하나와 큰 상자 하나를 갖고 나왔다.
작은 상자는 위그드라실의 조각이 든 것이고, 큰 상자는 조쉬가 만든 마나 회복 포션이었다.
둘 모두 그의 손이 닿자 인벤토리로 쏙 들어갔다.
“물건이 도착하면 문자 보내세요. 그리고 이 일은 가족들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알아봐야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형들과 누나들도 조심하고요.”
“그건 걱정하지 말고 너나 신경 써.”
“나 하나 지키는 건 일도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요. 참, 필요하면 경호원을 고용하는 것도 좋겠네요. 중개인 한스 씨의 발이 넓으니까 부탁해 보세요. 그리고 이건 혹시나 싶어 드리는 건데 필요할 때 쓰시고요.”
거너에게 돈주머니를 건넨 어스는 아그네스, 니코, 린다와 다음을 기약하며 곧장 모습을 감추었다.
가게 맞은 편 지붕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어스는 곧 상공으로 이동한 뒤 왕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거너 오빠, 어떻게 할 거야? 상황이 꽤나 심각하잖아?”
“당장은 평소 하던 대로 행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특히, 니코 너 입조심해. 알았지?”
“걱정 마. 그보다 어스 녀석 괜찮을까?”
“녀석이라면 걱정 없어. 정작 걱정은 어스의 종적을 놓친 놈들이 형님 내외와 루시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거야.”
“역시, 경호원을 고용해야겠네. 최소 익스퍼트 급으로.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되든 안 되든 일단 알아 봐야지. 한스 씨 만나고 올 테니까 가게 잘 보고 있어.”
차일피일 미룰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거너는 곧장 행동했다.
거너를 보낸 세 사람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변하였다.
* * *
거너 일행을 만나고 곧장 이동한 어스는 이름 모를 산 정상에 발을 디뎠다.
인벤토리에서 상자를 꺼내든 어스는 곧장 이를 열었다.
찌릿.
상자에 들어 있는 조각은 8개였다.
하지만 그중 하나는 가짜였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가짜를 받으니 열이 뻗혔다.
한두 푼도 아니고 자그마치 1만 테스를 허공에 날린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속은 쓰렸지만 그중 7개가 진품이었기에 위로받을 수 있었다.
냉큼 조각을 흡수했다.
칭호 : 위그드라실의 계승자(24/100).
이로써 76개가 남았다.
‘역시, 현상금을 거는 게 정답이었어.’
남은 가짜는 발로 짓이겨 버렸다.
어떤 놈이 팔았는지 몰라도 부디 3대가 내리 거지꼴로 살길.
“정말 나만 몸을 숨긴다고 괜찮을까?”
살인으로 벌어먹고 사는 집단이다 보니 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의 본거지만 알면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서 씨를 말려버릴 텐데.
에스터 추기경이 제 일처럼 나서겠노라 약속했으니 일단 그 말을 믿고 레벨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답답한 속을 탁 트인 전경에 쏟아낸 어스는 곧장 이동했다.
‘블링크.’
* * *
어스를 눈앞에서 놓쳐버린 푸리엘은 일주일간 농장에 머물며 어스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녀의 기다림은 끝내 헛되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임무를 실패하게 된 푸리엘은 결국 로엘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임무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로엘님.”
“실패? 그게 무슨 말인가? 그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실은…….”
푸리엘의 설명을 모두 들은 로엘은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위그드라실 서커스단에서 손을 뗀 이후 이종족 연합의 활동은 잠정 중단된 상태였다.
암살자들의 배후를 색출하기 위해 교단과 헥터 왕국이 음지란 음지는 죄다 뒤지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그들로 인해 가뜩이나 답답한 상황에서 최근엔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솔론 왕국까지 여기에 적극 가세한 상태였다.
인간들의 눈을 피해 오지로 숨어든 동족을 찾아내 아도니스로 보내던 일을 그래서 전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기른 힘을 활용하여 정보 수집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종족의 위치, 암살단의 추적 그리고 위그드라실 조각의 행방까지 오히려 정상적인 활동을 할 때보다 지금이 더 바쁜 로엘이었다.
“헥터 왕국 왕도에 그의 가족이 있네. 명령이 있을 때까지 당분간 그곳에 가 있도록 하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푸리엘은 곧 자취를 감추었고, 홀로 남은 로엘은 서랍을 열어 그간 모은 위그드라실 조각을 빤히 응시했다.
‘조만간 진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했었는데…… 아쉽군.’
조각이 들어 있던 서랍을 굳게 닫은 로엘 역시 안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상단주님, 어디 있다 이제 오세요. 얼른 서둘러야 해요.”
“오냐, 알았다. 알았어.”